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 & 판화집 컬렉터 김태수 맥향화랑 대표
김태수 맥향화랑 대표는 대구에서 35년째 화랑을 운영하고 있는 화상이다. 동시에 그는 미술, 특히 판화를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컬렉터’이기도 하다. 그는 화랑을 경영하는 한편 자비를 들여 지금까지 30여 개의 판화집과 시판화집을 발간했다. ‘판화와 사랑에 빠졌다’는 김 대표의 이야기를 들으러 대구를 다녀왔다. 장맛비를 뚫고 찾아간 예향, 대구. 대구 시내 한가운데 자리 잡은 맥향화랑에 들어섰을 때, 김 대표는 몇 개의 판화집을 펼쳐놓고 있었다. “한 번 보라”며 내놓은 것은 김춘수 시인의 시에 작가 전혁림의 판화를 곁들인 시판화집이었다. 시판화집은 그가 미술과 문학이 만나면 새로운 장르의 예술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에 발간하기 시작했다.대표적인 것이 <김춘수·전혁림> 판화집이다. <김춘수·전혁림> 판화집은 김춘수 시인이 작고한 직후 그가 기획한 시판화집이다. 우선 문인들에게 시선을 부탁해 40개를 골랐고, 이를 김춘수의 60년 지기인 작가 전혁림에게 선보였다.
작가는 여기서 다시 20개의 시를 추리고, 시에 호응하듯 판화를 새겼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판화집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박람회에 전시되기도 했다.
판화의 매력을 알게 해 준 작가 이자경과 김상구 “보세요. 판화지만 작가의 예술 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주지 않습니까. 판화의 매력은 이런 겁니다. 유화에 비해 가격은 10분의 1도 안 되지만, 가까이서 예술을 즐길 수 있잖아요. 제가 처음 화랑 문을 열며 내건 모토가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미술’이었거든요. 거기에 맞춤한 게 판화인 겁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시선에서 외골수적인 컬렉터의 고집이 언뜻언뜻 엿보였다. 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제가 판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게 1978년 즈음입니다. 서울 인사동에 들렀다 우연한 기회에 ‘세계소형판화전’을 보고 판화 몇 점을 사면서 판화에 눈뜨게 됐습니다. 순수회화를 대중화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게 판화라는 생각에 이른 거죠.”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판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요청이 있으면 10개든, 20개든 찍어주었다. 한정판만 찍은 후 원판을 파기하는 외국의 상황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판화를 시작한 건 그런 안타까움도 한 몫을 했다.
그런 구상을 구체화해준 게 재불 작가 이자경 선생이다. 판화에 눈 뜬 그해 그는 갤러리 공간사랑에서 작가를 만났다. 이 선생의 판화집은 그런 인연으로 만들어졌다. 성공적으로 판화집을 만든 후 작가에게 판화 값을 건넬 수 있었다.
“이 선생한테 판화집 판 돈을 줬더니 곧장 대구 서문시장으로 가더라고요. 한참 후에 삼베를 트럭으로 실어왔어요. 가장 한국적인 삼베로 다음 작품을 계획하고 계셨던 거죠. 얼마나 순수합니까. 화상은 이럴 때 뿌듯함을 느낍니다. 저희가 하는 일이 작가의 자양분이 되니까요.”
이 선생과의 인연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에게 프랑스 파리 미술계의 흐름을 이야기해주기도 하고, 파리 현지의 작가를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현재 그가 소장하고 있는 살바도르 달리의 판화집도 선생을 만나러 파리에 들렀을 때 큰 맘 먹고 컬렉션을 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판화작가 김상구와 많은 작업을 했다. 1987년 나온 <김상구 판화집>은 그해 판화아트페어에 출품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뒤 김상구와 이인화가 함께 한 <김상구·이인화 판화 모음집>은 호암미술관에 전시될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하루 10개 이상씩 판매가 될 정도였다. 이 전시를 계기로 국내에 판화 붐이 일기도 했다.
“김상구 씨 이전에 석란희라는 작가가 있었어요. 목판을 하던 분인데 1982년 그분하고 작업을 하게 됐어요. 그때 석 선생이 좋은 작가라고 소개한 분이 김상구 씨였어요. 소개받고 보니 작품이 너무 좋아 이듬해 김 선생을 포함해 ‘한국 현대 목판화 6인전’을 열었죠. 6명 모두 제가 선정했는데, 그때 가장 어린 작가가 김상구 씨였습니다.” 후줄근한 인상의 이우환, 민중회화 1세대 오윤과의 만남
그밖에도 그는 지금까지 적지 않은 작가와 작업을 해왔다. “돈 안 되는 판화를 왜 하느냐”며 걱정하던 장욱진 선생부터, 이승복 시인의 시에 판화를 해준 작가 장영숙, 6폭 병풍을 석판화로 제작한 송문수 선생, 그리고 이강소 선생과 현대미술을 공부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준 백남준까지.
