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두 여인>,1962년, oil on canvas, 130x89cm
<나무와 두 여인>,1962년, oil on canvas, 130x8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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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 등걸 아래 광주리를 인 허리춤이 살짝 드러난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어디를 바쁘게 걸어가실까. 3월, 아직 이른 봄 나무 이파리 피어나기 전 세 그루 나무 아래 들일 나가는 아낙과 그 뒤를 따르는 아이의 단조로운 모습이 가난과 같은 서정으로 다가온다.

아이를 등에 업은 할머니의 서성임과 동네 어귀 나무 아래 주저앉아 곰방대를 빨아대는 초로의 두 영감님, 나루터 강변에는 빈 배만 출렁인다. 어린동생을 업은 누나와 엄마 손을 잡고 걸어가는 어린아이, 그 곁을 따르는 멍멍이, 송아지는 하품을 하고, 사람들은 한낮의 무료함을 잡담으로 풀어낸다. 무채색의 단조로움 아무리 보아도 지겹지 않다. 모두 박수근(朴壽根, 1914~1965)의 그림이다.

박수근은 겨울나무 같은 화가다. 겨울 모진 바람을 나무는 서서 그대로 껴안는다. 나뭇잎으로 가린 여름날의 성화를 겨울에는 빈 가지 그대로 마냥 서 있다. 박수근은 그림의 서정적 인물과 풍경 속에는 격변기 근대사가 바람처럼 휩쓸고 지나간다.

말이 없던 화가, 자식들에게는 더없이 따뜻하고 자상했던 아버지, 평생을 사랑했던 아내와 그림을 남기고 먼 길을 떠나던 그 순간에도 붓을 놓지 않았던 화가였다.

전업화가 박수근
박수근 사진, 연도 미상, 간경화에 합병증으로 한쪽 눈의 시력을 읽고 안경을 쓴 만년의 피로한 모습. 그래도 이젤 앞에 양복에 넥타이까지 갖추어 차려 입은 손에는 붓이 들려 있다.
박수근 사진, 연도 미상, 간경화에 합병증으로 한쪽 눈의 시력을 읽고 안경을 쓴 만년의 피로한 모습. 그래도 이젤 앞에 양복에 넥타이까지 갖추어 차려 입은 손에는 붓이 들려 있다.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양구보통공입학교를 다니면서 미술에 소질이 있음을 간파한 담임선생님에게 각별한 귀여움을 받았다.

이 무렵 밀레(Jean-Fancois Millet, 1814~1875)의 <만종>을 책에서 처음 보고 깊은 감명을 얻었다. 그 후 그림에 열중하며 “하느님 저도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주옵소서” 하고 늘 기도했다고 한다.

양구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자 화가에 대한 어린 소년의 꿈도 좌절하는 듯 했지만, 스스로에게 기도하고 소망하며 날마다 산과 들로 나다니며 자연과 풍경을 스케치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던가. 1932년 그의 나이 열아홉에 서울의 조선미술전 서양화부에 이른 봄의 농가를 그린 수채화 <봄이 오다>를 출품해 입선하는 영광을 맛본다. 박수근은 이에 크게 고무돼 용기를 내지만 그 다음해부터 3년간 낙선의 쓴맛을 보며 고독한 시련을 겪는다.

이후 결혼과 득남 그리고 다시 입선과 낙선을 거듭하면서 평양과 금성을 거쳐 전쟁이 발발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남하를 결정, 군산으로 내려가 부두 노동으로 삶을 영위하면서도 제도권 미술교육을 받지 못한 아마추어 화가의 유일한 등용문인 국전에 계속, 열심히 출품했다. 박수근은 이미 전업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아기 보는 소녀>, 1963년, oil on canvas, 35x21cm, <고목과 여인>, 1964년, oil on canvas, 45x38cm
<아기 보는 소녀>, 1963년, oil on canvas, 35x21cm, <고목과 여인>, 1964년, oil on canvas, 45x3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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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그리던 시절의 박수근

누구나 어렵고 힘들었던 1950~1960년대, 가난한 화가 박수근은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림이 팔려야 쌀도 사고 전차표도 사고, 캔버스며 물감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림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전쟁 그 어려운 시절, 박수근은 미군 PX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행운을 얻었다. 거기서 벌은 얼마 되지 않은 달러 수입은 가계에 큰 보탬이 됐다. 훗날 작가 박완서는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된 것은 1951년이 저물어 가는 겨울이었다’로 시작하는 에세이 ‘초상화 그리던 시절의 박수근’에서 다음과 같이 풀어 놓았다.

