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트렌드를 뒤집는 역발상(易發想) 인터뷰에 응하는 연기자 송일국이야말로 ‘역발상’ 그 자체다. 톱스타라는 견장을 떼고 나니 ‘인간’ 송일국이 보인다. 허할 때 소주 한 병 나누고 싶은 남자, 그의 이야기다.
연기의 ‘내공’ 쌓기에 돌입하다
드라마는 종영에 즈음했으나, 카메라 앞에 선 송일국은 아직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신불사)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아버지의 명예를 찾기 위한 복수심에 ‘광기(狂氣)’마저 서린 ‘강타’의 눈빛, 그 서슬 푸른 여운이 남아있었다. “지난 일 년을 꼬박 <신불사> 준비에 쏟았는데 1, 2회를 보고 나니 너무 부끄러웠어요.
제 드라마 보면서 한 번도 제 자신이 싫어서 채널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은 없었는데, 이번엔 돌리고 싶었죠. 역할을 통해 ‘인간’이 나와야 하는데 인간은 없고 (외모만 보이는) 모델이 하나 서 있더라고요.”‘강한 남자’ 강타로 분하려는 욕심이 과했던 것이리라. 과유불급을 피할 수 있는 연기의 ‘내공’, 그것은 아직도 어렵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은 도전이 주는 짜릿한 쾌감에 슬그머니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또한 그가 설 무대가 태생적인 배경에서 비롯된 뜨거운 가슴 울림으로 진동할 것을 확신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그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 ‘사내’답게 살고 싶다
<해신>, <주몽> 등 출연하는 역사 드라마들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연기자 송일국에게는 ‘영웅’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오버랩됐다. 김좌진 장군을 증조부(曾祖父)로, ‘그 시절’ 서울 종로의 히어로 김두한을 조부(祖父)로 둔 그에게 시대와 역사는 언제나 숙제를 안겨줬다. “아직 답은 못 찾았지만 사내답게 사는 법에 대한 고민을 오래도록 했어요.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내는 과연 무엇일까. “증가하는 이혼율과 그로 인한 가정 파괴가 우리 사회의 큰 문제잖아요.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으로 남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장군의 손자’가 사내로 꾸는 꿈을 너무 소박하다 탓하지 말자.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으로 살기에 이 시대는 너무 팍팍하다.
옛말을 빌리자면 남자는 태어나 공식적으로 울 수 있는 기회가 딱 세 번밖에 없다. 그런데 ‘마초’라 여겼던 이 남자는,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울기를 벌써 여러 번이다.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에서 매년 세 차례 대학생들과 함께 중국으로 ‘청산리 역사 대장정’을 떠나요. 처음엔 어머니의 외압 때문에 (웃음) 갔지만 몇 해 전 ‘태극기 사건’ 이후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대원들을 이끌고 백두산에 올라갔다가 울컥하는 마음에 태극기를 흔들며‘대~한민국’도 외치고 애국가를 목이 터져라 불렀더니 공안이 나중에 태극기를 압수하러 숙소까지 찾아왔더라고요. 거부했다가 괜히 나라 간 문제로 불거질까 봐 고이 싸서 내줬는데, 막상 주고 났더니 분해서 잠이 안 오는 겁니다.
”뼛속까지 저려오는 그날의 울분은, 어쩌면 세포 저 속에 잠자고 있던 ‘그 무엇’이었을지도 모른다. 비단 잃어버린 고구려의 땅에서 겪은 ‘주몽’ 송일국의 분노만은 아니었으리라.
망각(忘却)은 신의 ‘축복’이다
한때는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했다. 항일 열사로 외증조부가 남긴 흔적의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유를 묻고 싶었다. 김좌진 장군의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에 부족한 재원을 충당 하느라 강남 60평대 아파트에 살던 식구는 강북 어디메 전세로, 또 월세 아파트로 옮겨 다녀야 했다.
“저도 무명이던 때였는데 월세를 못내 당장 쫓겨날 지경에 이르렀죠. 그런데 쫓겨나기 직전에 신기하게도 <애정의 조건>이란 주말 드라마에 캐스팅이 되면서 얼굴이 조금씩 알려졌고, 이어 <해신>을 찍게 됐는데, 그 작품에서 시쳇말로 ‘대박’이 났죠.
그래서 망각이야말로 ‘신의 축복’이라 여긴다. 나쁜 기억일수록 더욱 빨리 지울 수 있는 ‘신의 축복’을 받은 그이지만, 연기자로 사는 한 죽을 때까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하나 있다.
10년이 넘도록 아들의 연기에 대해 딱 두 번에 그칠 만큼 칭찬에 인색한 연기자 선배로서 어머니가 해주었던 충고다. “‘현장에서 너보다 못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너는 망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마라톤도 모자라 트라이애슬론을 여섯 번이나 완주한 ‘철인’의 삶의 자세와도 일맥상통하는 말 아닌가. 멀리 보되 성급하지 않게, 여유를 가지되 목표는 뚜렷하게.
Photographer 김유철(피에스타)
Stylist 김하늘(start) Hair & Make up 김환
Cooperation Ermenegildo Zegna (Black Tuxedo·02-2016-5325)
Piaget (Watch·02-516-9856), Davidoff(Cigar·02-2230-3760)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