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성공한 사람의 얼굴(winner’s face)’. 작가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아이폰 열풍의 주역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이건희 삼성회장 등의 얼굴을 조형적 테마와 여러 기법으로 표현했다.
시대를 대표하는 성공한 사람들을 주제로 작가는 전통적인 방법의 브론즈로 얼굴 하나하나를 퍼즐처럼 조립하거나, 얼굴을 양각한 수백 개의 동전을 캔버스 삼아 그 위에 초상화를 그렸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동그랗게 타공된 철판 위에 그려진 초상화. 쇠라의 점묘화를 연상시키는 이들 작품은 입체와 평면을 넘나들며 성공한 자의 심성을 다각도로 담아냈다. 성공한 이들의 인생을 담은 작품, Winner’s Face
“개인적으로 돈이나 성공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걸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게 동전입니다. 동전으로 다양한 시도를 한 건 몇 해 됐습니다. 그러다 2009년에야 가닥을 잡았습니다. 처음 시도한 게 오바마 대통령인데요, 저랑 나이도 비슷하고 역경을 뚫고 정상에 오른 과정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
타공 작업은 작업장 칸막이용으로 쓰던 타공판에서 영감을 얻었다. 우연한 기회에 타공판을 통해 건너편 그림을 보게 됐는데, 그림이 얼비치는 게 생각보다 괜찮았다. 거기서 비롯된 타공판 작업은 외국 갤러리스트의 눈에도 들어 올해 마이애미 아트페어에 출품될 예정이다. 재료는 다양하지만 주제는 한결같이 성공한 사람의 얼굴이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이나 스티브 잡스처럼 스토리가 있는 인물이 좋다고 한다. 루이비통과 에르메스를 명품답게 하는 요소 중 우수한 품질과 디자인도 있지만, 그들만의 스토리가 그들을 명품이게 한다.
작가 이철희는 조형물에 회화적 스토리를 가미해, 작품의 가치를 높이고자 한다. 그에게 스토리는 작품의 가치를 격상시키는 장치인 셈이다.
그가 성공한 사람들의 얼굴에 주목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큰 꿈을 꿨고, 그 꿈으로 인해 누구보다 힘든 여정을 걸어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지난 그들의 여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작가는 어쩌면 그들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는지도 모른다. 그 또한 젊은 시절 작가로서의 꿈과 그로 인한 깊은 절망을 겪었기 때문이다.
여느 작가들처럼 그도 학창시절 많은 기대를 모은 패기만만한 작가였다. 그의 작품을 본 사람이면 모두가 그를 칭찬했다. ‘잘 한다’는 말만큼 젊음의 치기를 북돋우는 말도 없다. 그가 그랬다. 하지만 ‘잘 한다’는 말이 재능을 인정하거나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걸 깨닫기까지 그는 오랜 무명의 시절을 견뎌야 했다.
대학 졸업 후 곧장 전업작가로 나서는 바람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더 컸다. 한때는 시골 마을회관 창고를 빌려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는 그 시절을 돈이 없으니까 친구뿐 아니라 부모형제도 멀어지던 시기라고 했다.
그가 하는 입체작업은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 뿐 아니라 돈도 많이 드는 작업이다. 그림을 그리며 간간이 입체작업을 하던 대학 때도 제대로 작업을 하려면 2000만~3000만 원이 들기 일쑤였다. 지금은 1억 원 가까이 돈이 들 때도 있다. 자칫 잘못하면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변두리 창고 생활을 견디고 인정받는 작가로 성장
“지금이야 편하게 얘기할 수 있지만, 정말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때 힘이 됐던 책이 고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이었습니다. 변두리 마을회관 창고에 갇혀 있던 제게, 세상을 향한 빛이 돼준 책이었죠. 그게 계기가 돼 이건희 회장 작품을 하게 된 건지도 모르죠. 외국의 경우, 링컨이나 메릴린 먼로를 다룬 작품이 많잖아요. 한국에도 그런 작품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을 했던 거죠.”
쉼 없이 작업에 매달렸지만 상황은 쉽게 좋아지지 않았다. 어렵게 작업을 하던 그에게 한줄기 빛을 선사한 게 마포대교 기념조형물이었다. 이 작품을 계기로 주목받기 시작한 그는 이후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한국노총 여의도 사옥, 아시아나항공, 담배인삼공사 등의 건물에 자신의 작품을 선보였다. 지금과 같은 작품을 선보이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근래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가수 비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달러 그림 위에 비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걸 보고 비 아버지가 항의를 하기도 했다. “너무 상업적이지 않냐”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의 설명을 듣고는 그 작품을 사갔다고 한다. 그게 인연이 돼 그는 비의 조각품을 주문 제작하기도 했다.
비단 비의 아버지뿐 아니다. 그는 다른 작가들로부터 지나치게 상업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작품 활동에 대한 그의 생각은 확고하다. 그는 자신이 하는 작업이 어떤 면에서는 산업에 문화적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라고 본다. 작가들이 지금보다는 좀 더 비즈니스적인 마인드를 갖춰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런 점은 외국 작가들에게 배울 필요가 있다. 세계적인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도 ‘고객’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렘브란트는 작품의 경향을 컬렉터들이 원하는 방식에 맞췄고, 데미안 허스트는 작품의 가치를 위해 자신의 작품을 사들이기도 했다. 이철희는 작가들의 이런 행동이 결코 ‘상업적’이라는 이름으로 비판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가에 따라서 저를 비판하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비판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치부를 위한 게 아니라 보다 나은 작품을 위해 그런 일도 마다하지 않는 거니까요. 작가가 욕을 안 먹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닐까요.
기존의 방식 그대로 하면 욕먹을 일이 없겠죠. 하지만 작가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자기만의 고집이 있어야죠. 시대를 앞서가는 고민이 필요한 거죠.”
그의 작품은 이처럼 삶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고민에서 비롯된다. 그의 고민은 사실적이어서 희망에 더 가까운 듯하다. 그는 앞으로도 성공한 자의 얼굴과 같은 작품을 통해 희망과 긍정의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 예술로 승화된 성공한 사람들의 마스크를 통해 관람객들로 하여금 ‘나도 이뤄 낼 수 있다’라는 긍정의 힘을 전파하고 싶은 것이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