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전도사’ 김은해 박사
이번 달 컬렉터 섭외를 두고 고심 중이던 때, 편집부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연세대와 고려대에서 체코어와 체코 문학을 강의하고 있다는 김은해 박사였다. 세계 최고의 맛과 품질을 자랑한다는 체코 맥주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는 그에게 대뜸 “체코 물건을 수집하고 있진 않냐”고 물었다. 예감은 적중했다.국내 체코 전문가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그가 내놓는 너무나 ‘체코적인’ 식기와 영롱한 크리스털 잔에 마음은 벌써 프라하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포털사이트에 ‘체코’를 검색어로 넣고 자료를 뽑은들 이렇게 많은 콘텐츠를 얻을 수 있을까. 국내 최초의 체코 유학 국비장학생으로 체코 제일의 국립대인 카렐대(Univerzita Karlova)에서 유학한 뒤 자연스레 ‘체코 전문가’가 돼 버린 김은해 박사. 프라하 골목골목의 맥줏집 이야기에서부터 체코 가정식까지 그가 쏟아내는 체코 이야기는 생생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빠듯한 유학시절, 용돈 아껴 모은 도자기
2010년은 한-체코 수교 20주년이 되는 해다. 현재 연세대와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강사와 통·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은해 박사에게 양국의 수교 20주년은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한국외대 4학년 때 운 좋게도 한국 주재 체코 무역대표부 상무부 창립 멤버로 들어가게 됐어요. 당시 체코어 회화도 배울 겸 상무부 외교관 부인과 가깝게 지냈는데 저를 눈여겨봤는지 추천을 해주셨죠. 대사관 근무가 익숙해지니까 공부가 더 하고 싶더라고요. 1년간 국비유학생 시험 준비를 했죠.”
4학년 때 대사관에 취직을 했으니 ‘고속도로’를 탄 셈이지만 김 박사는 오히려 속도를 더 냈다. 체코 수교를 맞아 당시 문교부가 지원하는 장학금의 첫 수혜자가 된 그는 가방을 싸서 1993년 프라하로 떠났다. 체코의 ‘서울대’라 불리는 명문 국립대인 카렐대에서 보헤미아학을 공부했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를 취득한 뒤 박사 학위는 일반 언어학으로 땄다.
“보헤미아학과에서는 체코 문학과 보헤미아 문화 전반에 관한 것을 공부해요. 당시만 해도 체코 사람들은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도 잘 모를 때였어요.
제가 입학하기 직전에 북한 학생 몇 명이 있었지만, 그즈음 동구권 공산국가들이 줄줄이 무너지면서 본국으로 소환됐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졸업할 때까지 제가 유일한 한국 사람이었죠.” 박사 학위까지 마치고 귀국한 지 10여 년이지만 아직도 ‘프라하’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도시다. ‘건축사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중세 유럽의 건물이 고스란히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는 도시는 이국적이다 못해 몽환적일 정도라고. 넉넉하지 못한 유학생 신분으로 골목골목을 거닐며 마신 맥주는 상상만으로도 청량감을 안겨준단다.
“유학생이 다 그렇지만 가난하잖아요. 학교와 기숙사만 열심히 오갔는데 그래도 학교 바로 앞에 있던 맥줏집은 꽤 자주 갔어요. 체코가 세계 맥주 소비량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아세요? 맥주를 ‘흐르는 빵’이라고 할 만큼 물처럼 마시는 나라예요.
덕분에 저도 주량이 500cc 두 잔까지 늘었죠. 프라하 거리에서 제 발목을 자주 잡았던 것 가운데 하나가 전통 도자기를 파는 가게들이었어요. 너무 예뻐서 갖고 싶다고 쳐다만 보다가 간간히 번역해서 돈을 벌면 하나둘씩 사 모으기 시작했죠.”
김 박사가 MONEY를 위해 특별히 소개하는 아이템은 체코 여느 가정집의 필수품이라는 전통 도자기 식기와 크리스털 잔, 그리고 헌책방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가까스로 구한 100년 이상 된 고서(古書)들이다.
