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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단결(大同團結)이라는 말은 대개 좋은 의미로 쓰인다. ‘크게 하나가 되자’는 뜻이니까 나쁠 이유가 없다. “국민적 역량을 모아 국가적 위기에 대처합시다!” 외환위기를 맞아 금 모으기 운동을 벌였을 때 정부는 이런 구호를 부르짖었다.

“서울광장을 붉게 물들인 붉은악마, 온 국민의 성원으로 대한민국이 4강에 진출했습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스포츠 캐스터는 이렇게 외쳤다. “G20 의장국으로서 온 국민이 일치단결해 참된 국격(國格)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2010년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 개최를 맞아 정부는 이렇게 국민에게 당부했다.
일러스트·추덕영
일러스트·추덕영
한마음 한뜻으로 큰일을 도모하자는 데야 누가 뭐랄 게 없다. 문제는 대동단결이 예상치 못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어로 대동단결에 해당하는 단어는 파시스모(fascimo), 즉 파시즘이다.

우리 사회에서 변혁운동이 활발했던 1980년대에 신군부의 군사독재를 ‘파쇼’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파시즘을 줄여 부른 말이었다.

파시즘은 원래 고대 로마의 개선식에서 사용하던 권력의 상징물인 파스케스(fasces)에서 비롯됐다. 개선식 참가자들이 월계수로 장식된 막대기들을 묶은 다발을 들고 행진했는데, 이것을 파스케스라고 불렀다. 막대기들을 묶었다는 이미지가 곧 권력의 상징이자 대동단결을 나타내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고대 파스케스의 현대적 용도를 처음으로 착안한 사람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의 권력자로 떠오른 무솔리니였다. 전쟁 전부터 이탈리아는 유럽의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서 뒤늦게 뛰어든 식민지 쟁탈전에서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개전 초기에 영국의 꼬드김에 넘어가 연합국 측에 가담했으나, 고무신을 바꿔 신은 팔자가 흔히 그렇듯이 전승국으로서의 혜택도 그다지 받지 못했다.

당연히 전후 이탈리아의 경제 사정은 무척 어려웠고 국민은 무능한 정부를 호되게 비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무솔리니는 당당한 풍채와 열정적인 연설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순식간에 국민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다.

그는 옛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찾겠다고 국민을 현혹하면서 자신을 중심으로 단결하라고 외쳤다. 그렇게 시작된 새로운 정치 체제가 바로 파시스모(파시즘) 정권이었다.

무솔리니의 성공은 개인의 영광과 국가의 발전을 혼동하는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에 모범적인 사례가 됐고, 일약 파시즘이 세계화되는 시대를 열었다. 독일의 나치, 스페인의 팔랑헤(Falange), 일본의 군국주의 군부가 모두 1930년대에 등장한 파시즘 정권들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들은 이렇게 파시즘을 신무기로 삼고 다시 한 번 선발 제국주의 국가들에 도전했다.

결과는 또다시 패배였지만 그래도 제2차 세계대전 후 식민지에서 갓 독립한 국가들(특히 지배자들)은 단숨에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하는 파시즘의 눈부신 성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신생국들이 유사 파시즘인 군사독재 체제로 국가주도형 개발 전략을 채택한 것은 그 때문이다.

여기서 군사독재를 파시즘이 아니라 유사 파시즘이라고 말한 데는 이유가 있다. 파시즘과 독재는 정치권력이 시민사회를 억압하고 국가 주요 정책의 노선을 권력의 뜻에 따라 전횡하는 체제라는 현상에서는 닮았으나 엄밀히 말하면 차이가 있다.

독재는 정치권력이 대다수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하는 체제인 데 비해 파시즘은 비슷한 양태를 보이지만 국민 다수가 지지하는 체제를 가리킨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이 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일 뿐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이 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일 뿐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1930년대 독일의 나치 정권은 실제로 많은 독일 국민의 지지를 받았고, 심지어 나치 정권의 반유대주의마저 지지한 국민도 적지 않았다(그런 점에서 1960~80년대 군사독재 정권이 단순한 독재인지, 파시즘인지는 정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1972년 유신 정권의 성립을 가능케 한 국민투표가 진정 국민 다수의 의지를 표현했다면 파시즘이 되고 부정 선거나 데마고그로 유신 개헌을 관철시킨 것이라면 독재가 된다).

