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주방장 출신 조리명장(調理明匠) 문문술

“DJ의 까다로운 입맛 덕에 팔도 한식 통달했죠”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을 가리켜 ‘식구(食口)’라 한다. 정성스레 음식을 준비하는 자와 그가 준비한 밥상을 받는 사람 사이엔 끈끈한 정이 생기게 마련. 그래서 음식에 사랑이 담겼다 하고, 식구 사이에 의리가 생기는 것이다.

지난해 8월, 국민의 오랜 ‘선생’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가슴이 유난히도 먹먹해졌던 한 사람이 있다. 영부인을 대신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하루 세 끼 밥상을 차렸던 요리사, 대한민국 조리명장 문문술 씨가 바로 그다.

문문술 씨는 노동부가 지정한 대한민국에 6명밖에 되지 않는 ‘조리명장’ 가운데 한 명으로, 지난 2008년 한식부문에서는 두 번째로 탄생한 명장(明匠)이다. 철이 들 무렵부터 주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요리를 배우기 시작해 어느새 요리인생 38년을 자랑하는 그야말로 요리 한 길을 걸어 온 인물이다.

지인을 통해 우연히 문 명장의 이야기(당시로서는 빙산의 일각이었다)를 전해들은 후부터 이상하게도 관심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청와대’라는 보통 사람들이 수이 넘나들 수 없는 ‘성(城)’과 관련된 이야기보따리를 안고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었으리라.

그렇게 두 달여의 시간이 흐른 뒤(이 자리를 빌어 하루가 멀다 하고 필자의 전화를 받아야 했던 지인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문 명장이 조리팀장으로 있는 서울 마포의 한 한식당에서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맛이 있으면 ‘문군~’, 맛이 없으면 ‘문 국장!’”
“DJ의 까다로운 입맛 덕에 팔도 한식 통달했죠”
1998년. 당시 서울 롯데호텔에서 19년을 넘게 쌓은 경력으로 잘나가던 연회과장 시절, 청와대에서 ‘콜’이 왔다. 기다렸다는 듯 수락했을 법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월급도 받던 것보다 훨씬 적었고 (웃음) 하우스 쿡이 사실상 힘들어요. 주부들 생각해 보세요. 아침부터 하루 세 끼 국거리 걱정이 끊이질 않잖습니까. 처음에 수행비서들이 들어오라고 했을 땐 고사를 했는데, 이휘호 여사께서 오라고 하시니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뒤 일산 자택에서 손님 치를 때 여사께서 부르시곤 했거든요. 돈을 주시면 그날 모시는 손님에 따라 제가 알아서 장을 봐다가 음식 준비를 했었죠.”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롯데호텔 재직 당시(국민회의 대표 시절) 조찬기도회 음식을 마련하면서부터다. 호텔에서 열리는 조찬이나 오찬 모임에는 보통 양식이 제공된다. 그런데 김 전 대통령은 설렁탕을 요청했다. 호텔 입장에서는 단가가 낮은 설렁탕 메뉴 요청이 반가울 리 없다. 하지만 연회과장의 직권(?)으로 손수 설렁탕을 끓였다.

“저희 고향(전남 신안)에서는 김대중 선생님하면 영웅에 가까웠습니다. 평생 그렇게 존경하던 ‘나으~’ 고향 선생님께서 설렁탕을 드시고 싶다는 데 뭐든 못 해 드리겠어요. 600명분을 한꺼번에 끓였죠. (웃음)”

구수하기 그지없는 ‘호텔급’ 설렁탕에 김 전 대통령은 만족했고, 문 씨의 손맛은 이어 당시 일산에 거주하던 이휘호 여사까지도 큰 손님이 있는 날엔 SOS를 칠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그런 특별한 인연은 급기야 대통령 요리사로서의 행보를 부추겼다. 문 씨는 민간인으로서는 최초로 ‘운영관’이란 직책으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운영관은 대통령의 식사는 물론 국빈행사 등 청와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사에 제공할 음식을 관할하는 총책임자다. 민간인이 졸지에 ‘3급 공무원’으로 나라 녹을 먹게 된 셈. 청와대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관사생활이 시작됐다.

“취임 초기에 경상도에서 어떤 분이 축하한다고 햅쌀을 보내왔는데, 그걸 덥석 받았다가 대통령께 호되게 꾸중을 듣고 바로 돌려보낸 적도 있어요. 아주 깐깐하셨죠. 제 아래로 요리사 4명을 포함해 주방 식구가 총 12명 정도 됐지만, 국빈 만찬이라도 있을라치면 200~300인분의 식사는 물론 음료까지 책임을 져야 했으니 작은 일은 아니었지요.

