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시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불안정한 시장경기에 따른 수요자들의 심리적 위축감은 상상보다 더 크다. 이는 현대미술의 동향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경기불황의 정점을 이뤘던 작년의 경우, 뉴욕 첼시지역에서 가장 화제가 됐던 전시는 바로 가고시언갤러리의 피카소전(3.26~6.6)이었다고 한다. 시장의 꽃으로 군림하던 데미언 허스트나 제프 쿤스가 아닌, 피카소의 후기 작품을 모은 전시 <피카소:총병(Picasso: Mosqueteros)>이었다.
10주 동안 관객 8만7500명이 보았으니, 1주일에 8750명, 하루에 약 2000여 명이 다녀간 셈이다. 뉴욕타임즈는 이 전시의 성공을 가리켜 “불경기 증후군(symptom of economy)”이라고 지적했다. 불황기일수록 실험적인 경향보다 검증된 안정적인 작가와 작품의 비중이 높아진다는 해석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피카소야말로 가장 완벽한 보증수표임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이런 현상은 뉴욕 현대미술관 모마(MOMA)가 2004년11월 지금의 맨해튼에 재개관한 이후 처음 개최하는 <모네의 수련>전(2009.9.13~2010.4.12), 뉴욕 구겐하임이 50주년 기념전으로 마련한 <칸딘스키>전(2009.9.18~2010.1.13) 등만 보더라도 쉽게 유행 타는 현대미술보다 전통적으로 검증 받은 ‘안전한 미술’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가를 충분히 짐작하게 된다.
이렇듯 현재 현대미술 분야는 투기와 거품이 많이 빠지면서 투자자들의 활동이 위축되고, 시장의 유동성이나 규모도 2~3년 전과 비교해 50% 수준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아마도 예년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선 최소 5년은 족히 걸릴 것이지만, 점차 회복세로 돌아선 점 역시 사실이라고 전한다.
경매시장은 어떨까? 물론 매우 위축된 상태다. 소더비와 크리스티 같은 대규모 경매사들의 메이저 세일의 출품작 수나 낙찰총액은 전년도 대비 절반 정도 수준이다. 다만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적은 인상파와 모던 아트 작품들 중에서 퀄리티(quality)가 보장된 작품은 예외였다. 세계적인 컬렉터들에겐 경기변화보다 수준 높은 작품을 손에 넣을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작품들은 시간이나 장소에 상관없이 가격의 기록갱신을 거듭하고 있다. 작년 11월 소더비 뉴욕 경매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작품은 앤디워홀의 1962년 작 <200 One Dollar Bills>였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은 1달러를 200번 반복해 표현한 것으로 추정가는 800만~1200만 달러였다. 하지만 무려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낙찰가 3900만 달러에 새 주인을 찾았다.
그러나 유일하게 성장을 거듭하던 중국마저 인플레이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전격 긴축정책을 발표했듯, 2008년 하반기 전 세계 금융권의 침체기 이후에 거대 옥션사인 소더비와 크리스티도 즉각적인 개편에 돌입했다.
우선 두 경매사는 출품작품 수를 절반 이상 줄이고, 경매 카탈로그의 부피를 줄여 진행경비 절감에 나섰으며, 전 세계 직원을 대상으로 한 인원 감축을 실시했다. 또한 작품수집 과정의 선불금 관행을 없애고, 작품의 추정가격을 대폭 낮춰 낙찰률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소더비경매사의 현대 미술품 담당 책임자인 토바이어스 마이어(Tobias Meyer)는 “이러한 경매사들의 자구적인 노력과 변화는 결국 컬렉터들에게 호감을 불러 일으켜 작품 컬렉팅에 자신감을 갖게 했다.”고 말했다.
물론 미술 시장의 변화와 노력은 작년부터 대규모 경기 부양책에 나섰던 주변 환경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또한 경제 선진국의 부진에 비해 아시아권의 빠른 회복세와 약진을 원동력 삼아 뉴욕의 경기회복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런던을 중심으로 한 유럽 미술 시장은 안정적으로 평가된다. 상업갤러리와 일반 파운데이션 그리고 경매와 컬렉터의 두터운 층이 시장 전반을 받쳐주고 있으며, 이들은 상호 유기적인 협력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이런 깊은 전통은 현대미술품을 단지 수익적인 가치를 넘어 문화역사적인 미적 가치로 재평가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로써 현대미술 시장의 다양성까지 도모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수요창출을 기대할 만한 이머징 시장은 어디일까?
그 지역은 바로 중국, 인도, 러시아, 남아프리카, 인도네시아, 터키, 폴란드, 싱가포르, 이란, 그리스 등 매우 광범위하고 다양하다. 이처럼 뉴욕과 유럽 중심의 판도에서 아시아 등 제3세계 시장이 세계 시장의 활기를 리드할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한국 미술 시장 역시 자연스럽게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는 추세이다.