파시즘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대충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가장 천박한 설명으로, 파시즘을 히틀러와 무솔리니 같은 희대의 정신병자들이 대중을 선동해 권력을 독점한 체제라고 보는 것이다.

주로 서구의 보수적 역사가들(역사가는 아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책으로 엉뚱하게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윈스턴 처칠도 여기에 포함된다)이 이렇게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파시즘을 그런 식으로 보면 서구 역사가 면죄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구 역사는 기본적으로 찬란한 진보의 길을 걸어왔으나 갑자기 미치광이들이 등장해 역사를 얼룩지게 만들었다는 논리다. 이런 관점을 취하면 파시즘 대 반(反)파시즘의 전쟁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은 소수 전쟁광들의 몰지각한 책동으로 일어난 ‘거대한 해프닝’이 돼버린다.

이런 시각을 교정해주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나온 둘째 설명이다. 이에 따르면 보수적 역사가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과 달리 파시즘은 서구 역사의 사생아가 아니라 적자이며 필연적인 현상이다.

중세적 질서가 무너지고 근대에 접어들면서 탄생한 유럽의 국민국가들은 자본주의 발전에 필요한 원료와 상품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유럽과 전 세계에서 영토와 해외 식민지를 놓고 치열한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선두였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중세의 본산이었던 탓에 구체제로부터 벗어나는 데 시간이 걸려 그 쟁탈전에서 뒤처졌다.

이들이 제1차 세계대전의 주범이었고 이 전쟁에서 실패한 뒤 파시즘화된 것은 역사적 필연이었다. 그러므로 꼭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아니라 해도 누군가 파시스트는 등장했을 테고 대규모 전쟁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파시즘을 파시스트라는 인물 중심으로 보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의 정치·경제적 위기가 표출된 결과로 보는 관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은 파시즘의 필요조건은 될지언정 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그래서 최근에 나온 제3의 시각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인 빌헬름 라이히는 파시즘에 관한 독창적 심리 분석을 시도한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 사회에 파시즘의 대중 선동이 성립할 수 있는 심리적 조건이 이미 존재했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대중이 파시즘 체제를 원했다는 것이다.

독일과 이탈리아 국민은 스스로 파시즘의 억압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했다. 심리적으로 이것은 병적인 마조히즘에 해당하므로 지배집단만이 아니라 국민 전체가 광기에 사로잡힌 것이다. 라이히의 심리적 파시즘 분석은 마르크스주의의 사회·경제적 파시즘 분석을 훌륭하게 보완한다.

파시즘의 시대가 끝난 지 언제인데 아직도 파시즘을 분석해야 하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라이히의 파시즘 분석은 지금 우리 사회와 관련된 파시즘의 새로운 측면을 시사한다.

가까운 일본이 군국주의 파시즘의 역사를 가진 데 비해 우리는 독재의 역사는 있었어도 파시즘의 역사는 공식적으로 없었다. 하지만 거꾸로 보면 우리 사회는 파시즘의 ‘예방주사’를 맞지 않은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일부 극우 세력을 제외한 일본 국민이 군부가 정부에 앞서 선전포고를 했던 군국주의의 역사를 수치스러워하고, 오늘날 독일 국민이 나치라는 말만 들어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이유는 파시즘의 역사에서 비롯된 ‘원죄’ 의식 때문인데, 우리에게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경험이 없다.

예방주사를 맞지 않은 문제점은 바로 앞에 말한 대동단결의 남용으로 나타난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이 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일 뿐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역대 정권은 늘 대동단결을 외쳤고, 심지어 독재에 반대했던 진보 세력조차 대동단결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런 집단주의적 심성은 한국의 어느 골프 선수 개인이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한국이 세계를 정복했다’는 구호로 둔갑시키고, 시시한 할리우드 영화에서 한국인 슈퍼마켓 주인을 비하한 것을 ‘한국 전체에 대한 모욕’으로 만든다.

역사적으로 퇴행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민족주의라는 용어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도 그런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민족주의가 나쁘다면 조국과 민족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착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독일의 정치가인 요하네스 라우는 재미있는 말을 남겼다. “애국자는 자기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민족주의자는 남의 조국을 경멸하는 사람이다.” 지금 우리의 집단주의적 민족주의는 애국심인지, 미시적 파시즘인지 한 번 따져봐야 할 때다.

남경태 인문학 저술가 및 번역가 dimeol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