조찬부터 저녁 파티까지 신경을 써야 했었으니까요. 김 대통령께서 취임했을 때 국빈은 왜 그리도 많던지요. (웃음) 사람들은 대통령이 궁중음식만 먹고 살 줄 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보통 사람들 밥상과 비슷하게 밥과 국을 기본으로 메인 요리 하나에 반찬 대여섯 가지가 전부예요. 보통 일주일 식단을 미리 짜서 일요일 오후에 영부인께 보고를 드렸어요. 그러면 여사께서 훑어보시고 뺐으면 하는 것, 추가했으면 하는 메뉴들을 귀띔해 주셨죠.”

문 명장이 기억하는 김 전 대통령은 미식가이면서 재료의 신선도까지 정확하게 알아내는 절대미각의 소유자. 특히 홍어에 대해서는 전문가 수준으로, 조금만 좋지 않으면 “오늘 홍어는 별로다”라고 짚고 넘어갔다고 한다.

힘들었던 야당 시절 즐겼던 설렁탕, 순두부찌개 등은 갑자기 변경되는 ‘특별메뉴’에 자주 등장했던 단골 음식들. 민어매운탕과 설렁탕 역시 빼놓을 수 없는 DJ의 ‘고향의 맛’이었다. 반면 이휘호 여사는 외국 생활의 경험 때문인지 가끔은 양식을 원하기도 했다고.

“대통령도 사람이니 신경을 많이 쓰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입맛이 떨어지죠. 정치가 잘 풀리면 해 올리는 음식에 맛있다고 칭찬도 잘해 주시지만 정치가 잘 안되고 심경이 안 좋으시면 최선을 다해 올린 음식이라도 야단을 듣기도 했죠.

너무 힘들어서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었다니까요. (웃음) 보통 기분이 좋고 음식이 마음에 드시면 ‘문군, 오늘 음식 참 맛있네’ 그러셨는데 맛이 없다 싶으면 일단 호칭부터 바뀌었죠. ‘문국장!’ 하고 부르실 땐 벌써 짜증이 약간 섞여 있거든요. (웃음)”
“DJ의 까다로운 입맛 덕에 팔도 한식 통달했죠”
DJ가 미식가였다면, 노 전 대통령은 ‘소탈형’

5년 3개월 동안의 청와대 생활. 청와대 운영관으로 겪었던 돌발 상황과 에피소드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특히, 국빈을 초대하는 청와대 만찬에서 사실상 운영관은 ‘보이지 않는’ 외교관에 진배없다. 국빈이 방한해 처음으로 대하는 음식, 특히 우리 전통 음식에 대한 첫인상이 좋아야 이후 대통령의 외교도 술술 풀릴 것 아닌가.

“2000년으로 기억하는데, 남북정상회담이 있을 때였어요. 청와대 요리사 두 명을 포함해 코스마다 특급 호텔 일류 요리사들이 차출돼 북한으로 갔죠. 남측 주최 만찬을 위해 서울에서부터 냉동차에 식자재를 싣고 가서 북한 요리사들과 협업을 했어요.

식사를 마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측 음식은 맛은 있는데, 개성식이야’라며 웃더라고요. ‘개성식’이란 말은 양이 적다는 뜻이죠. 더 먹고 싶을 만큼 맛이 있다는 최고의 찬사로 기억됩니다. 그분이 원래 대식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미국 전 대통령인 클린턴과 부시도 저희가 준비한 음식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죠.”

청와대 요리사의 실력에 당시의 정상회담도 술술 풀렸음은 물론이다. 결과가 좋으면 요리사로서 최고의 찬사에 행복하기도 했지만, 정상회담과 같은 민감한 사안이 오가는 국가 행사는 사실 운영관에게는 ‘두통’이기도 하다.

보통 2~3시간 동안 진행되는 오찬이나 만찬에 서브되는 음식 어느 하나라도 귀한 손님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이룰 때도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중간 중간 대통령의 해외순방 시 발생하는 ‘돌발 상황’에 진땀을 흘릴 때도 많았다.

“대통령께서 워낙 한식을 좋아하셔서 해외순방 때 함께 동행할 때가 있었어요. 어느날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냉면을 찾으시는 겁니다. 냉면 육수라는 것이 뚝딱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난감했죠.

어떻게든 만들어 드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일단 기내에 있던 스테이크를 삶았어요. 스테이크 삶은 물에 동치미 국물을 섞어 육수를 만들었더니 기대보다는 괜찮은 육수가 완성되더군요. 기대하지도 않았던 냉면 상을 받은 대통령께서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아요.”

