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서원의 진입로는 꾸불꾸불했다. 옛날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길이었고, 그 타임머신 같은 길은 우리들을 1500년대 조선 중엽으로 빠져들게 했다. 그 진입로에서 처음 만난 것은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새긴 기념석. 이곳이 추나라 맹자, 노나라 공자 같은 성인이 살았던 고향이라는 뜻이다.이 나라가 한 사람의 위대한 학자를 얼마나 존경했나를 알 수 있는 표지석이었다. 서원 앞을 흐르는 강물 한 가운데는 섬 같은 것이 솟아올라 있었다. 시사단試士壇이다. 조선시대 22대 정조 대왕이 퇴계 이황 선생의 문하생들에게 조정에 들어 올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지방에서 최초로 과거시험을 치른 곳이다. 지금도 가을이 되면 전국 규모의 한시 백일장이 열리고, 참가자들은 옛 선비가 과거시험을 치르듯이 의관을 정제하고 임한다 하니 진풍경이겠다.도산서원 정문을 들어가기 직전 약 500년 수령의 왕버들 두 그루가 세월의 역경을 이겨낸 것을 뽐내기라도 하듯 수려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서원에 들어서니 눈에 띄는 것이 왼쪽에 있는 농운정사 雲精舍,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다. 선생께서는 제자들에게 공부에 열중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의 “工”자 모양으로 짓도록 했고, 현판도 선생이 직접 쓴 글씨라고 했다. 그 오른쪽 뒤편에 자리 잡은 게 도산서당이다. 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거처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진도문. 이 문을 통과하면 퇴계 선생의 제자가 되었단다. 옛 선비들에게 이 문을 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당시에 선생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학문과 인격이 얼마큼 무르익었다는 것이고 당대의 사회에 얼마큼 책임을 다 하겠다는 서약이었을 것이다. 나는 진도문을 넘었다. 그리고 전교당典敎堂에 올랐다. 도산서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선조 7년(1574년)에 건립한 대강당이다. 도산서원의 현판은 선조가 하사한 것으로, 그 당시 선조가 한석봉을 불러 어전에서 붓글씨로 한 자를 부르면 받아쓰는 형식이었는데, 원院→서書→산山→도陶 순서로 거꾸로 부르다 보니, 한석봉도 눈치를 못 채고 있다가 선조가 마지막으로 도陶자를 부르자 평소 흠모하는 퇴계 선생에게 내리는 현판이라는 것을 알고 순간 손이 떨려 글자가 제대로 쓰이지 않았다 한다. 그래서인지 다른 글씨에 비해 도陶자가 덧댄 글씨처럼 흔들려 보였다.유생들이 공부하던 도산서원 동편의 박약재博約齋와 서편의 홍의재弘毅齋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도산서원 제일 위 쪽에 자리 잡고 있는 상덕사尙德祠에 올랐다. 상덕사는 선생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으로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향사를 지낸다고 한다. 첩첩산중에 자리 잡은 천 년 사찰일지라도 이보다 더 짙은 향기가 날까?그것은 아마도 학문 연구, 인격 도야, 후진 양성에 일생을 다 바침으로써 이 나라 만대의 정신적 사표師表가 된 퇴계 선생의 체취가 녹아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김복중 세무회계사무소 대표bj451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