“(내가 미군 PX에 취직을 하고 보니) 초상화부엔 다섯 명 정도의 궁기가 절절 흐르는 중년 남자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업주는 그들을 휘뚜루 간판쟁이들이라고 얕잡아 보고 있었다. 전쟁 전엔 극장 간판을 그리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박수근 화백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염색한 미군 작업복은 매우 낡고 몸집에 비해 비좁았고 말이 없는 편이었다. 박수근은 남보다 몸집은 크지만 무진 착해보여서 소 같은 인상이었다. 착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 자칫하면 어리석어 보이기가 십상인데 그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 바닥은 결코 착하고 점잖은 사람을 알아볼 만한 고장이 아니었다.

(박수근과 같이 했던) 그 일 년 동안에는 봄도 가을도 여름도 있었으련만 왠지 그가 걸었던 길가엔 겨울풍경만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즐겨 그린 나목 때문일까. 그가 그린 나목을 볼 때마다 그해 겨울, 내 눈엔 마냥 살벌하게만 보였던 겨울나무가 그의 눈에 어찌 그리 늠름하고도 숨 쉬듯이 정겹게 비쳐졌을까가 가슴이 저리게 신기해지곤 한다.”

박수근은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일을 했던 인연으로 미군들이 그의 집에 찾아와 작품을 사가기 시작한다. 이것이 계기가 돼 마침내 화랑과의 거래도 시작됐다. 그 무렵 반도호텔 안에 생긴 ‘반도화랑’이 그의 유일한 거래처였으며, 그 화랑의 주요 고객들은 외국인이었다.

그림을 팔아서 얻는 수입 말고는 별다른 수입원을 갖고 있지 못했던 그는 좀 더 수요가 많은 소품에 매달렸다. 당시 소품은 쌀 한 말 값 정도에 팔렸으며, 그의 작품들이 대작보다 소품이 많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박수근은 작품이 장차 천문학적 가치로 치솟을 것이라고 예견한 사람은 박수근을 포함해서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다만 박수근의 작품이 진심으로 좋아서 샀을 뿐이다.
<귀가>, 1962년, oil on canvas, 41.5x79.5cm
<귀가>, 1962년, oil on canvas, 41.5x79.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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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그림의 특징

박수근의 유화 그림에는 색채가 없다. 그는 “나는 우리나라의 옛 석물 즉 석탑, 석불 같은데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원천을 느끼며 조형화에 도입코자 애쓰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우리네 산천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화강암은 자세히 보면 흰색과 검정색 알갱이 덩어리의 혼합으로 멀리서 보면 그냥 하나의 커다란 회색덩어리다. 박수근의 무채색 그림은 화강암 같은 묵직하다.

비록 그림의 형태와 크기는 단조롭고 작지만 볼수록 아름답고 깊은 맛이 난다. 언뜻 보면 거칠지만 그 가운데는 따뜻한 사랑이 담겨있다. 누구라도 박수근 나무그림 한 점 가지고 싶고, 누구라도 그 그림 속에 파묻히고 싶어 한다.

박수근은 원래 무채색만 쓰는, 일종의 색맹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도 역시 색을 좋아한다. 과일정물과 책, 물감 팔레트, 연필과 가방 등 그가 그린 수채화는 색이 곱고 선명하다. 어쩜 이리도 고울까. 수채화 물감과 붓을 그린 그림을 보면 마치 칼라사진을 보듯 선명하다. 박수근은 유화작품에서 보이는 두꺼운 마티에르와 단순한 구도 거기에 무채색의 색조와는 사뭇 다른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순정함이 보인다.

