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가치의 경제적 의미가 나온다. 경제적으로 가치란 물건이 가진 속성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물건의 쓰임새, 즉 용도다. 빵은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를 가지고 옷은 입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를 가진다. 물건은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판매될 수 있으며, 그 가치가 크면 클수록 더 높은 가격에 팔리거나 더 많은 양이 팔린다. 이것이 상식이다.
옛날에는 그 상식만으로 가치가 충분히 설명될 수 있었다. 그런데 화폐경제가 발달하고 자본주의가 도입되자 가치의 또 다른 측면이 생겨났다.
그전에는 물건을 만들면 그 물건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 썼다. 농부가 필요한 농기구를 만들어 쓰듯이 대체로 생산자가 자신이 만든 물건을 소비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시장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제도이므로 생산자도 물건을 생산할 때 그 물건의 구체적인 소비자를 염두에 두는 게 아니라 추상적인 시장을 겨냥한다.
쉽게 말해 목수 김씨가 의자를 만든 목적은 김씨 자신이나 의자를 필요로 하는 이웃집 장씨를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서다. 이렇게 만들어진 의자는 과거와 같은 물건이 아니라 상품(commodity)이 된다.
물론 상품도 쓰임새를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기존의 물건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상품의 가치는 예전처럼 단순히 쓰임새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물건과 달리 상품은 당장 누군가에 의해 사용되는 것보다 시장에서의 판매를 목적으로 해 쓰임새와 더불어 다른 물건(예컨대 화폐)과의 교환 비율이 중요해진다. 상품의 용도는 고정돼 있어도 교환 비율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의자의 용도는 언제나 ‘사람이 앉는 물건’이라는 데 있지만, 많은 목수가 의자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판다면 의자의 교환 비율은 하락할 수밖에 없다. 즉 예전에는 의자 하나를 만들면 쌀 한 말과 바꿀 수 있었지만 이제는 보리 한 말도 안 되는 식이다.
그래서 상품의 가치는 또 다른 측면을 가지게 된다. 쓰임새에 바탕을 둔 원래의 가치는 사용가치가 되고, 시장에서 교환되는 비율을 나타내는 가치는 자본주의 시대에 생겨난 교환가치가 된다.
상품이 본래 지닌 사용가치와 자본주의 메커니즘이 만들어낸 교환가치, 이것으로 상품의 가치는 완전히 설명되는 듯하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 들어 얼마 전까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또 하나의 가치가 생겼다.
그것은 이른바 기호가치다. 아직 가치의 명부에 등재되지도 못할 정도로 연혁이 짧은 가치인데, 이 기호가치가 얼마나 젊은지는 이것을 둘러싼 세대 간의 견해 차이로 알 수 있다. 즉 구세대는 그것을 가치로 인정하지 않는 반면 신세대는 전통적인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능가하는 중요한 가치로 인정한다.
다시 자동차와 핸드백의 예를 보자.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앞에 말한 것처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물론 세대 간의 차이도 없다). 그럼 이 두 상품의 기호가치는 뭘까. 그것은 상표(brand)가 결정한다.
자동차라고 다 같은 자동차가 아니다. 최고급 자동차로 꼽히는 마이바흐 한 대의 가격은 경차 60대를 살 수 있을 만큼 비싸다. 루이비통 핸드백 하나는 시장에서 파는 핸드백 100개와 맞먹는다. 그렇다면 교환가치의 문제가 아닌가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단순히 교환가치로만 설명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마이바흐를 타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그것이 좋은 자동차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자동차로서의 기능이나 성능이 경차의 60배에 달할 만큼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하다. 예를 들어 자동차의 중요한 기능인 속도가 경차의 60배만큼 빠르지 않으며, 중요한 성능인 안전도도 경차의 60배만큼 높지 않다.
루이비통 핸드백이 고급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시장 핸드백의 100배만큼 물건을 많이 넣을 수 없고 100배만큼 디자인이 멋진 것도 아니다. 상품이 용도와 분리된다.
마이바흐와 루이비통이 갖는 참된 가치는 바로 ‘명품’이라는 데 있다. 마이바흐는 마이바흐라서 가치가 있는 것이고 루이비통은 루이비통이라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마이바흐와 똑같은 기능과 성능을 가진 다른 자동차, 루이비통과 똑같은 디자인을 가진 다른 핸드백이 마이바흐와 루이비통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이 두 명품의 가치는 기능이나 성능, 쓰임새에 있는 게 아니라 상표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상품의 전통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구세대는 기호가치를 중시하는 신세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반면 신세대는 가치의 관념이 달라진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부모세대를 고루하게 여긴다. 명품이 밥 먹여주느냐며 자식을 나무라는 부모와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도 명품을 사고야 말겠다는 자식의 갈등은 기호가치를 가치로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기호가치를 처음으로 제기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신세대 편을 든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보다 기호가치가 더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기호가치가 권력을 가져서다.
사용가치나 교환가치는 물질을 담보로 하는 가치이기 때문에 권력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 부와 재산이 권력으로 환치되는 것은 인류 역사 이래 늘 있었던 현상이니까.
하지만 기호가치는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권력을 가진다는 건 무슨 말일까. 기호가치의 권력은 정치권력이나 경제적 부처럼 가시적인 권력이 아니라 비가시적이고 비공식적으로 작용하는 일종의 문화적 권력이다.
마이바흐 자동차와 루이비통 핸드백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곧 그 소유자의 신분과 지위를 나타낸다. 과거 신분제 사회와 달리 현대 사회는 신분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가 된다. 소형 자동차를 타고 특급호텔에 가본 사람은 금세 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은근히 어떤 차별을 받는지. 그러므로 명품은 (부모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지 사치에 불과한 게 아니라 문화적 권력이라는 훌륭한 ‘쓰임새’가 있는 셈이다. 명품을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은 사용가치나 교환가치가 아니라 바로 기호가치를 추구하는 욕망이다. 짝퉁의 대체효과도 마찬가지다.
어떤 면에서 사용가치→교환가치→기호가치로 변모하는 흐름은 가치가 전도된 느낌을 준다. 물건의 가장 본질적인 가치인 쓰임새로부터 갈수록 멀어지기 때문이다. 절대 빈곤에 시달리며 먹고 사는 게 무엇보다 절실했던 부모세대의 관점에서는 기호가치가 더더욱 전도된 가치로 보인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의 특징은 바로 그런 가치 전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잘 따져보면 현대 사회에서의 가치 전도는 상품에만 있는 게 아니라 정치, 문화, 심지어 일상생활에도 있다. 여기서 경제적 가치 전도는 도덕적 가치 전도로 이어진다.
정치의 전도 : 정당의 목적은 권력을 얻은 뒤 그 권력을 이용해 정당의 강령(프로그램)을 구현하는 데 있다. 그러나 정당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권력 획득”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대중문화의 전도 : 연예인은 원래 대중을 즐겁게 해주는 대가로 인기를 얻고 돈을 버는 직업이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팬들이 온갖 선물 공세로 연예인을 즐겁게 해주고 위안을 주려 애쓴다.
일상생활의 전도 : 건강을 유지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몸을 튼튼히 만들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건강이 최고”라면서 마치 건강하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듯하다.
모든 게 전도돼 있다. 하지만 모든 게 전도돼 있다고 불평하면 현대 사회의 새로운 흐름에 전도되는 결과를 빚게 된다. 전도의 전도도 또 하나의 전도니까. 그래서일까. 현대 사회는 갈수록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가기 어려워진다.
남경태
인문학 저술가 및 번역가 dimeola@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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