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어릴 때 품었던 이 유치한 의문을 역사에 대입해보자. 과거에 동양과 서양이 한 판 붙었다면 어디가 이겼을까. 역시 유치한 의문이지만 이 경우에는 적어도 사자와 호랑이의 싸움보다 답이 명확하다.

일단 직접적인 싸움이라면 군사력이 중요한데, 화기가 무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는 15~16세기 이전까지 속된 말로 서양은 동양의 적수도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병력의 차이가 컸다. 고대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군은 4만 명에 불과했고, 서양의 근대를 낳은 17세기의 30년 전쟁에서 종횡무진 활약한 발렌슈타인의 군대는 겨우 5만 명이었다.
일러스트·추덕영
일러스트·추덕영
그에 비해 7세기에 고구려 원정에 나선 중국 수나라의 군대는 150만 명의 병력에 함선 3000척의 어마어마한 규모였으며, 13세기에 수천 km나 떨어진 유럽까지 원정한 몽골 군대도 20만 명에 달했다.

고대와 중세 유럽의 주요 전쟁에서 동원된 병력의 규모는 한반도의 삼국 시대에 세 나라가 다툴 무렵의 병력보다도 적다.

군사력을 뒷받침하는 경제력도 마찬가지다. 우선 경제력의 근간인 인구의 차이가 확연했다. 14~15세기 유럽의 인구는 약 3000만 명이었던 데 비해 동양은 중국의 인구만 해도 그 두 배였다.
봉건 시대 유럽의 장원에서 이포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삼포제가 개발됐을 무렵(토지의 2분의 1을 휴경하다가 3분의 1을 휴경하게 된 정도의 발전이지만 당시 유럽의 수준에서는 중대한 농업혁명이었다), 중국에서는 펌프를 이용해 고지대의 논에 물을 댔고 모내기 농법과 전보다 빨리 익는 신품종 벼가 개발됐다.

그러나 군사와 경제보다 더 중요하고 큰 차이는 문화 부문에 있다. 중국의 4대 발명품이라고 알려진 종이, 인쇄술, 화약, 나침반은 모두 유럽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

확실한 정설은 아직 없으나 이 발명들이 아라비아를 통해 유럽으로 전해졌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제지술과 나침반, 화약은 그랬을 가능성이 높고, 인쇄술은 동양과 서양에서 별개로 발명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침반은 간단한 원리만 알면 쉽게 만들 수 있으므로 금세 전파됐을 것이다. 더구나 나침반은 평화적인 용도를 가지므로 정치적으로 금지하거나 비밀에 부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화약은 다르다.

10세기에 중국에서 처음 발명됐을 때 화약은 불꽃놀이나 폭죽의 용도로 사용됐지만 화약의 위력이 발달하면서 무기로서의 용도를 가지게 되자 점차 정부 차원에서 화약 제조법을 비밀로 규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끝까지 지켜지는 비밀이란 없다. 결국 중국의 화약 제조법은 실크로드를 통해 아라비아로 전해졌다. 중국처럼 중앙 정부의 힘이 강하지 않았던 이곳에서는 화약의 용도를 놀이에 제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14세기 초에 아랍인들은 화약을 활에 재어 발사하는 화살총을 만들었고, 이 기술이 유럽에 전해지면서 곧바로 총포와 대포가 개발됐다.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이 사용한 조총은 바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서 전수받은 신무기였으니, 말하자면 동양에서 개발된 화약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동양의 목줄을 겨누게 된 셈이다.

동양과 서양의 이러한 역전 과정을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종이와 인쇄술이다. 종이가 도입되기 전까지 유럽에서는 양피지를 필기재료로 사용했다. 문제는 양이나 송아지의 가죽을 무두질해 만드는 양피지가 재료도 비싸고 가공 과정도 무척 힘들다는 점이다.

