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페인팅 작가 장승택
장승택은 알루미늄 프레임, 강화유리, 폴리에스테르 필름 등 공업용 재료에 페인팅을 결합시킨 트랜스페인팅(Trans-Painting) 작업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빛과 색을 꾸준히 탐구해온 장 작가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 본다.서울 삼청동의 갤러리에서 만난 작가 장승택의 작품 설명이다. 트랜스페인팅은 그가 2008년 개인전에서 처음으로 소개한 작업이다. 반투명한 강화유리를 활용해, 작품을 구성하는 면들을 자유자재로 옮겨 붙인 트랜스페인팅은 확실히 그의 이전 작업과 구별된다. 붓과 캔버스를 떠난 새로운 방식의 회화, 트랜스페이팅
장 작가는 유리라는 재료를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투명하고(transparent), 방법상에서 단위 작품들을 조합해 회화 형태를 변형(translate)한다는 의미로 트랜스페인팅이라 이름 붙였다. 트랜스페인팅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변화하는’,‘넘어서는’이라는 뜻의 ‘trans-’와 그림을 뜻하는 ‘painting’을 합쳐, 붓과 캔버스를 사용하는 전통적 회화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방식의 회화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장 작가는 두께가 있는 알루미늄 프레임 위에 색칠한 반투명 강화유리를 얹거나, 유리 위에 여러 겹의 폴리에스테르 필름을 얹고 일정 공간을 띄운 후 색을 칠한 포맥스 패널로 뒷면을 막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든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은 크게 색채의 면과 필름으로 인해 공간감이 생긴 면으로 나누어지는데, 미니멀한 형태, 감각적인 색채, 그리고 작품 내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필름의 시각적인 효과가 한데 어우러져 트랜스페인팅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작업으로 발전했다. 이번 전시회에서 장 작가는 기존의 트랜스페인팅에 변화를 준 신작 20여 점을 선보였다.
신작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보다 우회적인 방식으로 미묘한 색채의 효과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원색이나 파스텔 톤 계열의 색을 유리 안쪽이나 바깥쪽에 전면적으로 칠해 하나의 색 면을 만들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반투명 강화유리에 색을 칠하지 않고 강화유리 안쪽 테두리를 따라 채색해 마치 흰 면의 가장자리에서 은은하게 색채 혹은 빛이 번져 나오는 것 같은 효과를 주었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들은 좀 더 입체적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보는 방향이나 거리에 따라, 색채가 주는 좀 더 섬세하고 시각적인 효과를 전달한다.
트랜스페인팅에서 빛은 플렉시글라스나 강화유리 표면에서 반사되거나 두꺼운 프레임의 내부공간을 통과해 색채를 미묘하게 변화시킴으로써, 관람자의 감성적인 움직임을 유도해 내는 역할을 해왔다.
이번에 소개되는 신작 역시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이전 트랜스페인팅보다는 절제된 특성을 더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좀 더 면밀하게 시간을 두고 작품을 보아야 색과 빛, 그리고 작품의 재료가 주는 느낌을 제대로 살릴 수 있었다. 많은 그림과 예술 영화를 볼 수 있었던 프랑스 유학
“빛과 색채는 회화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지만 제 작업에 있어서 그것들은 반투명한 매체들과 함께 절대적 요소가 됩니다. 증식된 투명한 색채와 빛의 순환에 의한 물성의 구체화를 통한 정신의 드러냄이 제 작업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장 작가는 유독 물성에 관심이 많았다. 회화에서 색을 무시할 수는 없다. 색은 굉장히 감각적인 반면, 빛은 정신적인 부분과 맞닿아 있다. 그가 색보다는 빛과 물성에 유독 관심을 보이는 이유다.
빛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프랑스 유학의 영향이 적지 않다. 프랑스 파리 유학시절 영화를 보는 것은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영화는 빛의 예술이다. 그는 극장의 스크린과 캔버스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프랑스 유학은 제 작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무엇보다 좋은 작가와 작품을 많이 볼 수 있었던 기회였으니까요. 오리지널을 본 거죠. 또 하나, 한국적인 작업에 대한 고민도 적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국외로 나가니까 그런 생각이 더 들더군요. ‘너무 한국적인 것에 매몰돼서는 안 된다’는 게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그것보다는 당대성에 더 무게를 싣게 됐죠. 지금 내가 느끼는 걸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한 거죠.”
프랑스 유학 직후에는 이런 영향으로 오일, 왁스, 파라핀, 합성수지 등 독특한 재료로 물질성을 실험했다. 이 같은 작업을 통해 작가는 재료의 물질적 속성을 극대화하면서도 색채, 그리고 색채와 반응하는 빛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왔다.
“예전에는 색을 감각적으로 잘 쓴다는 소리도 곧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색을 덜 쓰게 되더군요. 감각을 죽인다기보다는 초감각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떤 분들은 최근작을 보고 발광다이오드(LED) 느낌이 난다고도 해요. 작품을 할 때는 그걸 몰랐는데, 그런 느낌도 괜찮은 듯해요. 색이 빛으로 재탄생한 건데,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럽습니다.”
민감한 작품이라 AS는 필수 색이 빛으로 승화한 그의 작품을 보노라면 언뜻 작가가 아닌 장인의 손길이 느껴진다. 작가가 작업을 했다기에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듯 너무나 매끈하고 정교하다.
그러나 이 모두가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그는 프레임 제작부터 작품의 완성까지 거의 모든 과정을 혼자 한다. 그래야만 가장 이상적인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작가의 고민과 아이디어들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민감한 작업이라 작품 보완이 필요할 경우도 있어요. 그런 작품은 보완을 해드려요. 제 작품이 상처가 난 채 어딘가에 걸려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아찔해요. 사실 제 작품이라도 정말 마음에 드는 게 있고, 누군가의 손에 있다는 게 창피한 작품도 있거든요.
그래서 가끔 친구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 숨 끊어질 때 작업실 폭파할 거’라고 그래요. 제 삶이 끝나는 순간 제 모든 작업도 접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의 말에서 작가로서의 결벽증을 느낄 수 있었다. 작업에는 이 같은 결벽증이 고스란히 담긴다. 그렇다 보니 그의 작업은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그가 야행성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오전 11시에 하루를 시작하다 보니 작업은 정오부터 밤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아침에 해 뜨는 걸 본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민감한 색 작업은 오히려 밤을 피한다. 그는 오후 4~5시 정도가 색 작업을 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대라고 말한다.
“전업 작가이기 때문에 이런 생활이 가능한 거죠. 예전에는 강의도 나갔지만, 지금은 작업만 합니다. 경제적으로는 좀 어려워도 지금 제 생활에 만족합니다. 정년도 없고 쉼 없이 작업만 하면 되니까요. 대신 나이가 들면 작업을 좀 바꿔야겠죠. 제 작품이 물성이 강해 무게가 많이 나가니까요.(웃음) 좀 더 가벼우면서 정신적인 성숙이 묻어나는 그런 작품을 해야겠죠.”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