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의 마을
1969년 시인 김춘수는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었다.
샤갈의 마을에는 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샤갈의 마을에 눈이 내린다. 커다란 당나귀 눈동자 속으로 송이 같은 함박눈이 내린다. 마을이 온통 고요하다. 샤갈의 마을에는 당나귀가 살고 소와 염소 닭 물고기들이 꿈과 함께 산다. 정오가 되면 커다란 괘종시계에서 오래된 종소리가 들리고, 가난한 러시아 농부가 들려주는 집시풍 바이올린 선율이 가슴에 젖는다.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와 사랑하는 연인에게 전하는 꽃다발, 파리의 낭만 에펠탑 그리고 가난한 러시아의 통나무집이 어우러진 샤갈의 고향마을에 눈이 내리고 있다. 그림 속 풍경들이 모두 살아 나와 그림 밖에서 춤추고 샤갈은 그 속에서 팔레트에서 붓으로 물감을 찍어 여러 겹 칠하고 있다.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은 따듯하다. 꿈과 사랑 그리고 환희가 깃든다. 시인의 감성이 눈송이처럼 점점 묻어난다.
러시아의 기억
1887년 7월 7일 러시아의 비테프스크 청어창고에서 일하는 유태인 아버지 자하르와 순박한 어머니 페이가 이타 사이에 태어난 샤갈은 눈부신 색채로 유쾌하고도 난해한 환상의 세계를 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절 전쟁과 러시아의 혁명 그리고 러시아 정교의 무거운 이미지를 러시아 화풍으로 그려내고, 1922년 러시아를 떠나 파리로 이주한 이후, 가족의 행복과 서커스의 세계, 성서의 보편적인 메시지를 화폭에 담아내었다.
샤갈의 그림은 자신만의 독특한 회화 언어와 색채로 어린아이의 순수와 같은 천진난만이미지를 화폭에 담았다. 동화 속 꿈 같은 시어를 상징적이고 미학적인 이미지로 풀어낸 그의 그림은 누가 보아도 쉽게 다가왔지만 그 구성을 지배하는 것은 러시아의 정교한 기하학적 구성과 프랑스의 화려한 색채였다.
성서 연작
샤갈의 예술은 마음속에 있는 고향 러시아의 비테프스크를 지향한다. 그것은 유년기의 신화적이고 초자연적인 세계로 이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훗날 서커스와 성서로 연결된다. 신비적 경향이 농후한 유대공동체의 독실한 가정에서 자란 샤갈은 줄곧 성서에 대한 직관적인 인식을 가져왔다.
성서는 자연스럽게 그로 하여금 성스러운 것에 접근하게 해 주었다. 성서는 히브리인들에게는 역사의 순환을 의미하며, 완벽하게 초월적인 절대의지였다. 샤갈의 상징주의적인 창작세계는 성서의 이러한 특성에 동화되어 있다. 1950년 이후, 샤갈은 17점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웅장한 성서 연작을 구성한다.
그 가운데 12작품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나오는 일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고, 나머지 다섯 점은 구약성서 아가(雅歌)에서 따온 것이다. 주제에 따라 순서가 정해진 연작 <성서의 메시지>는 1967년 프랑스정부에 기증되어 니스의 시미즈 언덕에 자리한 국립샤갈미술관에 영원히 전시되었다. 샤갈은 그때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청년기 이후 나는 성서에 사로잡혀 있다. 나에게 성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위대한 시정(詩情)의 원천이다. 나는 내 삶과 예술에서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성서는 내가 전달하려고 하는 이 비밀과 자연의 반향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늘과 땅 사이에서 태어났고, 이 세상은 거대한 사막이고, 그 안에서 내 영혼은 횃불처럼 떠다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오래전부터 간직한 꿈을 실현한다는 의미에서 이 그림들을 그렸다. 나는 사람들이 이 그림들을 보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 영적인 깨달음과 종교적인 감정,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미술관에 걸어두고 싶다.
