김희수 건양대 총장
사람의 눈(眼)은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마음의 창이자 한 사람의 삶의 과정을 보여주는 인생의 축소판이다. 눈이 밝고 맑음은 신체가 건강하다는 말이라고 하니 눈이야말로 심신(心身)의 건전성과 건강함을 드러내는 ‘바로미터’라고 하겠다.김희수(金熺洙) 건양대 총장은 안과의사로서, 교육자로서 ‘밝음(明)’을 주는 삶을 실천해 왔다. 그가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20대 청년의 그것에 비해 결코 밀리지 않을 형형한 눈빛을 가진 이유다. 연일 계속되는 한파에 서울서 논산까지의 길은 적잖은 우려를 안겨줬다. 눈발이라도 날려 초행길을 방해하진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차로 3시간을 달렸을까. 건양대캠퍼스는 영하의 날씨이긴 했으나 하늘은 청명하기 이를 데 없었고 눈발 대신 겨울치곤 꽤 포근한 햇살로 반겼다.
기자 일행의 도착을 알고 대학본부인 ‘명곡관’ 입구까지 마중을 나와 준 교직원들은 하나같이 초록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가슴에는 사진이 박힌 커다란 명찰을 부착하고 있어 누가 누구인지 분간이 쉬웠다. 시골(?)에 있는 대학교치고는 참 이색적이란 생각을 하며 총장실에 들어섰다.
안과의사 60년, 교육자 20년의 삶
“안녕하세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감색 슈트 속에 스카이블루 셔츠, 연보라색 보타이를 매칭한 ‘멋쟁이 총장님’은 정정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건강하고 밝은 모습이었다.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마자 기자의 눈빛을 유심히 살피는 김 총장에게 안과의사가 가진 직업병이냐”고 물었다.
“아, 그럼요.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의 건강 상태도 나타나고 마음 상태도 나타나거든요. 눈이 맑으면 신체도 건강하고 마음이 밝은 사람이죠. 대화를 할 때 상대방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건 마음이 음흉해서 그런 겁니다. 저는 그래서 교수 채용 면접을 볼 때도 제 눈을 보며 눈맞춤(eye contact)을 잘 하는 사람인지부터 봅니다.(웃음)”
올해 나이 83세. 김 총장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서울 ‘김안과병원’의 창업주다. 1928년생이니 6·25전쟁도 몸으로 겪었다. 1950년 6월 중순 세브란스 의대를 졸업하고 고향인 논산 양촌면에 내려가 있던 때 인민군이 38선을 넘어와 그의 고향까지 쳐들어왔다.
의대 졸업생인 그는 우여곡절 끝에 전주구호병원에 배치돼 부상당한 군인들과 피란민 치료를 도왔다. 그가 안과의사를 결심한 것은 그로부터 1년 뒤 대전구호병원으로 옮기면서부터다.
다친 팔, 다리를 별다른 치료도 없이 수술로 절단하며 ‘천국’과 ‘지옥’을 오가던 병원에서, 죽어가던 사람들의 눈빛에서 운명 같은 메시지를 읽었던 것. 죽음의 문턱에 서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운 눈빛이 그의 눈에 들어왔고, 죽어가는 눈을 살리는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1953년에서야 휴전협정이 체결됐고, 그는 대전시보건소 초대 소장으로 부임했지만 3년 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뉴욕 세인트프랜시스병원과 시카고 안과병원 등에서 미국의 앞선 의료기술을 수학했다. 그때 경험한 선진 의료기술이 지금의 ‘김안과’를 이루는 데 초석이 됐다.
1962년 서울 영등포에 ‘김희수 안과의원’을 개원할 때부터 그가 미국서 들여온 의료장비와 의료기술은 입소문을 탔고, 개원 8여 년 만에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안과 전문병원으로 성장했고, 병원을 찾는 환자 수만 연간 42만 명에 달한다. 현재 김안과병원은 50여 명의 전문의와 망막병원, 각막센터, 백내장센터 등을 갖춘 동양 최대의 안과 전문병원으로 성장했다.
