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우려되는 것은 갈수록 정도가 심해질 뿐만 아니라 영토분쟁, 통상마찰 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환율전쟁의 발단은 미국의 저금리 정책에서 기인한다.
오바마 정부는 올 8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그때까지 추진했던 소극적 의미의 출구전략을 포기하고 비상대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양적완화정책으로 환원했다. 이는 앞으로 주택담보부증권(MBS) 상환자금으로 국채를 매입해 유동성을 재공급해 나겠다는 것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의도다.
외형상으로는 공개시장 조작대상을 MBS에서 국채로 바꾼 점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국채를 매입하느냐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할 것인가에 따라서는 오바마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신경기부양책의 성패가 엇갈리고 각국 간 통화가치 결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최근 각국 간 통화가치는 금리 차에 의해 좌우되는 정도가 가장 크다. 이 상황에서 국채 매입을 통해 미국의 시장금리가 낮아지면 달러 약세를 촉진시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 8월 FOMC 회의 이후 국제 외환시장에서 모든 통화에 대해 달러 약세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 나라의 통화가치가 경쟁국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경제 여건에 맞는 적정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특정국이 수출 진작을 목적으로 자국의 통화가치를 평가절하할 경우 그 피해가 고스란히 경쟁국에 전가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심을 갖게 하는 것이 중국 외환당국의 태도다. 달러 약세가 진행되는 속에서도 최근 위안화 환율을 보면 8월 FOMC 회의 이전보다 높게 고시하고 있다. 환율이 상대가격비율인 점을 감안하면 달러 약세에서는 위안화가 평가절상돼야 하나 오히려 평가절하로 맞서고 있는 셈이다.
일본도 시장 개입으로 돌변
간 나오토(菅直人) 내각은 출범 초부터 엔저 정책을 표방했으나 정작 한동안은 엔고를 그대로 수용해 왔다. 8월 FOMC 회의 이후 엔화 가치는 달러당 82엔까지 올라가는 초강세 현상을 보였고 일본 경제는 디플레 상황까지 우려됐다.
일부에서는 1995년 4월에 기록했던 79엔대를 깨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나오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됐다.
통화와 재정정책 면에서 경기 부양 수단이 거의 없는 간 나오토 정부는 디플레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엔화 약세를 간절히 희망해 왔다. 그러면서도 막상 시장 개입에는 미온적 입장을 취해왔다. 섣불리 시장 개입에 나섰다간 미국의 수출진흥책과 충돌해 환율마찰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 더 많은 피해를 입게 되는 상황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 나오토 내각은 재신임에 성공한 6년 반 만에 가장 큰 규모로 시장 개입에 나섰다. 그 효과가 시간이 가면서 약화되자 급기야 FRB 방식대로 기준금리를 제로로 낮추고 국채 매입을 통해 돈을 푸는 2차 조치를 단행했다.
이번 엔화 강세는 일본 자체보다 외부 요인에 기인하는 측면이 강하다. 중국이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활용해 일본 국채를 대거 매입하고 있는 것이 엔화 강세를 초래하는 주된 요인이다. 오바마 정부가 경기 부양 차원에서 달러 약세를 유도하고 있는 것도 일본 경제가 엔화 초강세에 시달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해묵은 영해분쟁이 재연되는 등 양국 관계가 민감한 상황 속에서도 일본 정부가 이번 시장 개입 직전까지 자국 국채 매입을 자제해 달라고 중국 정부에 협조를 구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앞으로 국채 매입을 지속해 나갈 경우 일부 중국산 제품의 수입 규제 등 이에 상승하는 강경한 대책으로 맞대응하겠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이 때문에 엔화 초강세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시장 개입과 같은 일본의 자체적인 노력보다 ‘역플라자 합의(The Re verse Plaza Accord)’와 같은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가능할 것으로 외환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1995년 4월 18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 80엔 선이 붕괴되자 국제 금융시장 안정화 차원에서 서방 선진 7개국(G7) 간 달러 가치 부양을 위한 합의가 있은 후 148엔대까지 오르면서 엔고 문제가 시정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런 합의가 힘들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무엇보다 당사국인 일본 경제의 위상이 1995년 당시에 비해 크게 떨어진 상황이다. 그만큼 엔화 초강세로 일본 경제가 최악의 상황인 디플레 국면으로 추락한다 하더라도 세계 경제와 국제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적어 관심권에서 멀어져 있다.