우리나라 백자처럼 하얀 바탕에 푸른색 도료로 식물 문양을 새긴 체코 전통 도자기는 실제 김 박사 자신도 요리할 때 애용하는 아이템. 동글동글한 식물 문양 때문에 체코에서는 ‘치불락(양파그릇)’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살짝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유난히 영롱한 크리스털 잔 역시 체코 가정집에서는 손님접대용으로 마련하는 필수품이라고. 300년이 넘은 유리세공 역사를 자랑하는 크리스털 제품은 세계 최고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체코의 대표 특산품이다.
보헤미아의 자유와 낭만에 매료 “항상 그립죠. 제 청춘의 대부분을 보낸 곳이니까요. 보헤미아 문화의 핵심은 낭만과 자유예요.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체코 사람들의 문화적 자긍심은 프랑스인 못지않게 대단해요. 특히 음악적인 정서가 상당히 풍부한 민족입니다. 체코 속담에 ‘체코인이라면 누구나 음악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그들은 음악으로 세계를 정복한 문화민족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죠.”
매주, 매일 열리는 콘서트, 오페라 공연이 너무 많아 무엇을 볼지 행복한 고민에 빠져야 했던 시간이었다. 드보르작을 탄생시킨 나라 체코는 음악뿐 아니라 문학과 미술·건축 분야에서도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 작가 알퐁스 무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예술가들. 오스트리아의 미술가 에곤 실레 역시 모계로부터 ‘체코의 피’를 받은 사람이다.
체코의 예술에 대한 얘기로 대화에 한창 열기가 오를 무렵, 목도 축일 겸 김 박사가 애초에 꺼내고 싶었던 화두인 체코 맥주 얘기를 꺼냈다. 과연 기다렸다는 듯 장황한 설명이 시작됐다. “체코에서는 맥주 값이나 물 값이나 차이가 별로 없어요. (웃음) 한 집 건너 한 집이 맥줏집인데 남자들에게는 사교의 장이 되기도 하죠.
맥주를 체코어로 ‘피보(pivo)’라고 하는데 일반 가정집 어딜 가도 피보를 담는 항아리인 ‘주반’을 볼 수 있어요. 어릴 적 주전자 들고 어른들 심부름으로 막걸리 받으러 가곤 했잖아요. 체코에서는 아이들이 근처 맥줏집에 주반을 들고 술을 받으러 가죠.”
‘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 ‘감브리누스’, ‘라데가스트’, ‘부드바르’ 등이 체코의 베스트셀러 맥주들로, ‘부드바르’는 버드와이저의 체코식 표기다. 체코인들이 가장 즐기는 것은 단연 생맥주, 다음이 병맥주다. 캔맥주는 여행길이 아니고선 선택하지 않는 비인기 아이템이란다. 우리가 소주와 다른 술을 섞어 새로운 형태의 술을 만들어 먹듯, 체코 사람들은 흑맥주와 보통 생맥주를 섞어 ‘반반주’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올해가 한-체코 수교 20주년인데 그간 민간 통·번역사로 양국 간의 굵직굵직한 수교의 현장에 참여한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체코어를 하고 보헤미아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민간 외교관의 역할이랄까요. 한국에 더욱 적극적으로 체코 문화를 소개하며 양국 간 문화와 학문적 교류 증진에 노력할 생각입니다.”
5월 중순부터 6월 초까지 프라하는 세계 음악축제인 ‘프라하의 봄’으로 도시가 온통 축제 분위기라고 한다. 체코의 ‘양파 그릇’을 감상하다 보니 그곳 음식이 먹고 싶어졌다.
“서울에 체코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 세 군데 정도 밖에 되지 않아요. 본토만큼은 못하지만 노력한 흔적이 보이더라고요. (웃음) 제가 즐겨먹는 음식은 돼지고기를 매콤하게 버무린 ‘굴라수’인데, 우리나라의 두루치기보다는 덜 매워요. 굴라수에 흑맥주 한 잔 곁들이면 정말 환상이죠.”
글 장헌주·사진 이승재 기자 chj@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