그가 교육자로 제2의 삶을 시작한 것은 32년 전. “폐교 위기에 있는 중학교를 인수해 달라”는 고향 어른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건양중학교와 건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건양대의 문을 연 것은 1990년 11월. 현재 학교법인 ‘건양’은 유치원과 중·고등학교, 대학교, 대학병원(2000년 개원)을 아우르는 ‘교육 브랜드’가 됐다. 의사로서 60년, 교육자로서 30년 인생에 대한 소회(所懷)가 궁금해졌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안과의사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광명을 찾아준 것은 매우 소중한 일이었고, 지금도 건양대병원과 김안과병원, 건양대 부여병원을 운영하면서 의술을 통한 기여를 계속하고 있어요. 교육은 나라의 백년대계를 세우는 일이니 또한 소중하지요. 의료와 교육 두 가지를 통해 사회에 봉사할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83년 삶의 모토는 ‘할 수 있다’
학생 수가 8000여 명에 달하는 건양대는 내실 있는 지방대다. 2010년에는 교과부가 선정한 ‘잘 가르치는 대학’으로 선정됐다. 이는 전국 200여 개의 4년제 대학 가운데 11곳만 포함된다.
‘입학한 학생은 졸업이 아니라 취업까지 책임진다’는 김 총장의 강력한 의지로 건양대는 지난 7년간 연속해 졸업생 취업률 90% 이상을 기록했다. 건양대가 자랑하는 건양의대는 2010년 의사국가시험 수석합격자를 배출하는 등 약진에 약진을 거듭하고 있다.
“학교 운영이 어려운 점은 끊임없이 돈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에요.(웃음) 한 가지를 해 놓으면 또 해야 할 것이 보이거든요. 아직도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지방대 학생들이 가진 열등감을 없애주기 위해 다양한 장학금도 마련해 두고 있어요.
우리 학교는 학생 8명 중 한 명이 전액 장학금을 받아요. 학생들에게 자주 해주는 말이 ‘할 수 있다’입니다. ‘You can do, He can do, Why not Me?’ 아닙니까. ‘임파서블(Impossible)’이란 말도 ‘i’와 ‘m’ 사이에 점만 하나씩 찍으면 ‘아이 엠 파서블(I.m.possible)’이잖습니까. 저도 평생을 ‘할 수 있다’란 정신으로 살아온걸요.”
1학기엔 신입생 전원을, 2학기엔 졸업생 전원을 직접 면담하는 그는 학생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파서블 총장님’이다. 자신감과 자긍심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건양대는 그 어느 대학교보다 장학금 인심에 후하다.
한 해 장학금 예산만도 100억 원. 장학금 종류도 다양해 성적 우수자는 기본이요, ‘금연장학금’, ‘비만장학금’ 등 이색적인 장학금도 많다. 도서관을 많이 이용하거나, 자격증을 취득했거나, 봉사활동을 하는 학생들은 포인트를 적립받는데, 포인트 1점당 장학금은 10만 원.
이런저런 장학금이 많아 건양대 학생의 절반은 한 해 적어도 20만 원 이상의 장학금을 받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매년 김안과병원에서 40억~50억 원을 출연하고 있다.
“건양대가 지향하는 대학은 ‘작지만 강한 대학’입니다. 열심히 가르치는 대학인 서울의 서강대와 학생들에게 정직의 철학을 강조하는 포항의 한동대 등을 롤모델로 삼고 있어요. 공부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직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수를 채용할 때도 학창 시절 성적표와 생활기록부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제 눈을 바로 보며 말할 수 있는지, 성장할 때 정직했는지 모두를 보는데 그런 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교수라고 해도 채용하지 않아요.”
잘 가르치는 대학, 취업률 높은 대학으로 공인받고 있지만 김 총장이 보다 무게를 두는 가치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인성교육. ‘바른 청년, 바른 건양인, 하면 된다’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도전적인 건양인 양성이다.
캠퍼스를 누비는 팔순의 ‘총장오빠’
건양대 학생들은 봉사활동 또는 선행을 학점으로 인정받는다. 학생들로 구성된 ‘건양사회봉사단’은 필리핀, 캄보디아, 베트남 등지로 원정 봉사도 한다. 학생들은 우물도만들어 주고, 농촌에서 모심기도 돕고, 아이들에게 수학과 한글도 가르치며 함께 나누는 삶을 체험한다.
