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Bill Gross

[창간 5주년 특별인터뷰] 신흥국 채권·주식형 펀드에 ‘돈 묻어라’
빌 그로스(Bill Gross·66)는 자타가 공인하는 ‘채권 투자의 전설’이다. 세계 최대 채권 펀드 핌코의 최고투자책임자(CIO)인 그로스는 지난 2001년 미국 경제주간지 포천으로부터 ‘채권 왕’이란 영예로운 호칭을 얻었고, 미 펀드평가사 모닝스타가 선정하는 ‘올해의 채권 매니저 상’을 1998년과 2000년, 2007년 세 번이나 수상했다.

미 재무부 관리들은 정책결정 과정에서 그의 조언을 듣기 위해 수시로 전화를 하고, 워런 버핏 벅셔 해서웨이 회장이나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도 그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채권 왕에 등극하기까지 빌 그로스가 밟아 온 인생 이력은 상당히 독특하다. 그로스는 듀크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해군에 입대하기 전에 라스베이거스에서 하루 17시간씩, 꼬박 5개월 동안 블랙잭 게임에 빠졌다.

하지만 종자돈의 2% 이상을 베팅하지 않는다는 분산투자 원칙을 고수해 단돈 200달러를 1만 달러로 불리면서 천재 도박사로 명성을 날렸다. 끼는 도박판마다 돈을 전부 쓸어가 다른 손님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도박장에서 그의 접근을 막았을 정도였다.
[창간 5주년 특별인터뷰] 신흥국 채권·주식형 펀드에 ‘돈 묻어라’
그로스는 도박판에서 번 돈을 학비 삼아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UCLA)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한 뒤 1970년 생명보험사 퍼시픽뮤추얼에 입사하면서 채권 시장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이후 모하메드 엘 에리언(현 핌코 최고경영자) 등 동료들과 함께 1971년 핌코(PIMCO)를 창업했다. 당시 조그만 부티크 형식으로 시작했던 핌코는 설립 후 39년이 지난 2010년 3월 말 기준 자산 규모가 1조700억 달러까지 불어났다.

채권펀드계의 살아 있는 신화

그로스가 30년 넘게 세계 채권 시장의 제왕으로 군림한 가장 큰 비결은 바로 유연성이다. 대다수 채권매니저들이 미국 국내 채권에만 투자를 할 때 그는 이머징마켓 채권이나 비(非)달러화 표시 채권 투자를 늘려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했다.

그는 또 투자자들에게 시장 위험을 가감 없이 신속히 알려주는 채권매니저로도 유명하다. 그로스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인 2005년 관련 투자를 회수해 투자자들의 자산을 지켜준 가장 성공적인 채권 투자 운용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로스를 대표하는 채권 펀드는 바로 1987년 처음 선보인 ‘핌코 토털리턴 펀드’다. 채권을 통한 자본 차익뿐 아니라 외환 거래에 따른 환율 차익까지 올린다 해서 ‘토털리턴(total return)’이란 이름을 붙였다. 처음에는 펀드 가입자의 최소 투자 규모를 50만 달러로 제한해 사실상 기관투자가들의 자금만을 받았지만, 1998년에 최소 투자 규모를 2500달러로 낮춰 개인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이 펀드는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더욱 유명세를 탔다. 지난 2008년 9월 7일 헨리 폴슨(Henry Paulson) 당시 미 재무장관이 패니매와 프레디맥 등 양대 모기지업체의 국유화를 발표했을 때, 토털리턴 펀드는 그날 하루에만 17억 달러의 수익을 냈다.

두 모기지 회사의 채권을 미리 대량으로 사두었기 때문이다. 2000년만 해도 자산이 약 320억 달러에 머물렀던 토털리턴 펀드는 지난해 12월 말 기준으로 10년 만에 총 2025억 달러로 불어났으며, 설정 후 연평균 수익률은 7.7%를 기록했다. 5월 들어선 수익률이 11%대까지 오른 상태다.

그로스가 거둔 높은 수익률만큼이나 그의 특이한 개인적 캐릭터도 늘 관심의 대상이다. 그는 투자자들이 맡긴 자산을 불려주기 위해 모든 열정을 쏟는다.

