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천당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2년 동안 한국 경제의 변화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우리 경제는 이번 금융위기의 진원지가 아니었음에도 주요국 가운데 가장 큰 충격파를 받아 휘청거렸다.

하지만 10년 전 외환위기를 거치며 기초체력이 튼실해진 한국 경제는 위기를 빠르게 헤쳐 나왔으며 이제 위기극복의 모범 사례로 꼽히고 있다.

리먼브러더스가 파산 선고를 받은 것은 2008년 9월 15일. 2007년 11월을 정점으로 완만한 하강 곡선을 그리던 한국 경제는 2008년 10월부터 급격히 무너져 내렸다. 산업 활동의 핵심 지표인 광공업생산은 2008년 9월엔 6.7%의 플러스 증가율(전년 동월 대비)을 기록했지만 10월엔 -1.5%로 고꾸라졌다. 이어 11월엔 -13.6%, 12월엔 -18.4% 등으로 추락했다.
[한국 실물경기] 위기극복 ‘모범생’ 찬사…성급한 샴페인 개봉은 경계해야
그해 11월의 광공업생산 증가율은 관련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한 1970년 이후 최악이었으며 12월엔 그 기록이 다시 경신됐다. 미국에서 이번 위기를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위기”로 지칭했다면 한국에선 “외환위기 때보다 더 나쁜 상황”이란 진단이 나왔다.

외국과 비교하면 한국 경제가 어느 정도의 충격을 받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2008년 4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한국이 -4.5%(전기 대비·전년 동기 대비로는 -3.3%). 위기의 본산인 미국의 경우 -1.7%, 유럽연합(EU)은 -1.9%, 일본은 -2.7% 등이었다.

한국이 이처럼 위기의 영향을 더 크게 받은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외환위기의 트라우마(trauma)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외환위기 때의 아픈 기억으로 인해 위기가 외부에서 터졌지만 기업과 국민이 생산과 소비를 급격히 줄이면서 파장이 더 커지게 됐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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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그러나 2009년 1분기부터 급반전하게 된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1분기 GDP 속보치를 0.1%(전기 대비)로 발표했다(이는 1년 뒤 확정치 발표 때 0.2%로 상향 조정됐다). ‘선진국 클럽’이라 할 수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 회원국 가운데 유일하게 플러스 성장을 기록했다. 같은 시기 미국은 1.2%, EU는 2.5%, 일본은 4.4%로 마이너스 성장이 이어졌다.

비록 0.1%에 그치긴 했지만 플러스 성장을 이뤘다는 사실이 공표되면서 한국 경제는 자신감을 되찾고 회복에 ‘날개’를 날았다. 소비가 살아나고 수출이 늘면서 2분기엔 2.4%, 3분기엔 3.2%(각각 전기 대비)의 성장을 달성했다. 4분기엔 다시 0.2%로 다소 주춤하긴 했지만 4분기 들어선 위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는 진단이 지배적인 상황으로 바뀌었다.

지난해 연간 성장률도 0.2%로 플러스를 달성했다. OECD 회원국 가운데 2009년 플러스 성장을 이룬 국가는 호주, 폴란드, 한국 등 3개국에 불과했다.

올 들어선 우리 경제의 양상을 지칭하는 표현도 바뀌었다. 전기 대비 성장률이 1분기 2.1%, 2분기 1.4%를 기록하면서 ‘회복’이 사라지고 ‘성장’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사실상 경제가 본궤도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올 들어 이 같은 전기 대비 성장률을 전년 동기 대비 성장률로 환산하면 1분기 8.1%, 2분기 7.2%가 된다. 올 2분기 7.1%의 성장률은 OECD 회원국 중 압도적 1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2위인 슬로바키아는 4.9%에 그친다.