그중 그에게 미술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이는 작가 이우환이다. 1978년 처음 만난 이우환의 모습은 그가 상상한 모습과 전혀 달랐다.
후줄근한 와이셔츠에 낡은 바지, 작가의 첫인상은 전형적인 면서기였다고 그는 회상한다. 하지만 이우환의 작품은 당시에도 많은 컬렉터들의 사랑을 받았다. 거기에 반해 박서보, 하종현, 이강소 등과 함께 그를 판화전에 초대했다.
“그 뒤로 이우환 선생 작품을 컬렉션하고 책을 사서 공부를 했죠. 2000년 초반에는 대구에 있는 갤러리스트 몇 명과 일본으로 찾아가 뵈었는데, 예전과 많이 달라졌더라고요. 신수가 무척 좋아지셨더군요.
‘좋아보이신다’고 했더니 다른 건 달라진 게 없는데, 마시는 와인을 달라졌다고 하시더군요. 그분이 와인 말고는 특별히 즐기는 게 없어요. 예전에는 일본 와인을 마셨는데, 지금은 수입 와인을 마신다고 좋아하셨어요. 40년 만에 작가다운 대접을 받는다는 생각에 무척 흐뭇하더군요.”
작가 중에는 컬렉션의 가격이 올라 재미를 본 경우도 있다. 민중회화 1세대 작가인 오윤의 경우가 그랬다. 소설가 오영수 선생의 아들이기도 한 작가 오윤을 처음 만난 것은 1980년대 중반이다. 작가가 서울대 조소과를 나와 목판을 주로 할 때였다. 당시는 오윤의 작품이 책의 삽화로 쓰이며 미술계보다 출판계에 이름이 더 알려져 있었다. 당시만 해도 판화를 하는 작가가 많지 않아 눈여겨보다 1986년 서울과 부산, 대구 등 3개 도시에서 동시에 ‘오윤 판화전’을 열기로 했다. 서울과 부산을 경유해 대구에서 피날레를 장식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평소 술을 좋아해 건강이 좋지 않던 오윤이 서울과 부산 전시회를 끝내고 돌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전시회를 이틀 앞두고 찾아온 어이없는 비보였다. 졸지에 전시회가 ‘오윤 판화 유작전’이 돼버렸다. 작고 당시 오윤은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다고 한다. 그는 유족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라고 강매하다시피 작품을 팔고, 일부는 직접 사기도 했다. 그러다 2005년 작가 오윤을 재조명하는 바람이 불었다. 덩달아 작품 가격도 많이 올랐다.
“가격이 오르자 그의 판화가 많이 나왔어요. 그중에는 사후 작품도 많았습니다. 지금은 판화 작품도 넘버링을 하고 제작연도를 표기하지만 예전에는 안 그랬거든요. 심지어 작품 찍고 원판을 그대로 두는 경우도 흔했으니까요.
오윤 선생도 그랬습니다. 원판을 그대로 뒀거든요. 판화 컬렉터라면 이건 알아두셔야 합니다. 판화는 사후 작품은 가격이 떨어집니다. 작가가 찍은 게 아니거든요. 오윤도 생전 작품은 1000만 원이 넘지만 사후에 나온 것은 50만 원도 안 갑니다.” 자면서도 그림 꿈만 꾸는 작가주의 컬렉터
그는 지치지도 않고 컬렉션에 얽힌 이야기를 했다. 그에게 판화의 매력을 묻자 그는 두 가지 이야기를 했다.
첫째, 순수함이다. 판화는 유화나 아크릴 등에 비해 표현에 한계가 있고, 그만큼 어렵다. 목판화도 색 자체를 쓰기 어렵다. 판화 중에 추상화가 많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는 판화를 미니멀리즘의 원조라고 생각한다. 미니멀리즘 자체가 지닌 순수함에 끌리는 것이다. 둘째, 대중성이다. 대중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게 판화다. 피카소의 유화 작품은 하나에 1000만 달러가 넘지만, 판화는 1만 달러면 컬렉션을 할 수 있다. 비교적 싼 값에 작품을 향유할 수 있는 게 판화 작품이다. “저는 컬렉션을 할 때도 작가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꿈을 꿔도 그림 꿈만 꿔요.
새로운 그림을 보면 판화로 만들고 싶어요. 나이가 있어서 그만둬야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자꾸 호기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집사람이 가끔 그래요. 죽기 전에는 못 끝낼 것 같다고요.” 현재 그는 붓 그림으로 유명한 작가 이정웅의 판화전을 준비하고 있다. 1년 전부터 준비를 해왔는데, 이제야 판화를 제대로 찍게 됐다고 들떠 있었다. 그의 아내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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