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증권가만 있는 뉴욕이라면 얼마나 황량할까. 그런데 이 컬렉션들은 록펠러를 비롯해 뉴욕에서 돈을 모은 많은 부호에 의해 컬렉션 되고 기증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 역사를 안고 있다. 정부가 만든 것도 아니고 오직 개인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진 컬렉션들이 뉴욕을 빛내고 있는 것이다.
파리에는 오르세, 기메, 루브르 등의 박물관이 그 명성을 빛내고 있듯 런던에서는 대영박물관, 대영미술관 등이 그 도시의 이름을 가치 있게 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컬렉션은 특정인의 고급 취미로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어서 유러피언 대부분은 컬렉터로서의 삶을 영위한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그 이유는 온통 어딜 가도 오래된 것들이 산재해 있으니 자연스럽게 접근하기가 용이하고 많은 아이템별로 소사이어티와 클럽들이 존재한다.
심지어 우유병을 수집하는 클럽에서부터 연필, 타이프라이터, 재봉틀, 식탁에서 이용하는 스푼이나 포크, 오일 램프, 자동차, 라디오 등으로 폭이 넓다. 명품을 구입하는 대신 그들은 수십 년 된 빈티지 의상을 즐겨 입거나 헌 것들을 즐겨 사용한다. 그리고 사용하다가 가져가면 돈이 되는 경제 시스템이 이러한 컬렉션을 용이하게 하는 측면도 있다.
아름다운 중세 채색사본으로 꼽는 ‘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기도서’는 오말 공작이 망명객의 신분으로 어려움에 처했음에도 기도서가 경매에 올려진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서 구매해 오늘날 프랑스를 대표하는 유산으로 남게 됐다. 그 결과 온갖 책과 그림 등으로 황홀한 콩데미술관은 샹티이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가진 자의 의무론
아트 컬렉터인 페기 구겐하임은 “우리에겐 우리가 가진 위대한 보물을 대중에게 보여줄 의무가 있다” 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신념을 향한 집념의 끝은 위대했다.
천재가 10년 단위로 나올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20세기는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많은 천재를 선사했고 그 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좋은 밭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따금 놀려두어야 하지 않는가.
요즘 예술가들은 열심히 노력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독창적이지 않다. 지금으로선 20세기가 배출해낸 이들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피카소, 마티스, 몬드리안, 칸딘스키, 클레, 레게, 브라크, 에른스트, 미로, 브랑쿠시, 아르프, 자코메티, 립시츠, 콜더, 페프스너, 무어, 그리고 폴록에 말이다. 지금은 창작의 시대가 아니라 수집의 시대다. 우리가 가진 위대한 보물을 보존해 대중에게 보여줄 의무가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컬렉터로서의 인생
가수이자 배우인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매해 연말이면 화려한 파티를 여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파티에는 미국의 저명인사들이 초대를 받지만 기준이 엄격해 우아하게 1년을 살아낸 깨끗한 사람들만 초대받을 수 있다.
지저분한 스캔들의 주인공은 거절이다. 빌 클린턴은 지퍼 게이트로 명단에서 탈락했다. 그런데 그 파티는 아주 특별한 것, 즉 티파니 램프로 밝히는 황홀한 조명으로 더욱 빛난다.
참석자들을 매료시키고도 남는 아름다운 티파니 램프의 세계를 만끽함으로써 다시 1년을 기다리게 하는 힘을 가진 티파니 글라스 컬렉터인 그녀는 이로써 미국 사회의 특별한 아이콘이 됐다. 물론 한 점의 램프로써도 아름답다. 그러나 컬렉션으로 분출하는 파워는 또 다른 감동을 뿜어낸다.
랄프 로렌은 여성용 고급 정장을 론칭했다. 론칭 당시만 해도 스포츠 캐주얼의 이미지를 털어내고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자아냈다. 그러나 그는 성공했다. 그는 어떻게 고급스러운 느낌을 창조해내고 있을까.
랠프 로런은 지구상에 오직 세 대만 존재한다는 1938년형 부가티 ‘애틀랜틱 57SC(Atlantic 57SC)’를 2009년 이탈리아 ‘콩코르소 델레간차 빌라 데스테’를 통해 처음 공개했다.
