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나는 마감 날짜에 글을 넘기지 못했다. 담당 기자에게는 사진 자료 핑계를 댔지만 실은 쓰려고 준비했던 대상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더욱 흥미진진한 얘기들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한 달 후 지금, 나는 마감 날짜를 코앞에 두고서야 이제야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 많고 많은 이야기 중에 무엇을 주제로 삼고 이야기를 할 것인가 결정짓는 데 며칠간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안드레아 프란케티(Andrea Franchetti). 아직 국내에서는 낯선 이름이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란케티가 포도밭을 매입한 때가 1992년이고, 90년대 말이 되어서야 첫 와인이 세상에 나왔으니, 그의 와인 이력은 아무리 쥐어짜도 20년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생산하는 와인 종류도 많지 않고, 생산하는 양 또한 많지 않다. 그렇다 보니 국내로 들여올 수 있는 수량도 매우 한정되어 있어 수입 회사도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치지 않았다. 아마 이 점을 애호가들은 은근히 좋아라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가뜩이나 없어 못 사는 와인, 경쟁자 늘어 좋을 리 없기 때문이다.프란케티의 곁에는 와인계의 쟁쟁한 친구들이 있다. 프랑스의 장-뤽 튄느방(Jean-Luc Thunevin), 스페인의 피터 시섹(Peter Sisseck) 그리고 이탈리아의 안드레아 프란케티를 가리켜 사람들은 ‘레드 와인계의 야망가 3인방’이라고 부른다.튄느방의 샤토 발랑드로(Chateau Valandrau)와 시섹의 핑구스(Pingus)는 이미 차고 와인(garage wine - 실험정신에서 태어난, 고품질의 소량 생산된 와인을 말한다. 장 뤽 튄느방의 샤토 발랑드로가 차고 와인의 효시로, 튄느방이 이 와인을 실제로 그의 차고에 최소한의 양조시설을 갖추고 만든 데에서 이름이 생겨났다)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고, 프란케티의 테누타 디 트리노로(Tenuta di Trinoro)는 슈퍼 토스카나 와인, 이탈리아 컬트 와인을 말할 때 앞서 호명되는 와인으로 빠르게 자리매김했다.프란케티와 튄느방은 어쩐지 닮은 꼴이다. 와인을 만들기 이전, 이들은 와인 교육조차 받아본 적이 없다. 레스토랑 관련 일을 한 것도 비슷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하고 싶은 점은 처음 그들이 와인을 만든 곳에서 성공을 이룬 후, 두 사내 모두 그 발걸음을 남부로 향했다는 점이다.시칠리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레드 와인용 품종은 네로 다볼라(Nero d'Avola)다. 앞선 그의 여러 행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 워낙에 도전 정신이 강한 프란케티가 남들이 이미 성공해 놓은 품종에 관심을 두었을 리 없다. 그가 승부를 본 품종은 네렐로 마스칼레제(Nerello Mascalese)로, 그는 이 품종만을 사용해 ‘파소피시아로(Passopisciaro)’를 내놓는다. 맛으로 보나 향으로 보나 어쩐지 부르고뉴의 피노 느와르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강하다.개인적인 기억으로 이 둘을 구별시켜 주는 결정적인 잣대는 신맛의 강도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와인의 진정한 맛을 느끼려면 오픈하고 이틀 후에나 맛을 보라는 거다 (특히 2006년 빈티지가 그러하단다). 그만큼 내재된 힘이 대단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 집이 아닌 식당에서 이 와인을 주문할 경우에는 반드시 디캔팅을 요청하고, 할 수만 있다면 식당 도착 전 미리 오픈 시켜 두는 것도 요령일 듯싶다. 최근 그는 샤르도네 재배도 성공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와이너리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진 테누타 디 트리노로는 벌써 레 마키올레 메소리오(Le Macciole Messorio, 최고가 이탈리아 레드 와인)와 비슷한 가격대(국내 판매가 100만 원대)에 팔리고 있다. 최근 들어 마세토(Masseto)마저 앞질러 버린 것이다. 이 와인의 세컨드 와인 격인 레 쿠폴레(Le Cupole, 국내 판매가 10만 원대)는 메를로와 카베르네 프랑을 메인 품종으로 카베르네 쇼비뇽 그리고 매년 해를 달리하며 이탈리아 토종 품종들을 불규칙적으로 사용해 만든다. 그의 토스카나산 와인을 좋아한다면, 두 와인 모두 사용하는 품종의 블랜딩 비율 차이가 매년 매우 크다는 점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멸치떼가 연상되는 라벨의 파소피시아로는 레드와 화이트 모두 올해 봄, 국내에 들어왔다. 10만 원대 초반으로 이 와인들 역시 조용히 판매되고 있다.그의 와인 경력은 줄곧 “원래 길이란 없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곧 그것이 길이 된다”라는 루쉰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프란케티의 모든 도전은 남들이 전혀 시도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시작됐고, 그때마다 내놓는 결과물은 첫 번째 도전자가 이루어 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최근 그는 시칠리아에서의 도전이 어느 정도 성과물을 내놓자 튄느방처럼 와인 컨설팅 업무를 시작했다고 한다. 다음엔 또 어디에서 무엇으로 우리를 놀래켜 줄 것인지 궁금하다. 프랑스로 건너가 이탈리아 토종 품종으로 만든 와인을 내놓진 않을까? 아니면 튄느방과 시섹을 설득해 3인방의 와인을 준비하고 있진 않을까? 아마도 지금 내가 생각해 보는 이 모든 것은 맞지 않을 가망성이 높다. 그의 행보는 늘 사람들의 일반적인 추측을 뛰어넘기 때문이다.글 김혜주 알덴테북스 대표·사진 알덴테북스, 와인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