주방식구 12명을 이끌고 쉴 틈 없이 5년을 달리고 나니 청와대 관저는 ‘새주인’을 맞을 준비를 했다. DJ의 뒤를 이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취임을 했고, 자연스레 청와대 요리사도 떠날 채비를 해야 했다. ‘노무현 정부’의 새로운 주방장에게 인수인계를 하는 3개월 동안 ‘구관’인 문 명장도 새 대통령의 밥상을 차렸다. 공교롭게도 모셨던 대통령들이 모두 세상과 이별하고 난 뒤라 그는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씁쓸하다.

“부부가 왜 닮는지 아세요. 아내가 남편 밥상을 차리면서 입맛이 닮아가기 때문이에요. 5년간 밥상을 차려드렸던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을 땐 뭔가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하더군요. 건강한편은 아니었지만 의지가 워낙에 강한 분이라 더 오래 사실 줄 알았거든요.

김 전 대통령께선 연세도 있으시고, 워낙에 미식가여서 조금은 어려운 대통령이었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말이지 소탈한 분이었어요. 올리는 음식은 무엇이든 토를 달지 않고 맛있게 드시기도 했지만, 지나다 불쑥 ‘오늘 뭐 맛있는 거 하나요? ’ 하고 주방에 들어와 보기도 하셨죠. 서민 대통령의 이미지 그대로였어요.”

임금님·대통령 밥상을 보통 사람들에게
“DJ의 까다로운 입맛 덕에 팔도 한식 통달했죠”
문 명장은 전남 신안에서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상경했다.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어른들의 이야기 하나만 믿고 명동의 경양식집 주방에서 접시를 닦으며 ‘서울사람’이 되려 했으나, 배운 게 너무 없었다.

“그땐 의사가 꿈이었죠. 식당 주방에서 잡일을 하다 운 좋게 경희대 구내식당 일자리를 얻게 됐어요. 그때부터 야간고등학교를 다녔죠. 그러다 롯데호텔로 옮겼는데 그 당시 경희대에서 처음으로 호텔조리학과 야간 과정을 시작했어요.”

‘배운 게 도둑질’이란 말은 이럴 때 하라고 있는 말이리라. 칼과 도마 다룬 경력이 길어지고 요리사 모자 높이가 점점 높아지면서 의사의 꿈은 자연스럽게 접었다. 롯데호텔 입사 후 무려 19년 7개월 동안 우직하게 한 길을 걸었다.

잘나가는 주방장이면 누구나 탐을 낸다는 호텔 연회과장 타이틀까지 달았다. 롯데호텔에서 DJ를 만났고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그는 5년 3개월의 ‘청와대살이’ 후 미련 없이 다시 호텔 주방장으로 돌아갔다.

인천 메이필드호텔 총주방장을 거쳐 지난해부터는 경기도 양주 소재 서정대 호텔조리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입맛 까다로운 대통령을 모신 덕분에 전국 팔도의 요리에 통달하게 됐고, 이태 전엔 조리명장의 칭호까지 얻었으니 이제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 또한 사명으로 여기고 있다.

그는 최근 조리명장, 교수에 이어 자연 그대로의 슬로푸드를 지향하는 한식당 ‘청류동 수라’의 총주방이란 직함을 하나 더 달았다. 최고의 식재료와 전통 한식조리법을 고수하는 ‘청와대 대통령 밥상’을 이제 보통 사람들을 위해 차려낼 작정이다.

“천연 감미료와 발효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한식이야말로 진정한 슬로푸드죠. 소금으로 직접 간을 하기보단 발효시킨 젓갈로 한 차례 걸러 간을 하고, 물은 항아리에 담아 3~4일 지나 맑게 걸러 씁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전통이에요. 자연 그대로의 토종 식자재로 임금님의 보양식인 흑염소와 오리 요리까지 전통방식 그대로 재현해 볼 생각입니다.”

장시간의 인터뷰와 사진 촬영에 고맙다며 그는 서둘러 콩국수를 말아 내왔다. 삼삼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혀를 감아 돌며 출출한 배가 채워지자마자 내달엔 도곡동 타워팰리스에도 들르라 한다. 옛 임금들의 수라상에서 대통령 밥상까지 이어지려면 식사 한 끼로 시간이 충분할 리 없다. 내달엔 ‘청류동 부뚜막’에 들러 시원한 막걸리에 흑염소 무침을 청해 볼 작정이다.

문문술
1953년 전남 신안 출생
경희대 호텔조리학과
1978~1998년 롯데호텔 근무
1998년 3월 민간인 출신 최초 청와대
‘운영관’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 식사 및
국내외빈 만찬 음식 담당
2003년 메이필드호텔 총주방장
2008년 노동부 지정 ‘대한민국 조리명장’
2009년~현재 서정대 호텔조리과 교수


글 장헌주·사진 서범세 기자 c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