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적 풍경의 작가 도성욱
도성욱 작가는 사진 같은 극사실풍의 숲 그림으로 컬렉터들의 관심을 모아온 인기 작가다. 빛이 스며든 숲을 형상화한 그의 작품은 보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대구, 경북 극사실화의 대를 잇는 젊은 작가 도성욱을 서울 평창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도성욱 작가는 2004년 MBC금강미술대전 대상을 받으며 주목받기 시작한 대구 출신의 젊은 작가다. 2006년부터 경기도 양주시 장흥 아트파크 내 작업실에 입주해 작품 활동을 하던 그가 올 초 평창동으로 작업실을 옮겼다.작업과 학원 강의를 병행했던 젊은 날
작가는 장흥시대를 앞만 보고 달린 시기라고 회고했다. 장흥에 입성하기 전, 그는 한 번도 작업에만 몰두한 적이 없다. 경제적인 상황이 여의치 않아, 대학 다닐 때부터 학원 강의와 작업을 병행해야 했다. 졸업 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낮에는 작업하고 밤에는 학원에서 강의를 했다. 다행히 강사로 실력을 인정받아 월급쟁이 원장을 한 적도 있다. 작업에 대한 갈증이 있었지만, 가장 역할을 등한시할 수는 없었다. 2006년 장흥에 올 때까지 그는 강사로 돈을 좀 모았다. 그걸 아내에게 주고 그는 장흥으로 왔다. 당시 그는 5년 동안은 작업에만 몰두하겠다는 독한 마음을 먹었다.
“돈 1000만 원 갖고 장흥에 들어왔죠. 새벽에 집을 나왔는데, 성공하지 못하면 살아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장흥에 왔는데, 아무도 없는 거예요. 지은 지 얼마 안 된 작업실이라 시멘트 냄새도 심했고요. 그때부터 온종일 작업에만 매달렸습니다.”
다른 면은 몰라도 성실과 집중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였다. 대학 은사들도 그의 성실성에는 탄복을 할 정도였다. 돌이켜보면 대학시절은 멋모르고 열심히 그림만 그리던 시기였다. 작가는 그 시절을 미학이 정립되기 이전 시대라고 평했다. 뭐가 좋은지도 모르고 작업한 시기였다.
한때 그는 다른 화우들처럼 추상화를 그렸다. 그때는 추상화가 대세였다. 그런 그에게 1996년 우연히 접하게 된 일본 작가 아오키의 화집은 충격이었다. 노(老)작가가 그린 지중해의 풍경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화집에 실린 그림을 사진으로 옮겼고, 실제 작업에 응용했는데 그 작품이 팔린 것이다. 그것도 학생 작품으로는 고가에 팔렸다.
“이후에 전시를 했는데, 많은 분들이 찾더라고요. 그때부터 풍경을 그렸습니다. 물론 제 색깔을 입혔죠. 자연 고유의 색깔을 빼고, 제 마음속의 숲을 그린 거죠. 사실 제가 그리는 것은 숲이 아니라 빛입니다.”
그의 작품은 실경을 그린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의 머릿속에 있는 상상 속 풍경이다. 그 풍경이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온 것은 우연이었다. 당시는 작품에 대한 고민이 깊던 시기였다.
어머니와 이끼를 뜯으러 갔다 우연히 만난 숲의 풍경
대구에는 지역의 유지들이 만든 고금미술연구회가 있다. 연구회에서는 매년 작가를 선정해 상을 주는데, 2001년에는 그가 후보로 선정됐다. 그때 심사위원들의 평이 “손재주는 좋은데 생각이 뒷받침이 안 된다”는 거였다. “생각만 뒷받침되면 발전성이 높다”는 평도 뒤따랐다.
심사평을 들은 뒤 그는 속이 너무 상해 그날 술을 엄청 마셨다. 집에 와서도 진정이 안 된 그는 준비한 포트폴리오를 전부 집어던졌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내가 그걸 전부 다리미로 펴놓았더란다.
그리고는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라고 그의 등을 떠밀더란다. 어쩔 수 없이 제출했는데, 덜컥 그 해의 작가로 선정됐다. 덕분에 전시회도 열고, 작품도 팔았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계기로 작품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을 하게 됐다는 점이다.
