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 도자기, 사진을 오가는 전방위 작가 이강소 & 김영진

작가 이강소는 회화와 도자기, 설치, 사진 등 다양한 형태의 작업을 해온 중견 화가다. 미니멀리즘과 추상표현주의, 여기에 서예나 문인화의 전통이 담긴 그의 작업은 오랫동안 화단의 관심을 받아왔다.

전업작가인 그는 25년 전 마련한 안성의 작업실에서 대부분의 날을 보낸다. 소 울음소리가 한가롭게 들리던 가을의 어느 날, 오랜 화우인 작가 김영진이 작업실을 찾았다.
현대작가 이강소(왼쪽)와 김영진
현대작가 이강소(왼쪽)와 김영진
이강소 선생의 작업실은 안성의 도심을 벗어난 교외에 자리 잡고 있다. 25년 전 박서보, 이승조, 이두식 등 동료 작가들과 함께 이곳에 터를 잡았는데, 지금은 이강소 선생만이 남았다. 8000여 평 대지에는 서재와 전시실이 있는 본관과 3개의 작업동과 1개의 전시동이 터를 잡았다.

얕은 동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작업실에는 전날 경주에서 올라왔다는 김영진 작가가 함께 있었다. 오랜 화우인 김 작가는 이 선생의 작업실을 자주 찾는다. 먼 길을 달려와 흙 작업 등 힘이 드는 작업은 돕기도 하고, 작품 활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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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에서 만난 화우

이강소(이하 강) :
서로 닮은 점이 많아요.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작업하는 경향도 비슷하고요. 그렇지 않으면 그 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겠어요. 우리가 만난 게 45년 전입니다. 제가 졸업을 하고 대구에서 내려왔을 때 만났으니까요. 그때는 현대미술에서 대구의 파워가 막강했습니다.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작업을 했죠.

김영진(이하 김) : 당시 저는 대구에서 미대를 다니고 있었죠. 물론 그보다 훨씬 전에 선생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열다섯 살 때부터 집을 나와서 미술 아틀리에에서 생활했거든요. 이 선생님이 그 아틀리에 3, 4년 선배세요.

이 : 동네가 좁으니까 중·고교 때 미술을 하는 친구들은 얼굴 정도는 다 알죠. 고등학교 때 재밌는 일이 있었는데, 고2 때 처음으로 그룹전을 했어요. 대구역 앞 공회당 1층을 빌려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곳을 관리하던 부대장을 찾아가서 담판을 지었었죠.

평소에는 조용한 편인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나 몰라요. 그 전시를 계기로 그곳이 화랑으로 바뀌었어요. 3학년 때는 노동회관을 빌려서 전시를 했죠. 참 옛날 얘기네.

김 : 얼마 전에 도록을 만들면서 평론가에게 옛날 얘기를 하는데 참 새롭더군요. 그때는 그림을 그리는 곳이 정해져 있었어요. 역전이나 우체국 앞이 즐겨 찾던 곳인데, 거길 가면 미술 하는 친구들을 모두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이 : 그렇게 보다가 대학을 가고 따로 생활하게 되면서 한동안 소원했죠. 그러나 1970년대 들어 함께 작품을 발표하면서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그때가 한국 현대미술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데, 고민도 많았습니다.

세계 조류에 맞는 한국 현대미술은 어떤 것인가, 어떤 식으로 미술운동을 할까 등등. 1973년에 가진 첫 기획전이 그런 고민의 결과물이었던 셈입니다.

김 : 1974년에 대구에서 최초의 현대미술전을 열었잖아요. 그때 주축이 된 작가가 이 선생님이세요. 이듬해엔 서울에서 현대미술제를 열었고, 1976년에는 부산에 내려가서 미술제를 열었죠.

이 : 그때가 한국 현대미술의 일대 전환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해마다 규모도 커져서 1973년에는 참여 작가가 30여 명이었는데, 이듬해엔 50, 60명이 참여했고 1975년에는 100명이 넘는 현대미술 작가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 미술제의 영향으로 현대미술이 미대로 퍼져나가게 됐죠.

김 : 그 시작이 대구였고, 기초를 잡은 게 이 선생님이십니다.

이 : 어느 개인이 했다기보다는 뜻을 같이 한 화우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고민을 같이한 동료가 없었다면 힘들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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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면 아름다웠던 젊은 날들

김 : 그 시절에는 거의 매일 만났을 겁니다. 매일 술 마시고, 매일 싸웠죠.(웃음)

이 : 정보도 나누고 내가 알지 못한 것을 배우기도 했죠. 당시에는 앵포르멜(informel·추상표현주의 기법)이 유행이었는데, 캔버스 위에 물감을 멋대로 칠하는 거였죠. 그걸 보고 회화가 막바지까지 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고, 앵포르멜 이후의 회화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을 보니까 추상표현주의가 맹위를 떨쳤지만 그 이후에도 팝아트, 옵티컬 아트 등 한해가 다르게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더라고요. 우린 그때 그걸 해석하기도 바빴습니다. 거기에 자기의 정체성을 담은 그림을 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죠.

김 :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도 그 저변에는 개인적인 해석 없이 모방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깔려있었죠. 거기에는 모두가 동의를 했으니까요. 사실 그런 게 쉽지는 않습니다. 작가들이란 사람들이 자기주장도 강하고 고집도 세잖아요. 3~4명이 의견을 모으기 쉽지가 않죠.