한국의 기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올 7월 수출은 431억 달러를 웃돌아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한때 10위권 중반까지 밀렸던 수출 순위는 상반기 7위까지 올라섰다. 올 한해 기준으론 적어도 8위를 차지할 것이란 게 무역협회의 전망이다. 외환보유액도 2008년 말 2000억 달러 붕괴 직전까지 몰렸지만 올 8월 말엔 2854억 달러로 세계 5위에 랭크됐다.

한국이 이처럼 ‘서프라이즈(surprise)’를 만들어 낸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IBRD) 등 국제 경제기구들은 우선 한국 정부와 한국은행의 적극적인 경기부양 노력을 꼽는다.

정부는 지난해 감세 및 공공근로사업 등 경기부양을 위해 50조 원 이상을 투입했다. 지난해 예산 301조 원 가운데 17%에 육박하는 자금이 경기부양 예산이었다. 정부는 중소기업 채무의 100%를 보증해 줬으며 은행이 해외에서 외화를 차입할 때 지급보증을 서 줬다.

한은도 마찬가지다. 2008년 9월 연 5.25%이던 기준금리(정책금리)를 2009년 2월 연 2%까지 낮췄다. 사상 최저 금리다. 자금 경색을 막기 위해 환매조건부채권(RP) 등을 동원, 시중에 17조 원의 자금을 풀었다. 정부와 한은은 달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66억 달러를 방출했다. 이를 위해 미국과 통화스와프까지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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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빠른 속도로 위기를 극복한 데는 환율 효과도 적잖은 도움이 됐다. 원·달러 환율은 리먼 사태 이후 1600원 근처까지 치솟았다. 최근에는 환율이 크게 하락했지만 아직도 1150∼1200원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위기 전 800원대까지 진입했던 것과 비교하면 여전히 20% 이상 높아져 있는 상황이다. 환율이 높다는 것은 원화가치가 낮다는 것으로 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졌다는 의미다. 수출이 잘 되다 보니 생산이 늘고 이는 국내 소비에 활력을 불어넣은 촉매가 됐다.

전문가들은 이와 함께 기업의 경쟁력이 예전보다 높아졌고 은행의 건전성도 향상됐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외환위기 때 200%를 웃돌던 기업의 부채비율은 이제 100% 수준으로 낮아졌고 주요 기업들은 사실상 무차입 경영을 펼치고 있다.

기술 경쟁력도 높아져 정보기술(IT), 자동차, 철강 등에서 1위를 달리고 있거나 1위 수준에 거의 도달했다는 평가다. 은행들 역시 탄탄한 자본력에 낮은 연체율 등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데 한몫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샴페인을 일찍 터트려선 안 된다”며 지나친 자만을 경계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한국 경제가 탄탄대로를 달려왔지만 앞에 놓인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당장 미국 경제가 불안하다.

미국은 올해 성장률이 전기 대비 기준으로 1분기 0.9%에서 2분기 0.4%로 낮아졌다(연율 환산으론 3.7%에서 1.6%로 둔화). 경제가 재차 하강하는 것을 가리키는 더블딥(double dip)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 역시 성장률이 낮아질 전망인 데다 유럽은 재정위기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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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경제 내부에서도 정부의 적극적인 경기부양책이 끝나면서 열기가 조금 식을 가능성이 있다. 환율이 하락하는 추세여서 수출 증가세도 둔화될 조짐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이 같은 점을 반영해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올해 5.9%보다 대폭 낮은 3.8%로 제시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특히 그간 성장을 이끌어 온 반도체와 자동차의 경기가 올 7∼8월에 정점을 찍었을 가능성에 대해 지적했다. LG경제연구소 역시 한국 경제가 빠른 회복세에도 여전히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수준으로 복귀하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민간 연구소들은 이 때문에 신중한 출구전략을 권고하고 있다. 특히 한은이 기준금리를 7월부터 인상하기 시작했고 추가 인상을 시사하고 있지만, 대내외 환경이 여전히 불확실한 만큼 속도와 폭을 조절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박준동 한국경제신문 경제부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