지독한 일벌레로 이름 높은 그는 매일 새벽 4시 30분이면 일어나 블룸버그 단말기를 켜고 미국과 유럽, 일본 등 글로벌 경제 동향을 점검한 뒤 6시면 출근한다. 참모들과 회의할 때 블라인드로 햇빛을 완전히 가리도록 하고 블랙베리와 휴대전화를 모두 꺼 회의에 집중하도록 한다.

또 미 경제전문 방송인 CNBC에 고정 출연하고 매달 한 차례씩 경제칼럼을 핌코 웹사이트에 올려 자신의 생각을 알리고 있다. 아울러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박을 하면서 투자 전략을 구상하는가 하면, 물구나무서기를 하면서 사업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TV에 출연하거나 고객을 만날 때는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는 대신 목에 둘러 스카프처럼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걸출한 채권 투자자가 올해 추천하는 투자 대상은 무엇일까. 그로스는 최근 투자자들에게 신흥국 채권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조언하고 있다. 그는 지난 3월 말 블룸버그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신흥국들은 견고한 성장세를 유지하며 채권국으로 올라서고 있지만, 선진국은 성장 둔화가 이어지며 점차 채무국으로 전락해 가고 있다”고 말했다.

또 “신용등급이 낮거나 인플레이션 악화 위험이 있는 국가들을 주목해야 한다”며 “독일과 캐나다의 상황은 좋은 반면 그리스를 비롯한 유로존(유로화 사용 16개국), 영국 등은 거의 바닥을 헤매고 있다”고 지적했다.

주식투자용 뮤추얼펀드 첫 설립
[창간 5주년 특별인터뷰] 신흥국 채권·주식형 펀드에 ‘돈 묻어라’
실제 그로스는 토털리턴 펀드의 미 국채 비중을 지난 2월 35%에서 3월에 33%로 2%포인트 낮췄다. 또 미국을 제외한 선진국 채권 보유 비중도 18%로 작년 10월 이후 처음으로 감소세를 보였다. 이에 반해 신흥시장 채권은 5%에서 6%로 1%포인트 늘렸다.

또 지난달 말부터는 채권보다 주식을 더 선호한다는 다소 채권 투자자답지 않은 의견도 나타내 눈길을 끌고 있다. 그로스는 지난 3월 CNBC와 가진 인터뷰에서 “경제 상황이 좋고 고위험 자산이 상당한 수익을 가져다준다면 채권보다는 주식시장을 더 지지할 것”이라며 “현재 경기 회복세를 만끽하고 있는 세계 증시는 계속 앞으로 전진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그로스의 이 같은 뜻을 반영하듯 핌코는 지난 4월 주식 투자 중심의 뮤추얼펀드를 회사 설립 이후 처음으로 출시했다.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면서 채권형보다 주식형 펀드의 인기가 훨씬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포트폴리오 전략 변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나왔다. ‘핌코 EqS 패스파인더 펀드’란 이름의 주식형 펀드는 신흥시장과 일부 유럽 기업을 주 투자 대상으로 삼고, 장기적인 가치 투자 방식을 중시할 방침이다.

그로스는 최근 세계 시장을 강타하고 있는 유럽 재정 위기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그는 지난 5일 핌코 홈페이지에 올린 ‘5월 전망 보고서’에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와 무디스, 피치 등 3대 신용평가사를 향해 “신용평가사들은 최근 수년간 아무런 지적 능력도, 상식도 보여주지 못했다. 신용평가를 무시하라”며 독설을 날렸다.

그는 “신용평가사들은 마치 흡혈귀처럼 모든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살아남을 것”이라며 “신용평가사들이 수수료 수입을 따내기 위해 최고 등급(AAA)을 남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외모가 훌륭하다고 해서 그 가치가 정말로 높은 것은 아니다.

‘미스터 무디스’와 ‘미스터 푸어스’가 메이크업과 하이힐, 문신을 통해 혹하게 만든 것일 뿐”이라며 수수료 수익을 위해 부실위험 채권에 최고 등급을 부여해 줬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신용평가사들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어 “채권의 신용도 변화를 예측하는 것은 핌코 같은 투자 회사가 더 빠르다”고 주장했다.

이미아 한국경제신문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