나는 이 그림들이 한사람의 꿈이 아닌 인류의 꿈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곳에서 숭고한 정신세계를 표현한 모든 이들의 작품이 전시되기를 바라고, 마음으로 전해지는 그들의 시와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 꿈이 가능할까? 인생과 마찬가지로 예술에서도 사랑이 바탕이 되면 가능하다.”
서커스와 꽃
한편, 20세기 피카소를 위시한 위대한 화가들은 모두 서커스에 열정을 기울인다. 그들은 서커스에서 이 세상에 대한 은유와 활기를 발견한다. 루오가 종교적인 주제와 서커스에 관한 주제를 오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샤갈이 서커스를 가까이 지켜본 것은 피카소가 투우를 따라다닌 것만큼이나 의미심장하다. 서커스는 오래전부터 러시아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다.
서커스의 무대는 마술의 근원으로 아무런 억압도 없고 엄격한 규칙 속에서도 움직임과 감정이 지극히 자유롭다. 샤갈은 <성서 메시지> 연작과 마찬가지로 1913년 처음 그림에 서커스가 등장한 이후 수많은 작업을 해오다가 마침내 1968년 <대 서커스> 같은 걸작을 그려낸다. 서커스 공연에 나오는 동물들은 샤갈의 신화에서 상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암소와 염소, 당나귀와 말, 수탉과 물고기 같은 동물들은 모두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해와 달, 물과 불 같은 상극의 요소들과 짝지어 있다. 샤갈은 야생동물과 모든 피조물이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의 왕국에서는 화해를 한다고 믿었고, 원죄를 저지르기 이전의 세계 즉, ‘원초적이고 모성이 지배하는 세계’를 부활시킨다고 믿었다.
꽃 역시 성경의 언어이다. 꽃은 사랑의 언어이며 낙원의 찬가이다. 샤갈은 자신의 약혼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내 방 창문을 열면 푸른 공기, 사랑 그리고 꽃이 창문을 통해 들어온다.” 샤갈은 색채의 화신이자 사랑의 메신저인 꽃을 평생 그렸다. 꿈과 사랑, 낭만, 꽃 이런 단어와 샤갈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샤갈의 고백
“10년 전에 앙드레 말로(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었음-필자 주)가 나에게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새 천장화를 그려 달라고 제안했다. 나는 고민에 빠졌고, 감동했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밤이나 낮이나 나는 오페라 하우스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건축가 가르니에의 천재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는 윗부분에서 배우와 음악가들의 창작활동을 아름다운 꿈속의 거울에 비친 것처럼 묘사하고 싶었고, 아랫부분에서는 관객들의 의상이 일렁이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이론이나 방법 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고 새처럼 자유롭게 노래하고 싶었다. 오페라와 발레의 위대한 작곡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나는 정성을 다해 작업했다. 프랑스가 아니었다면 색채도, 자유도 없었을 것이다.”
1964년 마르크 샤갈의 회고다. 나이 80이 가까워 오는 샤갈은 이미 명사였고 성공한 예술가였다. 프랑스 퐁피두 미술관을 비롯해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이스라엘, 영국, 스위스, 독일 등 15군데의 건물에 그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해 샤갈의 빛이 들어오게 하였다. 샤갈에게 프랑스는 진정한 예술가의 천국이었고, 문화의 강국이었다.
영원의 빛
1985년 3월 28일, 20세기 미술계의 거장 마르크 샤갈은 니스부근 생 폴 드 방스에서 98년에 걸친 그의 삶을 평화롭게 마감하고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 공동묘지에 묻혔다. 샤갈은 1958년 시카고 강연에서 “나는 그림을 선택했다. 나에게 그림은 빵과 마찬가지로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된다. 나에게 그림은 창문이다.
나는 그것을 통해 다른 세계로 날아간다. 인생에서나 예술에서나 모든 것이 변할 수 있다. 우리가 아무 스스럼없이 사랑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낼 때, 모든 것은 변하게 된다. 진정한 예술은 사랑 안에서 존재한다. 그것이 나의 기교이고 나의 종교이다”라고 하였다. 살아서 행복했던 샤갈은 죽어서 천상의 세계 앞으로 나아가 그가 남긴 작품으로 영원의 빛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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