이 : 의견을 모으는 데 아마도 술이 큰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웃음) 술이라는 매개가 있었기에 보다 솔직해질 수 있었고, 때론 강요도 가능했고요. 싸우더라도 다음날 술 마시면서 풀었으니까, 화해를 위한 매개도 된 거죠.

김 : 그 시대는 여러 모로 답답하던 시절이니까 그걸 푸는 데도 술이 일조를 했죠. 젊은 작가들이 돈이 있나요, 술을 마셔야 만날 허름한 막걸릿집이었죠. 그때는 현대미술을 판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을 때니까 너도나도 가난했습니다. 집에서 받은 용돈이나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모아 행사를 치렀으니까요.

이 : 지금은 문예진흥기금 등 다양하게 후원을 받을 수 있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우리끼리 쌈짓돈 걷어서 술 마시고 그랬는데, 그래서인지 사이는 참 좋았어요. 최병서, 이향리, 이명리, 김기동 등이 그때 만났던 친구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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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와 배를 그리게 된 계기

김 :
이 선생님은 그때도 좋은 작가셨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참 다양한 작업을 하셨어요.

이 : 지금도 왔다갔다 합니다.(웃음) 대학 졸업하고 한동안 발표는 하지 않고 작업만 했습니다. 작품을 발표한 건 1970년대 들어서예요. 한때는 설치작업을 주로 하다가 평면회화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림을 그렸죠. 1975년 파리에 있을 때 여관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죠.

김 : 이 선생님은 작업 형식도 바뀌었고, 지금까지 그림도 많이 변했습니다. 1980년대에는 흙 작업도 하셨죠.

이 : 전통적인 조각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어떨까 싶어서 시작했습니다. 한때는 비디오 작업도 했었습니다. 한국에서 비디오 작업을 한 건 아마 제가 처음일 겁니다.

김 : 오리는 언제부터 그리신 건가요. 그 전에 선생님을 ‘오리 작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호칭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 별다른 느낌은 없습니다. 헌데 제가 오리만 그린 건 아니거든요. 대학 동기들이 술을 좋아했어요. 그날도 밤새 술을 마시고 다음날 창경원을 갔어요. 거기서 동물들을 봤는데 눈이 참 투명하고 맑았어요. 그때부터 표범이며 사슴 등을 그렸어요.

오리는 1987년 이후에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해 겨울 식구들하고 과천 동물원에 갔어요. 햇살이 비치는 얼음 낀 호수 위로 오리가 펄떡이는데 그 모습이 너무 생생했어요. 그 뒤로 오리를 그리게 됐죠.

김 : 배도 많이 그리시죠.

이 : 예전 삼천포항에 가면 고기잡이배가 많았어요. 그게 참 신선했어요. 뭐랄까 배가 지나가는 모습이, 인생의 묘한 허함을 느끼게 하거든요. 배나 오리는 제겐 기호적인 이미지일 뿐입니다. 제가 사실주의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미지를 많이 그리지도 않고요. 오리며 배를 기호적인 이미지로 활용할 뿐입니다.

김 : 어떤 평론가들은 이 선생님의 그림을 보고 오리는 핑계일 뿐이라고도 합니다. 오리라는 동물을 빌렸을 뿐이지 그 속에 있는 것은 오리가 아니라는 거죠.

35년을 함께 한 오랜 화우가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카메라 렌즈 앞에 섰다.
35년을 함께 한 오랜 화우가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카메라 렌즈 앞에 섰다.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다양한 작업을 한다

이 : 화면이 보이는 게 모두 제 의도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작위도 아니고요. 어느 부분은 예상을 하지만, 가끔은 예상을 전혀 빗나가기도 합니다. 그게 재밌는 거죠. 일부는 의도를 하지만 전체는 예상하지 못하는 거죠. 최근 작품에 ‘허(Emptiness)’라는 제목을 자주 붙이는데, 여기서 ‘허’는 공허라기보다는 모든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주 공간 자체가 허와 상통하는 거니까요.

김 : 이 선생님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작가입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형식을 바꾸시니까요. 개인적으로 선생님의 작품 중에 회화보다는 흙 작업을 더 좋아합니다. 7~8년 전에 경주에서 도자기 작업을 하셨는데, 기존 형식을 깨고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시더라고요. 작가인 제가 봐도 놀랍더라고요.

이 : 작업할 때는 지나치게 의식을 해도 좋은 작품이 안 나옵니다. 아무 생각이 없을 때 작품도 자연스러워요. 작품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손이 떨리고, 그렇게 획을 그으면 마음에 안 드는 그림이 나와요.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촬영을 위해 작업실로 향하던 길, 이 선생은 올해를 안식년으로 정했다고 했다. 여기저기 전시 요구를 들어주다 보니 힘의 낭비가 심해 작품에 몰두할 수 없었단다. 그래서 스스로 올해를 안식년으로 정했다고 했다.

100평 규모의 회화 작업실에 들어서자 많은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몇 점이나 되냐고 묻자 그는 “몹쓸 게 많다”며 허허롭게 웃었다. 이어 그는 한 번 정리를 해야 하는데 게을러서 아직 못했다며 또 한 번 공허한 웃음을 보였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차 한 잔을 건넨 그는 체질적으로 같은 작업의 반복을 싫어한다며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 같다고 했다.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자리를 털고 일어날 즈음 그는 앞으로는 비디오 같은 설치작업을 좀 더 해보고 싶다고 했다. 계속 변화를 꾀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아직 세상을 모르기 때문”이라며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했고, 말끝에 다시 한 번 허허롭게 웃었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