중국이 투자매력도가 적은 일본의 국채를 매입하는 것은 현재 대외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고 있는 팍스 시니카(중국 중심의 세계 경제 질서) 시대를 앞당기기 위한 목적이 강하다. 벌써부터 국채 매입을 계기로 ‘일본 때리기’가 본격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고개를 들고 있어 앞으로 중국의 행보가 예의 주시되는 상황이다.
특히 역플라자 합의의 키를 쥐고 있는 미국도 인위적인 달러 가치 부양을 수용할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1995년 당시에 비해 경기가 부진한 데다 일본과의 무역불균형이 다시 위험 수위에 도달할 만큼 재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시장 개입에 미국이 달러 약세로 맞대응하지는 않겠지만 적극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은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환율전쟁의 우려는 바로 이 대목에 있다. 일본 정부가 엔화 초강세를 저지하기 위해 추가적인 시장 개입과 그 강도를 더 높여나갈 경우 주변국의 상황을 감안하면 환율전쟁이 본격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일본 정부의 시장 개입 조치 이후 유럽과 신흥국들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유럽이 유로화 약세를 유도하기 위해 시장 개입에 나설 경우 환율전쟁은 제2단계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의 위안화 절상불가론
주목해야 할 것은 중국이 지난 4월 미국과의 경제정책 책임자 간 회동 이후 전향적으로 검토해온 위안화 절상문제에 대해 최근 들어 다시 ‘불가론’으로 급선회하고 있는 점이다.
일본의 시장 개입과 미국의 환율제재법이 통과되자마자 ‘위안화 절상불가론’으로 곧바로 환원한 것은 중국의 제조업 환경이 종전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90년대 중반 이후‘세계의 공장’으로 인식돼 온 중국 제조업의 대내외 환경이최근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 특히 노동 공급의 점진적 감소, 노동비용 상승, 노동분쟁 증가 등으로 종전과 같이 양적 투입 확대에 의존한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이 때문에 중국 제조업은 외형적 확대 단계를 지나 경쟁력 강화, 고부가가치화 등 질적인 선진화 단계로 진입하리라 예상되고 있다. 이론적으로 사회주의 성장 경로는 생산요소의 양적 투입을 통한 외연적 성장 단계(extensive growth path)에서 생산요소의 효율성을 따지는 내연적 단계(intensive growth path)로 넘어가야 성장통(痛)을 겪지 않는다.
내연적 단계로 완전히 이행되기 전에 위안화 가치가 절상될 경우 가격경쟁력에 의존하는 외연적 성장단계의 주력산업인 저부가가치 업종의 수출은 결정적인 타격이 예상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위안화 가치가 5% 절상될 경우 저부가가치 산업이 집중돼 있는 동부 연안지역을 중심으로 제조업 성장률이 향후 5년간 총 1.5% 포인트 하락할 것으로 추정했다.
업종별로는 주로 노동집약적 업종이 타격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과거 위안화 절상(2005∼2008)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수출점유율이 오히려 확대된 점을 고려할 때 한계 산업을 제외하고는 기술혁신 등 생산성 향상의 계기가 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종전과 달리 비가공무역 확대와 중간재 국산화 등으로 위안화 절상에 따른 피해가 커질 소지가 많아졌다.