어떤 측면에선 아시아 시장은 시장위기와 상관없이 이전부터 서서히 성장해왔기 때문에 이미 상당한 마니아층을 확보했다는 견해도 있을 정도다. 여기엔 이미 잘 알려진 중국과 인도 등을 넘어 대만과 인도네시아, 중앙아시아 등까지 포함된다. 국제 시장에서 아시아 작품에 대한 호응은 어떨까? 흔히 아시아권 미술품은 뉴욕이나 유럽보다 작품수준이 떨어진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아시아가 경제적인 급성장세를 이어가며 아시아 미술품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단적인 예로 세계적인 뮤지엄인 런던의 브리티시뮤지엄과 테이트모던은 작년 말부터 중앙아시아의 컬렉션을 확보하는 작업에 적극적이라고 한다. 중앙아시아지역을 전문으로 하는 큐레이터의 채용은 물론, 이란의 현대미술품의 경우 이미 200점 이상 사들였다고 하니 그 관심도가 충분히 가늠된다.
2010년에는 서양의 갤러리들이 동양 시장을 개척하려는 움직임이 더더욱 활발해질 전망이다. 홍콩지역이 일찌감치 그 중심 거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세계적인 경매사들이 앞 다퉈 지사를 설립하거나, 올해로 3회째인 홍콩아트페어의 경우 프랑스 최고의 갤러리로 꼽히는 엠마뉴엘 빼로땅 갤러리가 동참할 예정이며, 도이치 뱅크가 이 아트페어의 새로운 스폰서 파트너로 나서는 등 경제계의 관심도 범상치 않다.
파리에서 활동 중인 아트컨설턴트 최선희는 “가고시안 갤러리는 이미 몇 년 전에 홍콩 사무소를 열었고, 영국의 화이트 큐브 갤러리도 진출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홍콩아트페어는 향후 동양권 미술시장뿐 아니라 세계 미술시장 전체를 전망하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한동안 세계 미술 시장을 뜨겁게 달궜던 중국 본토 출신의 현대미술품은 작년 한 해 기름기를 쫙 빼는 시기를 거쳤다. 2004년 이후 한 때 과열양상까지 빚었던 중국 현대미술 평가의 재조정기를 맞은 것이다.
‘묻지마식’ 투기에 나섰던 일부 투자가들이 이성을 되찾으면서 같은 유명작가나 인지도가 높은 작가의 작품이라도 신중하게 옥석을 가리고 있다. 특히 중국 내부보다는 해외 시장에서도 인지도가 확보된 안정권 작가들의 수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또한 그동안 시장의 선호도가 아트페어 위주로 결정된 것이 관행이었다면, 점차 국제적으로 검증된 유수의 전시에 참석여부가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가령 2009년 53회 베니스비엔날레 중국 국가관 작가로 초대되어 주목을 받았던 허진웨이(1967~, 何晋渭) 같은 경우 좋은 예이다. 최근 들어 오히려 더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국내엔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올 3월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의 초대 개인전을 시작으로 주요 국제적인 도시에서 릴레이 개인전을 이어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서양 시장에서 주목하는 동양 작가들은 적지 않다. 2010년 9월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 전시에 초대될 다카시 무라카미(Takashi Murakami), 전문 컬렉터 군단의 러브콜이 식지 않는 요시토모 나라(,Yoshitomo Nara),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 중인 조각가 에니쉬 카푸어(Annish Kapoor), 작품의 대부분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에서 소진되는 역시 인도의 수보드 굽타(Subodh Gupta)….
이젠 대만과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전역의 현대미술이 관심의 대상으로 급부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사회적으로나 상업적인 가치 이외에도 문화적인 역사의 깊이를 바탕으로 한 미적가치의 우수성이 식상해진 서양현대미술을 대치할 새로운 대안으로 여겨지고 있는 듯하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이미 자체 국제아트페어인 ‘KIAF(한국국제아트페어)’를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여러 가지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주변지역의 주요 국제아트페어와 벨트화되어 연계된 점 역시 큰 호재다. 여기에 영국의 테이트 리버풀(Tate Liverpool)에서 회고전이 예정된 백남준이나, 페이스 갤러리와 파리의 타데우스 로팍(Galerie Thaddaeus Ropac)으로 소개된 이우환, 뉴욕을 넘어 국제적인 행보를 넓히고 있는 서도호와 강익중, 김아타 등을 비롯해 최근엔 대다수의 젊은 작가들까지 대거 합세해 한국 현대미술의 비전을 밝게 하고 있다.
지금의 미술 시장을 두고 투자심리가 지나치게 부풀려진 상태로 재평가 혹은 재조정되는 시기를 맞았다고 한다. 미술작품에 대한 인식 역시 경제적 가치로만 편중되었던 시각이 본연의 미적가치와 역사적 가치까지 살피게 되었다.
미술계를 이끌던 힘이 지극히 소수의 인물에 의존했던 관행도 크게 줄어들었다. 이젠 미술애호가(컬렉터) 전체가 바로 미술계(또는 미술시장)의 가장 영향력 있는 구성요소로 자리 잡았다.
건전한 시장구매력이 곧 미술시장을 성장시킬 차세대 동력으로 인식될 것으로 기대된다.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 소장,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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