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식집 ‘어도’ 배정철 사장

에서는 2010년 한 해 동안 아름다운 ‘중독’에 빠진 얼굴들을 만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쥬’, 그것은 가까운 곳에서, 작은 발걸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연중 무휴’. 일식집을 운영하는 배정철 사장은 또 다시 쉬는 날 없는 한 해를 보냈다. ‘먹고 살만한데 왜 그리 빠듯하게 사느냐’ 물으니 풀어내는 이야기의 실타래가 무려 3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0년에 걸쳐 기부를 하고도, 그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한다.년째 같은 이름으로 서울 논현동을 지키고 있는 일식당 ‘어도(魚島)’에 가본 사람이라면 두 가지에 반하게 된다. 일단은 혀를 호사시키는 ‘황홀한’ 회 맛 때문이요, 두 번째는 회를 뜨는 솜씨만큼이나 아름다운 배정철 사장의 ‘화끈한’ 마음 씀씀이 때문이다.“오늘도 노인분들이 단체로 식사를 하고 가셨어요. 한 달에 열 번 정도 되는데 지방분들도 모시고 싶지만 멀어서 불편하니 주로 인근에 계신 분들만 모시게 되어서 죄송할 뿐이지요.”강남의 요지에 위치한 일식당을 한 달에 수차례 드나드는 노인들은 소위 ‘부잣집 어르신들’이 아니다. 배 사장이 제공하는 ‘무료’ 식사를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 20여 년 전부터 그를 찾아오는 이 특별한 ‘손님’들은 날이 갈수록 그 수가 늘어 지금은 한 달에 300~400명에 이른다.‘어도’는 무료 식사 손님들뿐만 아니라 유명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이병헌, 김혜수, 이영애, 송혜교, 한채영, 설경구·송윤아 커플, 유동근·전인화 커플을 비롯해 임권택 감독과 봉준호 감독 등 내로라하는 영화인들과 배우들이 단골이다. 월드스타 ‘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손님. 주인장의 부탁(?)으로 일일이 이름을 거론할 순 없지만 정·재계 인사는 물론 스포츠 스타 단골도 많다.자연 ‘유명인들이 많이 오니 장사 잘돼서 좋겠다’는 얘기는 배 사장이 가장 자주 듣는 말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유명인들이 유명인을 부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어도’를 자주 찾는 것은 배 사장의 ‘특별한 DNA’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간 어려운 이웃을 위해 가게 수익금을 아낌없이 쾌척해 온 주인장의 ‘기부 중독’에 고객들은 기꺼이 감염되기를 자청한다.“젊을 때부터 아픈 날 빼곤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는데 이제는 더더욱 쉴 수가 없게 됐어요. 지난해에 1억 원을 드린 단체는 올해도 제가 1억 원을 후원할 거라 기대하고 계실 텐데 5000만 원만 드리면 운영에 차질이 생길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기부액수를 늘이면 늘였지 줄일 수는 없고, 경기는 안 좋으니 더 열심히 일해야지죠. 연중 무휴로 일을 안 할 수가 없어요(웃음).”우연히 ‘어도’를 찾았던 손님들도 기가 막히는 회 맛도 회 맛이지만, ‘어도’의 수익금 전액이 사회로 환원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꼭 다시 가게를 찾는다. 이왕 지불해야 하는 음식 값이 결국 이웃을 위해 쓰이니 시쳇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닌가.좋은 일은 입소문을 타는 데도 가속이 붙었고, 셀러브리티들의 발걸음이 잦아질수록 일식집도 유명세를 탔다. 가게를 찾는 손님 수와 기부금은 비례하니 손님이 아무리 많아도, 휴일 하루 없이 일해도 배 사장은 즐겁기만 하다. ‘어도’ 수익의 전액을, 가끔 부족하다 싶으면 주머닛돈까지 털어서 기부금을 내야 성에 찬다는 그는, 못 말리는 ‘기부 중독자’다.강남의 ‘잘나가는’ 일식집 사장이 연중 무휴로 일하며 나눔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식집에서 벌어든 수익금의 ‘전액’을 기부로 돌린다는 얘기에, 미안하지만 물음표가 남는다.“어릴 때 너무 가난하고 못 배워서 나중에 잘 살게 되면 저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꾸준히 했었죠.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어머니께서 6남매를 홀로 키우셨어요. 먹고 살려고 밭에 고구마를 심으셨는데, 수확을 하면 내다 팔아야 돈이 생길 텐데 어머니는 그것조차 삶아 동네 노인들한테 나눠 주시더라고요. 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제게 영향을 끼친 게 아닐까 싶어요.”6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에게 세상은 너무나 혹독하기만 했다. 먹고 사는 것 자체가 힘들었던 시절, 많이 배우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 가족이 살길을 찾아 상경한 뒤 열여섯 살에 불광동 일식집 주방에 취직했다. 배 사장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비염을 심하게 앓아 건강이 아주 안 좋았어요. 병원 갈 돈이 없으니 약국에서 무조건 독한 항생제만 사다 먹은 게 화근이었죠. 약이 너무 독해서 그런지 두통도 심하고 기억력이 감퇴하더라고요. 주방에서 선배들한테 맞기도 많이 맞았어요. ‘장국 떠오라’고 했는데 저는 금세 까먹고 엄한 걸 하고 있는 일이 다반사였거든요.”청소만 하다가 생선도 다듬고, 매운탕도 끓이며 주방에서의 역할은 시간이 갈수록 한 계단씩 올라간데 반해 그의 어깨는 하루하루 짓누르는 삶의 무게로 점점 아래로 처지고 있었다. 