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사실 화가 고영훈 & 일신방직 김영호 회장

[Friends] 열정을 간직한 작가와 순수한 컬렉터의 만남
김영호 일신방직 회장은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자 상을 받은 문화인이자 이름난 와인 애호가다. 고영훈 작가와는 1970년대 중반 젊은 작가와 컬렉터로 만나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김 회장이 바쁜 일정을 쪼개 고 작가를 응원하기 위해 서울 부암동 작업실을 찾았다.

서울 부암동 작업실을 찾았을 때, 고영훈 작가는 고려청자를 앞에 놓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얼마 후 있을 전시회를 위해 청자를 그리고 있는데, 생각보다 진척이 더디다고 했다. 두세 점 출품하기도 어렵겠다는 말도 했다.

“여기저기 작품을 원하는 곳이 많아서 많은 작품을 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래도 제가 도자기를 하니까 재미는 있습니다. 지금 하는 작품은 아직 제목이 없는데, 나로호를 생각하면서 <비행접시>라고 할까 고민 중입니다. 생긴 게 꼭 비행접시 같지 않습니까.”

작업실 한쪽의 소파로 기자 일행을 이끈 그는, 손수 차를 내오며 하루 종일 여기서 수도승처럼 그림만 그린다고 했다. 그리고는 서가에서 도록을 꺼내 보였다.

도록에서 1974년 작 <코카콜라>를 찾아 내보이며, 김영호 일신방직 회장과 인연이 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그가 비슷한 시기에 작업한 <디스 이즈 어 스톤>(This is a stone)이라는 작품을 설명할 때쯤 김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아한 모습으로 나타난 김 회장은 고 작가의 작업실을 찾는 게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예술가 못지않은 문화적 소양을 가진 김 회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찻잔을 보며, “이거 이우환 씨 작품 아닙니까”라고 말문을 열었다.

김 회장은 이어 “나도 이우환 씨 작품이 몇 개 있는데, 작은 건 에스프레소 잔으로 쓰지요”라고 말했다.

1975년 전시회를 통해 알게 된 인연
젊어서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김 회장은 미국 유학 후 서울대와 홍대에서 열리는 전시회는 꼬박꼬박 챙겼다. 그때 젊은 작가 고영훈을 만났다.
젊어서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김 회장은 미국 유학 후 서울대와 홍대에서 열리는 전시회는 꼬박꼬박 챙겼다. 그때 젊은 작가 고영훈을 만났다.
이어 김 회장은 고 작가의 최근 작업에 대해 관심을 보였고, 고 작가는 그의 질문에 이것저것 대답을 해주었다. 잠시 후 고 작가는 펼쳐놓은 도록을 슬며시 내밀었다. 두 사람에게 인연이 끈이 된 작품 <코카콜라>가 펼쳐져 있었다.

김영호 회장(이하 김): 내가 이걸 산 게 언제였죠?

고영훈 작가(이하 고): 1975년 12월이었습니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신 지 얼마 안됐을 때였습니다. 그때 회장님 직함이….

김: 차장이었어요. 미국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아버님이 부르셔서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됐을 때였어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는데, 초등학교 때는 제가 그린 그림이 교실 뒤편에 자주 걸렸습니다.

중·고등학교 때는 다른 책은 다 정리해도 미술책은 버리지 않고 스크랩을 했었어요. 도록이 흔하지 않을 때라 그걸 오려서 작가별로 분류를 했어요.

고: 제 작품을 산 건 미국에서 돌아오신 지 얼마 안됐을 때죠? 아마 이라는 작품이었을 겁니다. 당시만 해도 대작이었는데, 대학 은사이신 박서보 선생이 ‘무식하게 크다’고 평한 작품이었습니다.

김: 워낙 커서 현관으로는 못 들어가서 유리창을 뜯고 들였던 기억이 납니다. 서울대와 홍대에서 하는 전시회는 꼬박꼬박 챙겼는데, 국전이니 이런 거 상관없이 제가 좋으면 샀어요. 아쉬운 건, 그때 졸업한 작가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작가가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조각 작품을 하나 샀는데, 참 마음에 들었어요. 졸업을 하고 강원도에 미술 선생으로 갔는데, 그 뒤로 한두 번인가 전시회를 하고는 사라져버렸어요.

고: 회장님이 안 계셨다면 작가 고영훈은 없을지도 모르죠. 사실이 그래요. 회장님이 제 그림을 사면서 “제대하고 힘들면 찾아오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랬어요. 제대는 했지만, 제주도 촌놈이 비빌 언덕이 있어야죠. 그때 회장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회사로 찾아갔죠.

김: 그때 작품이 다 괜찮았어요. <코카콜라>, <워커> 이런 그림이었죠?

고: 네. 그때는 먹고 사는 것보다 작업할 공간이 제일 아쉬웠어요. 회장님께 “그림 팔아서 화실 보증금이라도 마련해야겠습니다” 그랬죠. 아마 그때 회장님이 그림을 사주시지 않았다면 고향으로 내려갔을 거고, 지금의 저는 없을지도 모르죠.

김: 지금 우리가 반 고흐에 열광하지만, 동시대인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잖아요. 지금이야 고흐의 작품이 모두 1000만 달러가 넘지만, 생전에 고흐의 작품은 단 한 작품이 팔렸다고 합니다. 화랑을 경영했던 동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고흐는 없을지도 모르죠.

고흐를 생각하면 문화에 대한 후원은 어쩌면, 작가가 살아있을 때 해줘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죽고 나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얼마 전 한남동에 전시와 공연을 위한 공간을 열었는데, 한 가지 조건을 걸었어요.

