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 2대 임동욱·임세웅 원장 부자
임세웅 더와이즈치과병원 원장은 지난해까지 아버지 임동욱 원장이 운영하는 안암위드치과 병원에서 함께 근무했다. 4년을 함께 일하다 2009년 7월 더 큰 꿈을 위해 더와이즈치과병원을 차려 독립했다. 공간은 다르지만 서로에게 자극제가 되며 같은 길을 걷는 치과의사 부자의 이야기를 들어봤다.“아들이 치대를 가겠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반대했어요. 치과의사가 사회적으로는 어느 정도 인정을 받지만 개인적으로는 피곤하고 힘든 직업입니다. 지금은 사정이 좀 달라졌지만 저희 때만해도 일요일이며 휴가도 없이 일을 했거든요.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병원이란 곳이 창살 없는 감옥 같기도 했습니다. 자식은 다른 길을 걷길 원했죠.”
다른 길을 걷길 원했던 아들은 그러나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들에게도 할 말은 있다. 어려서부터 환자를 돌보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아들은 자연스레 커서 아버지처럼 되겠다고 결심했다. 존경하던 아버지도 그의 고집은 꺾지 못했다.
치대를 다닐 때는 고민도 없지 않았다. ‘이 길이 내 길이 맞나’하고 자문할 때도 있었다. 특히 손재주가 필요한 실습시간이면 그런 생각을 자주했다. 그러나 외과 분야로 전공을 선택한 이후에는 더 이상의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치과의사가 되길 잘 했다고 생각하는 지금은 ‘천직이란 게 이런 거구나’하는 생각도 든다.
고지식한 아버지와 진취적인 아들의 불안한 동거 “박사 과정을 마치고 2005년에 아버지 병원에 합류를 했는데, 그전까지 안암치과였어요. 제가 오면서 ‘아버지와 함께, 환자와 함께’라는 의미로 안암위드치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아버지가 저를 못 미더워하셨어요. 트러블도 적지 않았죠.”
병원 운영함에 부자가 기준이 달랐다. 아버지는 ‘정’을 중시했고, 아들은 ‘원칙’을 내세웠다. 서로의 기준을 받아들이고 조율하는 데 1년여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 기간 아들은 아버지가 왜 ‘정’을 중시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경우에 따라 환자에게 더 나은 치료를 유도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하질 않았다. 그 곁을 지키던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야 그런 과정을 통해 아버지가 환자들과 신뢰는 쌓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환자를 치료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신뢰다. 애정을 갖고 환자를 대하면서 신뢰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밖에도 아들은 아버지에게 환자를 대하는 법과 태도, 환자와 지속적인 신뢰를 쌓는 법 등을 배웠다.
“제가 좀 구식이긴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사가 진료만 잘 하면 되지 광고하고 TV 나오는 걸 이해하지 못했으니까요. 제가 개원하던 때만 해도 의사 한 명에 간호사 1~2명이 전부인 치과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정보가 부족해 입소문에만 의지해 병원을 찾았고, 의료보험이 없어 환자들이 치과 문 열고 ‘이 하나 뽑는 데 얼맙니까’하던 때였습니다.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되죠. 그러나 아들이 보기에는 제가 좀 답답했을 겁니다.”
변한 건 그뿐이 아니다. 예전에는 입시철과 김장철이면 손님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반면 여름, 겨울이면 방학을 맞은 학생들이 치과를 찾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학연수와 여행 등으로 방학이면 오히려 환자가 줄어든다.
치료도 달라서 7, 80년대에는 충치 등 전통적인 치료 환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교정이나 임플란트 환자가 매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소득 수준이 지금에 못 미치던 7, 80년대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아버지를 보며 환자와 신뢰 쌓는 법 배운 아들
말수가 적고 선비 같은 임동욱 원장은, 옛날 아버지답게 칭찬에 인색했다. 칭찬은 인색하고 야단만 치던 아버지 밑에서 아들은 자신의 역량을 한껏 보여주었다. 아들과 함께 운영하면서 치과가 5배 이상 성장한 게 그 증거다.
치과 규모가 커지면서 아버지도 예전 방식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치과 규모가 커지고 전문화되면서 예전같이 가족처럼 환자를 치료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임동욱 원장은 아들이 치과를 현대적으로 운영하면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며 뒤늦은 자랑을 늘어놓았다.
아버지도 이제는 아들이 치과의사가 되길 잘 했다고 생각한다. 임세웅 원장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임플란트 분야에서는 이름을 얻었다. 아버지 임동욱 원장은 그런 아들이 자랑스럽다.
아버지 병원에서 많은 환자를 보게 된 것도 임세웅 원장으로서는 행운이었다. 임플란트는 학문적인 연구뿐 아니라 임상 경험이 중요하다. 임세웅 원장은 아버지가 닦아놓은 오랜 터전에서 많은 환자를 보며 임플란트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옷을 만들어도 어떤 옷감을 쓰고 어떻게 재단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제품이 나오잖아요. 임플란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임플란트도 만드는 곳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고, 시술에 따라서도 차이가 납니다.” 임플란트에 관한 한 국내에서 손꼽히는 임세웅 원장은 주말이면 치과의사를 대상으로 강의를 한다. 임세웅 원장은 강의를 준비하며 공부를 더하게 됐다고 했다. 곁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던 임동욱 원장은 자신도 아들의 강의를 몇 번인가 들었는데, 이제 이론적으로는 아들을 따라갈 수 없다며 흐뭇해했다.
“제가 강의할 때 아버지를 몇 번 초청했습니다. 처음 제 강의를 들으시고는 ‘네 강의 재미없어서 못 듣겠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많이 늘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강의를 시작한 임세웅 원장은 국내 임플란트가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말했다. 얼마 전 홍콩에서 있었던 강의에도 현지 치과의사들로 강의실이 꽉 찼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는 최근 임플란트가 지나치게 상업화되는 것을 경계했다.
지나친 상업화는 가격을 기준으로 시술을 결정하는 병폐를 낳고 있다. 시술을 잘 하는 곳보다 싼 곳을 선호하는 현상을 빚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임플란트는 평생을 두고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전문성을 갖춘 의사에게 맡기라고 충고한다.
인터뷰가 마무리될 즈음 간호사가 임세웅 원장을 찾았다. 그는 예약된 수술이 있다고 말했다. 수술실로 내려가는 아들은 바라보며 임동욱 원장이 한 마디를 보탰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의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게 환자와의 신뢰입니다. 특별히 가르치진 않았지만 옆에서 제가 하는 걸 보고 아들이 그런 걸 배운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스스로 성공했다고 자부합니다.”
글 신규섭·사진 서범세 기자 wawoo@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