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시인 김용택
시인 김용택이 학교를 떠난 지 1년 6개월이 흘렀다. 학교를 그만두고도 시인은 강의와 집필등으로 한가할 틈이 없었다. 아이들과 함께 CF에도 출연했고 최근에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詩)’ 촬영을 마쳤다. 열린 가슴으로 세상과 만나고 있는 시인을 전주 자택에서 만났다.
“이창동 감독님이 영화 얘기는 아직 하지 말라고 했는데…. 윤정희 씨가 주연으로 나오는 ‘시’라는 영환데, 거기서 시 가르치는 선생으로 출연해요. 제 촬영분은 끝이 났고. 지금은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나를 인터뷰한 책하고, 교육과 관련한 짧은 책도 준비하고 있어요.” 전주 자택에서 만난 시인은 자신의 근황을 그렇게 전했다. 인터뷰를 핑계로 몇 년째 만남을 이어왔지만, 퇴직한 후로는 첫 만남이었다. “오랜만이네”하며 자리를 권하는 시인에게 환갑도 안 된, 이른 퇴직의 이유를 물었다. 시인은 호적으로는 몇 년이 남았지만, 본 나이로는 정년이 맞다고 말했다.
시인은 몇 년 전부터 학교를 그만두는 문제로 고민을 했다. 동료 시인으로 오랜 친분을 쌓아온 도종환 시인과 이 문제를 갖고 의견을 나눈 적이 있는데, 그때 도종환 시인은 “형님, 어디 몸이 편찮으십니까?” 하고 묻더란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이제 그만둘 때가 된 듯하다고 했더니 도종환 시인이 “그럼, 형님. 환갑 때가 좋습니다”라고 했다. 그때 시인은 예순에 퇴직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38년 교단을 지킨 시인 김용택의 마지막 수업
1년 반 전, 시인은 그 결심을 실행해 옮겼다. 스물두 살부터 잡은 분필을 38년 만에 내려놓은 그 마음이 과연 어땠을까. 시인은 의외로 홀가분했다고 한다. 마지막 수업에서 시인은 아이들에게 “얘들아, 제발 나를 용서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들과 거의 평생을 지내며 많이 배웠고 또 행복했지만, 시인은 스스로 이런 질책을 했다. ‘내가 말은 그럴듯하고 번지르르하게 하지만, 참으로 언제 이 아이들에게 세계와 인생과 인간의 희망에 대해 차분하게 가르쳤던가. 늘 통제하고 닦달하고 억눌러온 것은 아닌가. 입만 열면 옳은 소리를 하지만, 실은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짓을 한 것은 얼마인가’하고. 마지막 수업을 하며 아이들에게 전한 말은 시인의 그런 진정을 담은 말이었다.
시인은 마지막 수업에서 미안함에 더불어 아이들에게 친구 사랑과 자연 사랑을 이야기했다. 소설가 이병천은 그날 수업을 참관하고 그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했다.
자연은, 어떻게 사랑허라고 말히야 헐랑가. 나도 잘 모르겄다. 그렁게로 옛날 야그나 하나 허께. 내가 어릴 적에 우리 집에서 저 갱변에 오리들을 놓아 멕였어. 근디, 하늘을 날아댕기는 야생오리 떼가 말여, 우리 집 오리덜하고 어울려가꼬 물괴기도 잡아먹고 풀도 뜯어 먹다가 해 떨어지면 우리 오리들을 따라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거여.
그리가꼬 쭈미쭈미험서나 지금이라도 딴 디로 날아가야 허나 아니면 그냥 몰른 체하고 처마 밑 신세를 지면서 모이도 좀 얻어먹어야 스꺼나 허고 두 눈을 두리번거림서 우리 식구덜 눈치를 샐핀단 말이여. 우리 엄니가 그때마닥 말씀허시길, 야야 저 오리덜을 놀라게 허덜 말아라. 우리 오리 손님잉께로 하롯밤이라도 따땃허게 잘 쉬다 갔으먼 쓰것다잉, 허셨다.
실은 우리 엄니뿐 아니라 느네 할무니나 엄니덜도 다 그릿거든. 그리서 너그들도 자연을 똑 그맹키만 사랑허면 좋것어야. 근다고 맨날 오리만 불러들이지 말고, 말 못허는 바위도 강물도 풀도, 그리고 저 바까티 산날맹이도 사랑허고 말여.
그리가꼬 나 보고자프먼 너그들 우리 집까장 터덜터덜 걸어올 게 아니라 갱변에 나가서 물 흘러가는 소리를 오래오래 들었으면 쓰것어. 그리도 영 안 되긋다 싶으면 그냥 우리 집으로, 들오리떼 맹키로 찾아와도 좋고이!