단 하나라도 현존하는 작가의 작품을 래퍼토리에 넣으라는 거였습니다. 예술가들은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입니다. 일반인들이 그들을 따라가기는 사실 버겁죠. 더 애를 쓰고 노력해야 그들을, 그들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컬렉터를 통해 의미가 확대된다”

고: 작가 입장에서는, 작품이 회장님 같은 컬렉터를 만나면 더 없이 반갑죠. 아무리 자식 같은 작품이라도 대문 밖을 나서면 제 손을 떠나게 됩니다. 대문 밖에서 어떻게 읽히든 그건 제 소관이 아닌 거죠.

작품이란 게 대문 안에서는 작가만의 의식의 산물이지만, 대문 밖을 나서 컬렉터들의 생각이 얹히면서 작품이 확대되거든요. 그런 면에서 추상작품은 아쉬운 점이 있어요. 작가들의 작품 설명이 너무 장황해서, 애호가들이 생각을 닫게 만드는 경향이 있거든요.

김: 제 컬렉션의 대부분이 추상화입니다. 아마 구상작품은 고영훈 선생 작품이 거의 유일할 겁니다. 회사에 전시한 작품들도 대부분 추상화인데, 직원들이 가끔 물어요. 그림이 무얼 의미하냐고요. 그럼 그러죠. 그냥 보라고. 본 대로 느끼고 생각하라고요.
[Friends] 열정을 간직한 작가와 순수한 컬렉터의 만남
고: 맞습니다. 그림은 그래야 합니다. 작품도 살아있는 유기체예요. 생물이 살아가면서 변하듯이, 작품도 세상을 돌아다니며 성장하는 거죠. 어떤 컬렉터를 만나는지는 팔자소관인 거죠. <코카콜라> 같은 작품은 시집을 잘 간 거죠.

어떤 작품은 시골 어느 창고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을 수도 있어요. 다행히 요즘은 그림에 대한 관심들이 높아져서, 그전에 비하면 대접을 제대로 받는다고 할 수 있죠.

김: 기업가들 중에도 미술 컬렉터들이 많이 생겼어요. 안타까운 건 브랜드가 갖는 네임밸류를 너무 따진다는 겁니다. 앤디 워홀, 데미안 허스트 같은 유명 작가들의 작품만 찾는 겁니다. 여자들이 명품 백 한두 개 갖고 다니는 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거죠.

일종의 구색 갖추기로 작품을 대하는데, 그림은 작가 이름은 못 들어봤어도 작품이 좋으면 살 수 있어야 하거든요.

고: 그러기 위해서는 회장님처럼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안목이라는 게 쉽게 생기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와인 애호가이자 패셔니스타인 김영호 회장

김: 그런 면에서 저는 순수합니다. 제가 좋으면 다른 건 생각지 않고 사거든요. 투자라고 생각하고 언젠가는 팔겠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못합니다. 딱히 팔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고: 작품의 가치란 게 애매한 구석이 있어요. 가치란 것은 개인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납니다. 개인의 미적 감각과 작품의 질이 함께 좋아진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죠.

김: 그런 점에서 요즘은 선택의 폭이 넓어졌어요.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외국 작가의 작품을 사기가 까다로웠어요. 1991년부터 수월해졌는데, 저도 그때 뉴욕 소더비를 통해 외국 작가의 작품을 처음 샀어요.

운 좋게 좋은 작품을 싸게 샀어요. 세계 미술 시장은 1989년이 피크였습니다. 1990년 이후 가격이 하락했는데, 제가 작품을 산 1991년이 바닥이었던 거죠. 그때도 아마 추상작품을 샀던 것 같아요.

고: 한국 화단에서도 추상작가들이 많습니다. 작품들도 좋고요. 그래도 회장님, 구상에도 관심을 좀 가져주시죠.

김: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겠죠. 제가 건축을 전공했잖아요. 현대건축의 특징은 기능적인 것을 중시하면서, 단순한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작가를 보더라도 몬드리안의 작품은 정말 좋지 않나요.

고: 좋죠. 세상을 그런 식으로 구획 짓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인데…. 회장님께서 미국에서 공부하시면서 외국 작가들의 그림을 자주 보셔서 그런 심미안이 생긴 듯해요. 그 때문에 제 작품도 사 주셨고요. (웃음)

김: 그걸 여러 사람들과 나눠야 하는데, 요즘은 게을러져서 말이죠. 예전에는 소장품으로 전시회도 열고 그랬는데…. 한남동 전시공간은 재능 있는 젊은 작가들을 위해 쓸 생각이에요. 가끔 후원도 하고요. 상업화랑은 비용 때문에 젊은 작가들에게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요.

그림에 대한 이야기 끝에 작가는 “회장님이 그림 뿐 아니라 와인에도 조예가 있다”고 했다.

김 회장은 20여 년 전 와인 수입업체인 신동와인을 세운 국내 대표적인 와인 애호가다. 와인 이야기가 나오자 고 작가는 갑자기 생각난 듯, 자신의 그림을 레이블에 새긴 와인을 김 회장에게 건넸다. 김 회장도 차에서 명품 와인을 꺼내 고 작가에게 선물했다.

“무통 로트칠드가 유명 작가의 작품을 레이블에 새기는 걸로 유명하잖아요. 2007년 무통 로트칠드 레이블 아티스트가 베르나르 브네인데, 몇 해 전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보르도 시장에게 저를 ‘자신의 첫 번째 한국 컬렉터’라고 소개하더군요.”

김 회장의 말에 작가는 10여 년 전 보르도에 초청작가로 갈 뻔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주거니 받거니 이어지던 이야기는 저녁 무렵에야 끝이 났다. 사진촬영 중에도 김 회장은 작품을 보며 “이거 오일(유화)이에요”라며 관심을 보였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