손으로 콧등을 누르면 고름이 한움큼씩 떨어질 정도로 비염이 악화됐지만, 수술은 엄두조차 못내는 삶은, 힘들다 못해 지겨웠다. ‘절망’은 ‘희망’을 품기도 전에 한 청년을 무서운 속도로 망가뜨리고 있었다.“자살하려고 결심하고 이 약국 저 약국을 돌며 수면제를 모았어요. 그래도 고통 없이 깨끗하게 죽고 싶더라고요(웃음). 의정부 단칸 월세방에 어머니랑 단 둘이 살던 때였어요. 하루는 새벽녘에 울음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어머니께서 ‘돈이 없어 자식 수술조차 못시키니 제발 자식 병이 낫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계시더라고요. 울음 섞인 어머니 기도소리에 딱 3년만 더 살다 죽자고 마음을 바꿨죠. 100만 원만 모아서 드리면 저 없이도 어머니께서 한동안은 편히 지내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100만 원을 모아야 했으니 일단 학교 대신 다닌 일식집에서 3년간 번 돈 30만 원으로 비염 수술부터 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 365일 일했다. 뼈가 부서져라 3년을 일하니 정말로 100만 원이 모였고, 돈이 모이자 결코 보이지 않을 것 같던 ‘희망’도 꿈틀거리며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앞만 보며 달리던 어느 날 가방 한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수면제는 시간이 너무 지나 절로 가루가 돼 있었다.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남자에게 홀어머니는 영원한 숙제였다. 서울에 살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 배우자를 구하려면 적어도 집 한 채는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는 30대 이전에 ‘내 집 장만’의 새로운 목표를 세운다.“10년 쯤 되니까 주방장이 되고 돈도 벌렸죠. 스물일곱에 단독주택도 사고 이후에 결혼도 했어요. 제가 공부를 완전히 포기한 것과 반대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검정고시를 치고 대학까지 진학한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한데 입버릇처럼 ‘너는 공부로 성공해라. 나는 일로 성공해서 마흔 전에 빌딩을 하나 살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 꿈이 결국 이뤄졌습니다. 18년 전에 장사가 너무 안 돼 문 닫기 일보직전의 ‘어도’를 빚을 떠안고 인수했는데, 6개월 만에 빚도 갚고 장사 잘되는 일식집으로 만들었고, 결국 건물도 하나 장만했죠. 이 모든 것이 제가 가진 것을 나누는 만큼 손님들께서 저한테 보이지 않는 복을 보내주셨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건물 하나 장만해 뒀으니 가족이 먹고 사는 데에 걱정은 없다. 그러니 기부를 하는 마음도 한결 가볍다. 하지만 제사 365일을 꼬박 일하는 가장은 그 흔한 해외여행 한번 가지 못하는 것이 늘 미안하다. 일식집 문을 닫고 귀가하는 시간은 늘 새벽. 노모와 아내, 세 아이들에게 그는 일상의 대화를 대신하는 편지를 매일같이 쓴다. 단골손님들에게 1년에 적어도 세 번은 친필 엽서를 보내며 마음을 전하던 그다. 한창 편지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배 사장이 한 묶음의 편지를 내밀었다. 보낸 이의 주소지를 살펴보니 저 멀리 전라도 장성고등학교 학생들이 배 사장에게 보낸 편지들이다.“검정고시 봐서 대학 진학했던 제 친구는 선생님이 되었죠. 현재 장성고등학교에 재직 중인데 제 얘기를 듣고 학교에 장학금을 지원해줄 수 있겠냐고 하더라고요. 고향에 있는 장성고와 선재고, 순천 효천고에 장학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보내온 편지에 담긴 감사의 마음을 사회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베풀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웃음).”배 사장의 ‘선행’은 장사하고 남은 생선으로 죽을 쑤어 노인들 식사를 대접하던 작은 일에서 출발했다. 그 나눔은 죽에서 부식 지원으로, 부식에서 서울대병원 소아성형외과와 순천향병원 불우환자 치료비 후원으로, 고향 고등학교의 장학금으로 발전했다. 기부액 역시도 10년이란 세월만큼이나 자랐다. 애초에는 손님의 음식 값에서 1000원씩 떼어서 했지만, 지금은 일식집 수익금의 전액이 고스란히 기부금이 된다. 그의 기부를 계기로 서울대병원 의사들이 만든 ‘함춘후원회’에는 3년째 1억 원 이상의 기부금이 전달됐다. 지금은 ‘어도’를 통한 한 해 기부금 총액이 4억~5억 원에 이른다.“기부의 좋은 점은 고객과 감동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거예요. 저희 가게 손님들은 저를 ‘자기 혼자 먹고 사는 사람’으로 보시지 않거든요.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이 갖춰진 자만이 남을 도울 수 있는 건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배 사장의 남은 꿈은 지금껏 그래왔듯 주인이 누가 되든 ‘어도’의 수익금이 꾸준히 사회에 환원되도록 시스템을 갖추는 것. 이를 위해 마흔 여덟인 그는 쉰이 될 때 과감히 주방장 앞치마를 벗고 ‘어도’의 경영에 치중할 생각이다. 명품 시계 하나 없어도 사람들은 그를 ‘없는 자’로 보지 않는다. ‘강남 스타일’의 세련된 인테리어가 없는 일식집 ‘어도’도 결코 궁색해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칼질로 굳은살이 베인 그의 손이 명품 시계로 치장한 손보다 더 아름다워 보임에 가슴 한켠이 데워져왔다.글 장헌주·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