글쓰기란 궁극적으로 삶을 쓰는 것
그렇게 학교를 떠난 시인은 한동안은 여행을 다녔다. 환경단체와 관련된 여행도 있었고, 일반 여행도 있었다. 강연도 적잖게 다녔다. 많을 때는 한 달에 20여 개의 강연을 소화하기도 했다. 초등학교에서 중·고등학교, 시·군·구청, 공기업, 중소기업, 도서관 교양강좌까지 대상도 다양했다. 그중 가장 애착이 가는 곳이 중소기업 강연이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직장인들을 보면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가꿀 줄도 몰라요. 공부는 거의 하지 않고 술타령, 신세한탄을 하는 이들이 많은데, 거기서 희망을 찾을 수 있겠어요?”
처음에는 폐쇄적인 태도를 보이던 이들도 강연을 들으며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농고를 나와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하고 시인이 된 그의 이야기가 그들이게 희망을 말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많은 사람들이 삶을 아름답게 가꾸기를 바란다. 시인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학교는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다. 그런데 지금의 학교는 정답을 가르쳐주고 외우는 것만을 평가한다. 아이들을 교육의 주체라고 하면서 정작은 학부모들의 의지대로 교육정책을 만든 결과이다.
지금의 교육의 틀 속에서는 아이들의 생각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자연과 삶, 인생에 대한 고민이 없다. 오로지 성적에 대한 고민이 있을 뿐이다. 사유의 깊이가 없고 자연에 대한 사랑이 없다. 요즘 아이들이 토론이나 글쓰기가 약한 이유다. 글을 쓰는 건 궁극적으로는 삶을 쓰는 것이다.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삶을 종합하는 게 글이다. 글쓰기란 사물을 자세히 보는 데서 시작한다.
시인은 이 세상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종합하는 사람이다. 자세히 보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무엇인지 알면 의미가 생기고, 의미가 생기면 관계가 맺어지고, 관계가 맺어지면 생각이 일어난다.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자기가 살아온 삶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면서 철학적 삶과 태도가 생기고, 그럼으로써 신념이 생긴다. 이 신념은 이데올로기적 신념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신념, 즉 세상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세상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펴기 위해 시인은 강연과 책을 통해 끊임없이 세상과 만날 계획이다.
한 그루 나무처럼 있다 꽃 지듯 가고 싶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시인을 위해 섬진강 문학관을 지어주겠다고 하지만, 거창하게 형식적인 건물을 지어 무언가를 전시하는 그런 문학관이라면 반대다. 지금 필요한 것은 문학관(館)을 짓는 것이 아니라 문학에 대한 관(觀)을 바꾸는 일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나는 지금이 좋습니다. 그냥 이렇게 사는 것이 좋아요. 내가 사는 마을에다가 큰 집을 지어서 마을을 풍광을 해치기도 싫고, 내 문학작품들이 나랏돈 들여 보호하고 기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내가 사는 곳에는 강이 있고, 산이 있고, 강변이 있고, 정자나무와 느티나무가 있어요. 그 속에서 놀면 돼요.
논과 밭에서는 곡식들이 자라요. 그것이 내 문학이에요. 허물어진 빈집들, 나이 드신 어른들이 허리 굽혀 땅을 파고 곡식을 가꾸는 그 모습이 내 모든 문학의 논과 밭이에요. 그 아름다운 산천의 모습을 훼손하고 싶지 않아요. 그대로 두면 그것이 문학의 고향이고 문학관이죠. 나는 그저 그 속에 있는 듯 없는 듯, 한 그루 나무처럼 있다가 꽃 지듯 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시인은 그가 나고 자란 마을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강연도 하고, 여러 가지 자그마한 행사도 만들고, 글쓰기 대회도 하고, 작은 축제와 놀이들을 만들 계획이다. 동네 어른들과도 즐길 수 있는 일을 만들고 싶다. 이것은 시인 김용택의 교실을 넓히는 일이다. 학교를 벗어나 김용택 선생의 농사학교, 글쓰기 교실, 생태교실, 마을문화 교실, 강 교실 같은 자연교실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나는 우리 마을을 마을 박물관으로 만들고 싶어요. 그냥 내버려두고 조금씩만 손보면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형식을 갖춘 자연스러운 마을 박물관이 될 거예요. 나는 그 박물관의 명예관장쯤 하면 어울릴 것 같아요. 참 재미있을 것 같지요.”
김용택
시인
전 덕치초등학교 교사
제4대 전북작가회 회장
제11회 소충사선문화상
제12회 소월시문학상
글 신규섭·사진 김기남 기자 wawoo@money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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