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주태석 & 아트파크 박규형 대표

(좌)주태석 홍대 미대 교수 (우)박규형 아트파크 대표
(좌)주태석 홍대 미대 교수 (우)박규형 아트파크 대표
홍대 미대 주태석 교수는 오랫동안 나무가 있는 풍경을 그려왔다. 나무에 투영된 빛까지 세밀하게 묘사한 그의 그림은 일상에 찌든 도시인에게 휴식을 제공한다. 아트파크 박규형 대표는 그의 그림을 ‘산소 같은 작품’이라고 평하며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갤러리스트다.

‘나무’ 혹은 ‘나무가 있는 풍경’으로 유명한 주태석 교수. 그는 고영훈, 이석주, 지석철 등과 함께 국내 극사실주의 회화 4인방으로 꼽힌다. 지금이야 극사실화가 미술 애호가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주 교수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만 해도 극사실주의는 미술계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화단의 선배들 중 일부는 극사실화를 백안시하기도 했다. 이석주 교수 등이 선배교수들에게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게 왜 안 되냐?’고 항의해야 하던 시절이었다. 극사실화는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이 소개된 뒤에야 국내 화단에서 서서히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를 테면 주 교수는 극사실주의 회화 1세대 작가인 셈이다. 그러나 소재는 다른 선배들과 달랐다. 20년 가까이 나무를 소재로 그림을 그려온 그는 젊은 시절에는 기찻길을 주로 그렸다.

일상에서 회화의 소재 찾아

“회색 도시에 산소 같은 작품”
주태석(이하 주)
: 주변에서 회화의 모티브를 잡으려고 했어요. 제가 대학시절에 하숙을 했는데, 하숙집 옆에 기찻길이 있었어요. 거기서 착안해 기찻길을 그렸습니다. 지금도 가끔 기찻길을 그려달라는 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찻길은 10년 이상 작업을 하다보니 소재로서 한계가 있었어요.

박규형(이하 박) : 그럼 나무는 언제부터 그리신 건가요?

: 가로수 등 주변에서 늘 나무를 접하잖아요. 하지만 특별한 감흥은 없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밤에 길을 가는데 가로등 불빛을 받은 나무가 너무 아름다워 보이는 겁니다. 그 뒤로 봄빛이 투영된 연초록색 잎사귀도 눈에 들어왔고요. 나무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그림을 사가신 분의 남편이 ‘나뭇가지가 아랫방향으로 향하면 사업이 잘 안 되니 위로 향하도록 수정해오라’고 해서 결국 다른 그림으로 바꿔간 적도 있었죠.

: 저도 들어본 듯해요. 사실 선생님 작품은 극사실화라고는 하지만 세밀한 묘사에 그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자연의 숨겨진 본질을 꿰뚫고 있다고 할까요. 저는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미술 공부를 했거든요. 그때 숲속에 누워 바라본 풍경과 선생님의 그림이 무척 닮아있어요. 나무껍질 하나하나는 무척 세밀하지만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굉장히 편안하게 다가왔어요. 그 매력에 빠져 초대전까지 기획하게 된 거죠.

: 그게 2001년이었죠? 박 대표가 갤러리 현대에 큐레이터로 계실 땐데, 젊은 작가로는 이례적인 전시회였어요. 예나 지금이나 갤러리 현대는 원로작가 중심으로 전시회를 갖는데, 당시 제 나이는 파격적인 대우였어요.

: 주 선생님 선배 작가들 중에 갤러리 현대에서 전시회 못 하신 분들 많아요(웃음).

: 지금까지 크고 작은 전시회를 38번 가까이 열었는데, 그때가 가장 의미 있는 전시였을 겁니다. 그때 제 개인전을 기획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요?

: 예전부터 선생님 작품이 도시에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극사실이라고는 하지만 선생님 작품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도 아니거든요. 주태석식 자연에 대한 재해석이 작품 속에 녹아있어요. 그렇게 새롭게 가공된 나무와 풍경이 회색도시에 산소를 공급하는 듯했거든요.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위로가 되는 작품

“회색 도시에 산소 같은 작품”
: 서로 코드가 맞았다고 할까요. 전시회하고 연락 끊을 수도 있는데, 자주 연락하며 지냈어요. 제 작업실에 놀러도 오시고요. 올해도 박 대표 기획으로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전시회를 엽니다.

: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아트 스페이스라고 갤러리가 있어요. 제가 거기 자문을 해드리고 있는데, 6월에 선생님 작품으로 전시회를 열어요. 선생님 작품이 도시인들에게 휴식과 위안을 주잖아요. 그런 점에서 병원에 아주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신촌 세브란스만 해도 환자와 가족을 합쳐 하루에 2만~3만 명이 오가거든요. 전시회를 통해 그분들께 정신적인 위안을 선사하는 거죠.