환율전쟁이 본격화되면 원화절상과 함께 환율변동 폭도 확대될 듯
이번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신흥국으로 흐르는 자금흐름에서 종전과 다른 현상은 금리차로 자금이 이동하는 정도가 약하다는 점이다. 대부분 국가들이 유동성 함정에 빠져 금리가 신호기능(price mechanism)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환차익 여부에 따라 자금이 이동하는 정도는 더 강해지는 추세다.
즉, 투자대상국의 환율이 적정수준보다 높으면(저평가) 환차익이 기대돼 ‘외자 유입→주가 상승·환율 하락→추가 외자 유입’ 간의 선순환이, 반대로 낮으면(고평가) 환차손이 우려돼 ‘외자 이탈→주가 하락·환율 상승→추가 외자 이탈’이라는 악순환이 발생된다. 이 때문에 외국인들이 한국 등에 투자할 때 원화의 적정수준을 유난히 많이 따진다.
한 나라 통화가치의 적정수준을 파악하는 방법으로는 환율구조모형, 경상수지균형 모델, 수출채산성 이론 등이 있다. 국내 예측기관들은 원·달러 환율의 적정수준을 1070∼1100원 내외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 원·달러 환율이 1150원 내외에서 움직이는 점을 감안하면 외국인이 국내 증시에 투자할 경우 여전히 환차익이 기대되는 수준이다.
현재 국내 외환시장의 여건상 10억 달러 정도의 외자 초과 공급이 발생하면 원·달러 환율은 10원 정도가 하락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여건을 무시하고 외국인이 단순히 환차익만을 기대해 원·달러 환율이 적정수준에 이르기까지 계속 투자한다면 앞으로도 50억∼80억 달러 내외의 외국 자금이 추가적으로 유입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예상대로 외국인 자금이 들어올 경우 코스피 기준으로 주가는 현 수준에서 최소한 10% 이상 상승하는 것도 가능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금의 시장 여건이 유지된다는 가정 하에서다.
원화절상과 함께 환율전쟁이 불거질 때마다 그 후유증으로 이어지는 ‘잔물결 효과(riffle effect)’로 환율변동성이 커질 가능성도 주목해야 한다. 잔물결 효과란 호수에 큰 돌을 던지면 한차례 큰 파동과 함께 시간이 흐르면서 호수 가장자리까지 이어지는 파동을 말한다.
최근 환율전쟁은 중국과 미국, 일본 등 세계 경제 중심국 간에 벌어지는 만큼 중간자 위치에 낀 우리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미국의 대규모 재정적자가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달러 약세가 더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경우 그동안 진행된 달러 약세로 부담을 느끼고 있는 한국을 비롯한 각국들은 시장 개입에 나서거나 토빈세 등을 도입해 자국통화 방어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당분간은 이른바 ‘중심통화의 카오스(혼돈)’ 시대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 달러 위상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중심통화로 거론되고 있는 유로화와 위안화, IMF의 준비통화인 특별인출권(SDR), 제3의 통화인‘테라(Te rra)’ 등이 달러화를 대체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국내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의 변동 폭이 커질 것으로 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 만큼 기업들이 효과적인 환위험 관리 방안을 마련해 놓지 못하면 어려움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의 환율전쟁은 위기 이후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인 현상이다. 너무 민감하게 대응하거나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번 환율전쟁은 국내 증시에 도움이 되는 측면도 많다.
미국은 양적완화로 달러 약세를 유도하고 있고 다른 국가들의 시장 개입도 불태환 정책(달러 개입분만큼 풀린 돈을 환수 혹은 중화시키는 정책)을 취하지 않는 한 글로벌 유동성이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균형을 유지하는 자세가 중요해지는 때다. 정책적으로 환율의 하락 속도와 변동 폭을 완화시키는 ‘스무딩 오퍼레이션’을 추진하고 ‘인포 데믹’ 혹은 ‘리스크 데믹’ 현상만 경계하면 커다란 충격 없이 지나갈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한상춘 한국경제신문 객원 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sc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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