박수근의 무채색은 그가 창안해낸 독특한 화강암 재질의 표현에서 불가분하게 표현된 결과물이요, 그의 우직한 성품에서 나온 담담함의 다른 표현이다. 어쩌면 유화물감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 가난이 비싼 노랑과 빨강 카드뮴 계열과 보라색 계열의 물감 대신 가장 값이 싼 흰색과 검정색 그리고 고동색을 주조로 선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무와 여인>, 1960년대, 하드보드에 유채, 23x25cm
<나무와 여인>, 1960년대, 하드보드에 유채, 23x25cm
, 1960년대, 하드보드에 유채, 23x25cm">미술교육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않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거센 바람에도 묵묵히 겨울나무처럼 버티며 자라면서 청년 박수근은 자신의 소망대로 아름다운 한국적 서정을 화면에 수놓았다.

뒷동산 소나무 아래 화강암 같은 무채색 바탕 위에 성긋한 나무 한 그루, 무엇인가 이고 지나가는 여인들이 뒷모습에서 우리네 어려웠던 시절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한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의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박수근의 말처럼 그는 자신이 삶을 그림 속에 고스란히 담았다.

단순한 선 몇 개와 무표정한 인물 사이로 그는 누구보다도 많은 이야기를 담아냈고, 어느 그림보다도 강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의 그림에는 따뜻한 서민의 삶과 애환이 묻어난다. 아이들 키우고 살림하기도 빠듯한 삶에 변변한 스케치북 하나 없어 타자용지에 그린 그의 스케치는 연필로 그리고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그려 종이가 얇게 해져 있었다.

연필은 장녀 박인숙의 몽당연필로 그렸다. 캔버스가 없어 두꺼운 하드보드지에 그린 그림도 많았고, 심지어는 그림 그린 천을 뒤집어 다시 그린 경우도 있었다. 가난은 박수근의 꿈을 깨지 못했다. 그는 일상처럼 그리고 또 그렸다.

유작으로 남겨진 그의 그림에 쓴 자필 사인 ‘수근’처럼 겨울나무 아래 여인들의 속삭임과 빨래터에서의 빨래방망이 두드리는 소리와 동네 어구에서 들려오는 풍물패 소리가 여전히 들린다. ‘수근수근, 수군수군’ 고목 아래에서의 속삭임은 그의 시적 언어가 됐다.
3월의 초봄 아침, 경복궁 동쪽 담장 나목의 그림자 사이로 누군가 박수근 그림처럼 빠르게 걸어간다.
3월의 초봄 아침, 경복궁 동쪽 담장 나목의 그림자 사이로 누군가 박수근 그림처럼 빠르게 걸어간다.
인간적 면모

박수근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 가운데 자식들이 성장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상하는 글에 ‘화가 박수근’의 따뜻한 인간적 면모를 보여준다.

우선, ‘우리 식구가 가장 행복하게 살았던 곳은 창신동 집이다’로 시작하는 장녀 박인숙의 글에는 궁핍한 집안 살림에도 불구하고 가끔 찾아와 그림을 사가는 외국인들 때문에 쌀도 사고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었는데, “(그림이 팔린) 그날은 흰밥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식구 모습을 보는 아버지의 표정도 흐뭇해 하셨다”고 회상한다.

박수근이 죽고 친구들이 마련한 유작전에 장남 박성남은 “일생 개인전다운 전시 한번 못 가져본 아버지, 외국에서 순회 전시하려던 꿈도 물거품이 된 아버지의 작품전은 화우들의 뜨거운 정으로 유작전으로 마련됐다. 어려울 때면 주거니 받거니 했던 낱개의 화이트 컬러(흰색 물감)며, 소중한 책을 팔아 전차표며 쌀을 사 주던 우정이 어우러져 침묵의 고뇌와 손때가 묻은 그림에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아내와 자식을 사랑한 평범한 인간이자 동시에 따듯한 가슴을 시대에 열어 보인 따습고 우람한 손을 가진 나의 아버지, 소명대로 인내한 나의 아버지”라고 추억한다.

살아서 못다한 그림.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더니 멀어, 멀어.” 마지막 말 남기고 51년의 짧은 생을 간암으로 마친 박수근은 한 그루 나무가 돼 오늘도 우리 곁에 무심히 서있다. 수근수근, 바람의 말을 전하며.
수근수근 바람의 말을 전하며
글·사진 최선호(화가)
최선호 111w111@hanmail.net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동대학원, NewYork University 대학원 졸업.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시카고 스마트뮤지움, 버밍햄 뮤지움 등 작품소장. 현재 전업화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