약 100억 원에 해당하는 이 차 외에도 그는 수십 대의 클래식 카를 컬렉션하고 있으며 2005년에는 보스턴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에서 ‘Speed, Style, Beauty’라는 콘셉트의 전시회를 가졌다.
‘Speed, Style, Beauty’는 패션디자이너 랄프 로렌이 손수 모아왔던 자동차들을 대중들에게 공개한 전시회다. 순수예술 박물관 전시관에서 한 컬렉터의 자동차를 전시한 것은 이것이 ‘미술품(fine art)’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어느 패션지는 ‘랄프 로렌 빈티지 경주용 차에서 영감을 얻다’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빈티지 자동차의 힘과 정교함에 최고의 소재를 결합시킴으로써 시간을 초월한 모던함과 역동적이고도 도회적인 세련미가 느껴진다. 깔끔하고 정교하게 재단된 시크한 스웨터의 팔꿈치에 덧댄 케이프는 클래식 카의 인테리어를 연상시킨다.… 보디라인의 매끄럽게 밀착됐다가 밑단으로 갈수록 살짝 퍼지는 스커트와 허리라인은 자동차의 건축적이고 복잡한 구조를 연상시킨다.… 끈이 없는 울 소재의 블랙 칵테일 드레스는 또 어떤가. 엔진과 나사까지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곳까지 정교하게 조각한 부가티에서 그 느낌이 발견된다.”
한국을 대표하는 명품 회사는 역시 삼성이다. 삼성이 최고의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데는 호암의 컬렉션이 큰 몫을 하고 있다. 호암미술관의 품격 높은 컬렉션은 그 가문의 영광이자 한국의 영광이기도 하며 이것은 곧 삼성의 고품질 이미지를 창조하는 샘이기도 하다.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의 국보와 보물 총 86점을 비롯해 중요 미술품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주로 도자나 공예 분야를 중심으로 1991년 현재 고미술 1만5000여 점과 현대미술 3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이다. 먼 미래를 볼 때 삼성의 주식 가치보다 호암미술관이 훨씬 높은 날이 올지도 모른다.
또 한 분, 위대한 선각자인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1906 ~1962)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가산을 털어 일제강점기에 문화재를 구입해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부설 미술관을 설립했다.
전형필은 1929년부터 우리나라 전적, 서화, 도자기, 불상 등의 미술품 및 국학 자료를 수집해 1936년 지금의 미술관 건물인 보화각(保華閣)을 지어 보관해왔다. 겸재의 진경산수 같은 위대한 보물을 우리나라가 소장할 수 있게 해 준 그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컬렉션은 그 자체로서도 아름다운 투자이며 본인의 정신건강뿐 아니라 창조적인 휴식과 영감의 원천으로서 오랫동안 남아있다.
18세기, 앤티크 컬렉터들 유럽에서 폼페이 발굴 소식을 접하게 된 귀족들은 고전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다. 계몽 운동과 백과전서 정신이 꽃핀 시대였다.
당시 영국에서는 귀족의 자녀들이 수년간 여행 학교를 다녀와야만 행세를 할 수 있었는데 이들은 파리와 로마, 베네치아를 여행하며 그림과 앤티크를 들고 돌아왔다. 이러한 당시의 분위기로 이 해 유럽의 양대 박물관이 개관했다.
시대의 유행은 결국 개인들의 미의식에도 큰 영향을 끼쳐 개인이나 가정이 하나의 작은 뮤지엄이 되는 경향을 낳고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 앤티크로 집을 장식하거나 컬렉션 마니아들의 진정한 효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후 경매 회사인 소더비, 크리스티 등이 설립되고 앤티크 시장이 형성되면서 본격적인 앤티크의 대중화 시대를 열게 된다.
파노라마 같은 격동의 세월들을 살아남은 앤티크 컬렉션은 정신과 지적(知的) 역량이 역사라는 강을 따라 형성되는 긴 여정임이 분명해 보인다.
김재규
헤리티지 소사이어티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 아카데미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기행>, <유럽도자기> 저자. 영국 엡버시 스쿨, 옥스퍼드 튜토리얼 서비스 칼리지 오브 런던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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