: 그래서 그런지, 제 작품이 병원에 많이 있어요. 삼성의료원, 을지병원, 강남성모병원에도 있고, 제 친구가 하는 치과에도 있고요. 그럭저럭 그림은 제법 팔리는 것 같아요. 다 박 대표님 같은 분 덕분이죠(웃음).

사람 좋은 웃음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난 주 교수는 “차 한 잔 하자”며 보이차를 내왔다. 자신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컬렉터가 선물한 귀한 차라고 했다. 물을 끓이고 차를 우리고 손수 차를 따르며 그는 다구세트도 선물로 받은 것인데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 놀랐다고 했다.
이어 그는 “어떤 분야든 좋은 건 그만큼의 가치가 있나 봐요. 그림은 말할 것도 없고요”라고 흘리듯 말했다.

주 교수가 차를 내오자 박 대표가 쇼핑 가방에서 조각 케이크와 쿠키를 꺼냈다. 오는 길에 맛있어 보여 사왔다고 했다. 순식간에 차려진 다과상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은 국내 화단과 미술 시장에 대해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박 대표는 국립현대미술관과 선재 아트센터, 갤러리 현대 등에서 오랫동안 큐레이터로 일한 베테랑 큐레이터이다. 2003년 아트파크를 연 후 갤러리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특히 그녀는 젊은 작가의 작품 활동에 관심이 많다. 스타 작가인 김동유와 변선영, 권기수 등이 그녀의 갤러리를 거쳤다.

젊은 작가들 이야기가 나오자 주 교수가 자신의 이야기를 보탰다. 주 교수는 박 대표와 함께 자신에게 큰 힘을 준 사람으로 노화랑 노승진 대표를 꼽았다. 노 대표가 없었다면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말했다.
“회색 도시에 산소 같은 작품”
작품 활동 제대로 하려면 작품에만 매달려야


: 예나 지금이나 미대를 나오면 딱히 밥벌이를 하게 화실을 열거나 학원을 하는 도리밖에 없어요. 저도 젊어 화실을 했어요. 그때 노 대표께서 청년작가 기획전을 열어주셨어요. 전시회를 하고 작품판매대금을 주시는데, 1년 화실을 하고 번 돈보다 많았어요. 그 길로 화실을 정리하고 전업작가로 나섰어요. 다행히 2년 후 홍대 미대 교수로 임용되면서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거죠.

: 잘 하신 거네요. 젊은 작가들 보면 화실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다 보면 이상하게 작품이 안 되더라고요. 젊은 작가 중에는 우리가 그림을 못 팔면 작업을 못하는 어려운 분들도 있어요. 그럴 땐 저희도 신경이 많이 쓰이죠.

: 우리 같은 사람은 두 가지를 못 하겠더군요. 미술학원해서 돈 많이 번 분들도 있는데, 돈 번 후 나중에 그림을 하겠다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다시 작품을 하려면 쉰 만큼 기간이 필요한 듯해요. 더구나 요즘 젊은 작가들 얼마나 열심히 작품활동 합니까. 정말 열심히 그리거든요.

: 그런 의미에서 갤러리스트의 역할이 중요한 거죠. 선생님 같은 중견 작가 이상은 다르지만 젊은 작가들은 전시회가 작품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거든요. 젊은 작가 중에는 전시회를 통해 여러 작품 중에서 자신의 방향을 잡는 경우도 있거든요.

: 사실 화랑가에 노 대표나 박 대표처럼 의리 있는 화상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분들은 고마운 거죠.

: 선생님과 제가 코드가 잘 맞는 거죠. 취향이나 성향이 서로 맞아야죠. 아무리 그림이 좋아도 화랑 주인이 좋아하지 않으면 팔지 못합니다. 제가 그래요. 어떤 갤러리스트들은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작품도 잘 파는데, 전 제가 제가 싫으면 컬렉터들한테 얘기를 잘 못하겠더라고요.

: 피카소가 젊을 때가 그랬답니다. 전시회를 하는데 그림이 잘 안 팔리면 친구들 양복 입혀서 화랑으로 보냈대요. 그렇게 차려입고 화랑에 가서는 “여기 피카소 그림 없냐?”고 하는 거죠. 피카소가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요.

: 제가 아는 한, 주 선생님은 절대 그렇게 못할 분이에요. 거짓말 하고 꾸밀 줄을 모르는 분이세요. 경우에 따라서 사람은 좋은데 작품이 별로인 경우가 있고, 작품은 좋은데 사람이 별로인 경우가 있거든요. 주 선생님은 사람도 작품도 좋은 경우죠. 아주 오래 만난 건 아니지만 늘 변함이 없는 분이세요.

: 그렇게 봐주시니 고마울 뿐이죠. 제가 올해 쉰일곱 살인데, 앞으로 더 열심히 그려야죠. 지금은 나무를 그리고 있지만 일상의 또 다른 소재를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거죠.

글 신규섭 ·사진 이승재 기자 wawoo@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