“그날도 술을 마시고 자고 있는데, 어머니가 아침에 깨우시더군요. 어머니가 화초를 키우셨는데, 화초에 쓸 이끼를 뜯으러 가자고요. 어머니가 이끼를 뜯으시는 동안, 벤치에 누었다 깜빡 잠이 들었어요. 그러다 어머니가 깨워서 일어났는데, 눈부신 햇살과 함께 들어온 그 풍경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거다’ 싶었죠. 그때부터 지금의 그림을 그리게 됐습니다.”
이후 그는 그때의 풍경을 찾으러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여러 각도에서 사진도 찍었지만, 그때의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다 마음속 풍경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렸다. 지금 보면 어색하기도 했지만, 현재 그의 작업의 원형이 됐다.
그렇게 그린 작품을 전시회에 걸었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전시회에 내건 32점 중 30점이 팔렸고, 이듬해에도 반 이상이 팔려나갔다. 그즈음 그는 상경을 꿈꾸게 됐다. 그가 놀기에 대구의 미술 시장은 좁았고 연이 닿아 장흥 아들리에에 입성했다.
그의 작품은 구상이지만 추상적인 느낌도 많이 가미됐다. 장흥에 와서 그는 그걸 좀 더 다듬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 시절의 그는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열심히 그렸다. 인근에서 그의 작업실은 불이 꺼지지 않는 곳으로 유명했다. 인기도 얻었다. 돌아보면 운도 좋았던 것 같다. 그가 이름을 얻던 때는 때마침 미술 시장도 좋아질 때였다. 미국, 유럽 갤러리에서 받은 충격과 새로운 시도
전시 동안뿐 아니라 끝난 후에도 그림을 달라는 사람이 줄을 섰다. 그림을 원하는 컬렉터들 덕에 한때는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작업에만 몰두하기 위해 그즈음 그는 가나아트의 전속 작가가 됐다.
그런 후에도 컬렉터들의 성화는 끊이질 않았다. 급기야 가나아트에서 피신시키다시피 그를 미국으로 보냈다. 2008년 5월의 일이다. 그 후 그는 미국 맨해튼에서 6개월, 프랑스 파리에서 3개월을 보냈다.
“충격도 많이 받고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뉴욕에서는 거의 매일 전시장에 갔는데, 거기 걸린 그림을 보며 ‘아, 그림이란 게 이런 거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거의 매일 지나는 갤러리에 번개 치는 모습의 그림이 걸려 있었어요.
사진인 줄만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그린 거더라고요. 작가의 필력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추상이든 구상이든 작품을 하려면 직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당시 받은 충격으로 그는 한동안 여행을 다녔다. 카프리의 여유로운 풍경을 보며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날을 돌아보았고,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의 500, 600년 된 건물을 보며 오래된 아름다움의 매력에 빠지기도 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한동안 바깥출입을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한 달 내내 밥 대신 술로 끼니를 때웠다. 지금까지 했던 작업을 그만두고 싶었다.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작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동안 방황을 하던 그는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2009년 초, 가족을 데리고 도망치듯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제주도 여행 중 그는 예전 어머니와 이끼를 뜯으러 갔다 본 그 풍경을 다시 만나게 됐다. 아내와 차로 도로를 달리다 숲길에 접어들었을 때, 그 풍경을 다시 만난 것이다. 상상으로만 그리던 풍경의 실제를 본 것이다. 그 길로 곧장 아내는 서울로 올려 보내고, 오피스텔을 얻었다. 8개월가량 그 풍경에 빠져 작업을 했다.
제주도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여유로움과 함께 지금까지의 작업을 정리하는 계기가 됐다. 너무나 포근하고 아름다웠던 오름들과 제주도 깊고 푸른 바닷속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잊을 수가 없다. 그 풍경들 속에서 그는 새로운 작업을 구상했다. 구상이 마무리가 된 지난해 겨울 그는 다시 짐을 꾸려 서울로 돌아왔다.
“지금은 이전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제2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전 작업이 플라톤적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작업을 할 겁니다. 제 아이덴티티는 가져가면서 새로운 것을 그릴 겁니다. 어떤 걸 그릴지는 이미 머릿속에 있어요. 작품 수는 많지 않더라도 그런 그림을 그릴 겁니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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