양피지를 만드는 과정은 우리에게 익숙한 북이나 장구를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가죽을 말리고 늘리고 틀에 고정시켜 다듬는 과정을 여러 차례 되풀이해야 겨우 한 장이 만들어진다. 당연히 귀한 물건일 수밖에 없다.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았던 시대, 중세의 수도원에서는 그렇게 값비싼 양피지로 성서와 고전 문헌들을 필사했다. 이렇게 책 한 권을 제작하는 데 큰 비용과 힘든 노력이 투입됐으니 책 자체가 고가의 물건임은 말할 것도 없다.

12~13세기에 북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에서 최초의 대학들이 생겨나는데, 당시의 ‘명문 대학’을 결정한 요소는 학교 시설이나 유명한 교수가 아니라 귀한 책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였다.

그러나 중국의 제지술이 아라비아를 통해 유럽에 전해지자 사정은 달라졌다. 나무나 천을 물에 불리고 끓여 펄프를 만든 뒤 불순물을 걸러내고 잘 말리면 종이가 된다. 나무와 천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이기 때문에 종이는 양피지처럼 값이 비싸지 않은 데다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

그래도 종이만으로는 그렇게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인쇄술이 개발되면서 유럽 세계는 역사적 격변을 맞게 된다.

유럽의 중세 천 년을 기독교의 시대라고 말하지만 사실 당시 인구의 대다수는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도라고 할 수 없다. 기독교의 최고이자 유일한 경전인 성서를, 읽는 것은 고사하고 손으로 만져본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인구의 100%가 기독교도인데 성서를 읽지 못한다?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사실이었다. 중세에 교회가 최고의 권력을 누린 것은 그 때문이다. 성서의 내용을 알지 못하므로 사람들은 교회의 사제들이 읽어주고 해석해주는 것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교회가 성서를 독점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것이 종이와 인쇄술이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고 맨 먼저 인쇄한 책도 바로 당대의 베스트셀러로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성서였다. 그래서 인쇄술이 발명된 직후 50년 동안 유럽 전역에서는 200여 개의 출판사와 인쇄소가 생겨나 너도나도 (신앙심에서가 아니라 장삿속으로) 성서를 발간했다.

수요가 공급을 유발하는 효과는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서를 가질 수 있게 되자 자연히 성서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다. 그래서 유럽 각국에서 라틴어 성서를 자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물론 초기에는 교회나 군주나, 성서를 각국어로 번역하는 것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했지만 이미 대세는 막을 수 없었다. 종교개혁을 촉발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그 뒤 작센에 숨어 지내면서 한 일도 바로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종이와 인쇄술이 엄청난 혁명을 가져온 유럽과 달리, 그보다 훨씬 앞서 종이와 인쇄술을 발명하고 사용했으면서도 동양 세계에 그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뭘까.

동양에서는 역사적으로 책의 관념이 달랐다. 책은 지식을 보급하는 매체가 아니라 지식을 보관하는 용도였다. 불경을 많이 인쇄했으나 그 목적도 ‘팔만대장경’에서 보듯이 불교도들에게 경전을 보급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장경각에 소장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역사서는 일반 민중이 봐서는 안 되는 일종의 금서였다.

고려와 조선은 실록을 비롯한 역사서를 사고(史庫)에 특별히 보관했으며, 17세기 청나라의 강희제는 <사고전서>(四庫全書)라는 방대한 백과사전을 편찬했으면서도 민간에 보급하기는커녕 총 7질을 찍어 지식을 보존하는 용도로만 이용하는 데 그쳤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듯이 아무리 지식이 축적되고 기술이 발달해도 널리 보급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모든 면에서 동양에 뒤졌던 서양이 근대의 문턱에 접어들면서 한순간에 역전을 이룬 요인은 외부에서 도입된 지식과 기술이 정치권력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민간에 널리 확산됐기 때문이다. 결국 동양과 서양의 싸움에서 서양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개방 사회의 힘이었다.


남경태


인문학 저술가 및 번역가 dimeol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