김안과병원을 운영하면서 무의촌 진료, 지역 복지관 순회 진료, 초등학교 순회 무료 안과검진 등을 멈추지 않았던 김 총장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무의촌 진료는 의대생들이면 누구나 하는 일이었고, 김안과를 하면서 노인들 백내장 진료나 고아원이나 유치원 아이들 사시 진단 등은 꾸준히 했어요. 노인성 백내장 환자들은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하는 정도만 구분하지 사실은 아무것도 못 보거든요.
사시도 어릴 때 빨리 진단해서 수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고요. 요즘은 김안과 의사들과 봉사활동을 함께 하고 있어요. 6~7년 전부터 1년에 3~4차례 캄보디아에 마련한 무료 진료소에서 무료 진료도 하고 수술도 하고 그래요.”
나라 전체를 통틀어 안과의사가 38명밖에 안 되는 캄보디아는 안과 의료에 관해서는 후진국이다. 김안과병원 의사들의 무료 진료봉사 소식을 들은 후센 캄보디아 총리는 2010년 김 총장을 캄보디아로 초청해 수도인 프놈펜에 국립안과병원(Kingdom Eye Hospital) 설립을 상의하기도 했다.
병원은 올해 안으로 건립을 시작할 계획이란다. 김 총장을 위시한 김안과병원 전문의들은 지속적인 무료 안과 진료와 함께 국립안과병원의 현지 의사 교육, 첨단설비 이용 기술전수 등을 도울 예정이다.
“80이 넘었는데, 아직 시력이 1.2이고 치아도 의치 하나 없이 건강해요. 자기공명영상(MRI)이나 컴퓨터단층촬영(CT)을 하면 아직도 신체나이가 40이라고 하더라고. 하루에 1만 보 정도를 걷는데, 서울서 학교로 오갈 때도 KTX 타고, 지하철로 갈아타면서 많이 걷습니다.
제일 좋은 운동은 아무래도 학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거예요. 화장실도 깨끗한지 둘러보고, 안대를 하고 다니는 학생 있으면 불러서 눈도 봐주고 치료도 해주지요. 학생들하고 많이 만납니다. 제가 지나가면 여학생들이 ‘총장 오빠~’ 하고 불러주기도 한다니까요. 하하하.”
대한민국 현역 대학총장 가운데 최고령이지만 열정만큼은 뒤지지 않을 그에게 ‘은퇴’란 사전에 없는 듯했다. 달력 하나씩 교체할 때마다 늘어나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 김 총장은 “은퇴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그저 지금만큼의 열정이 따라주지 않을 때, 그때가 은퇴 시기가 될 것이란 짐작만 하고 있다고 했다.
“그간 스쳐간 환자가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지만 그래도 기억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영등포에서 처음 김안과의원을 열었을 때 사시(斜視) 때문에 한 쪽 눈을 긴 머리로 가리고 다니던 여직공이 수술 후에 시원스럽게 머리를 걷어 올리고 찾아와 활짝 웃는 모습이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릅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죠. 또 한 번은 전라도에 사는 할아버지 한 분이 병원 앞에서 손자와 옥신각신 다투고 있는 겁니다. 내용을 가만히 들어 보니 손자는 빨리 수술을 하러 들어가자고 하고 할아버지는 ‘네가 어떻게 모은 돈인데 내가 그 돈을 쓰냐’며 손자를 말리고 있더라고요.
그 할아버지가 노인성 백내장 환자였는데, 듣다못해 내가 무료로 수술해 줄 테니 손자더러 수술 후에 필요하니 할아버지께 안경 하나만 맞춰드리라고 했죠. 그랬더니 할아버지도 순순히 제 말을 듣고 수술을 받았죠.”
김 총장의 책상 뒤로는 ‘명찰지원(明察知遠: 밝게 살펴 멀리까지 안다)’라는 휘호가 걸려 있다. 맑은 눈으로 널리 세상을 살피는 깊은 생각. 의사로서, 교육자로서 김 총장의 ‘명찰지원’은 건양대의 역사와 함께 더욱 깊어지고 또한 넓어질 것이다.
김희수
현 건양대 총장·김안과병원 이사장
세브란스 의과대학(현 연세대) 졸업
연세대 의학 박사
미 뉴욕 세인트프랜시스병원 인턴 수료
미 일리노이주립대 안과대학원 수료
인천기독병원 안과과장
제3육군병원 안과과장
대한안과학회 회장 역임
글 장헌주·사진 이승재 기자 ch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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