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韓服)이 제대로 ‘성장(盛裝)’되기를 꿈꾸며
한복 짓는 사람이라고 한복만 입고 지내는 것은 아니다. 한복 숍이라고 전통 느낌 물씬 풍기는 수묵화만 걸어두는 것도 아니다. ‘전통한복 김영석’ 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는 앤디 워홀의 작품이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워홀의 ‘섹시한 엘비스 프레슬리’에 취해 있을 때, 그만큼이나 매력적인 주인장이 나타나니, 바로 한복 짓는 남자 김영석이었다.곳이 저한테는 직장이잖아요. 그저 한복집, 이불집 주인인 걸요. 제 의식이 깨어있는 시간이니 손님이 있든 없든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옆에 두고 싶어요. 그렇다고 고정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워홀 작품을 저렇게 두다가도 지겨워지면 가차 없이 치워버리거든요(웃음).”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지하에 자리한 ‘傳統韓服 김영석’에서 만난 한복 디자이너 김영석, 그에게 정체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한복 디자이너에게 ‘전통’이란 떨칠 수 없는 화두요, 유리(遊離)될 수 없는 숙제일 터. 하지만 ‘조선시대’와 ‘앤디 워홀’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의 생각의 스펙트럼은 짧았다 길어지고, 길어졌다 다시 짧아졌던 저고리 고름마냥 변화무쌍하다.우리 전통색인 ‘오방색(청, 적, 황, 백, 흑)’과의 사랑에 푹 빠진 디자이너 김영석은 빛깔 고운 한복으로 유명하다. 흰색에 가까운 ‘소색(消色)’ 한 가지만으로도 조끼와 마고자, 두루마기까지 지어 내놓는 그만의 색채는 농익은 복숭아 빛마냥 탐스럽다.“사실 한복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일을 했었죠. 이벤트 기획자였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완전히 동떨어진 일이라고도 보기 힘드네요. 어쨌든 한복 쇼도 이벤트니까요. 10년 만에 여기까지 온 것에 감사하지만 빨리 온 만큼 힘들었어요. 처음 3년 정도는 정말 힘들었는데 힘든 티를 전혀 내지 않았더니 사람들이 아버지 잘 만난 거라 생각하더라고요(웃음).”꼭 10년 전인 1999년. ‘전통한복 김영석’은 삼청동 거리 한켠에 소담한 한복집으로 출발했다. 서른 중반, 남자의 변신 치고는 좀 과감하다. 무슨 일을 했든, 마흔을 바라보는 서른 중턱에 디자이너가, 그것도 한복 디자이너가 된다는 것은 어쨌든 흔치 않은 일이다.“처음에는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해보겠다는 생각이었죠. 삼청동이 좋았고 거기에 제가 하고 싶은 한복집을 열었던 거예요. 손님이 온다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어느날 모녀가 지나가다 한복집이 하도 예뻐서 들렀다며 들어왔어요. 그 모녀의 옷이 제 이름으로 만든 첫 작품이었죠.”그렇게 시작된 작은 발걸음이 지금처럼 큰 울림이 될 줄은 몰랐다. 비록 출발은 한참을 늦었지만 5년 만에 ‘김영석’이란 이름 석 자를 확실히 알렸고, 입소문은 또 다른 입소문을 낳으며 성장에도 가속이 붙었다. 지난 가을, 가회동 한옥에서 마련된 한복 디자이너로서의 10주년을 기념하는 한복 쇼는 프레스를 대상으로 한 1부에 이어 VIP 고객들만을 위한 2부 쇼가 따로 마련될 정도였다.삼청동의 정든 ‘한복집’이 호텔의 ‘한복 숍’으로 바뀐 것은 4년 전. 입소문 난 한복 디자이너는 신라호텔의 ‘러브콜’을 받았다. 내로라하는 해외 명품 브랜드숍이 들어선 호텔 지하 1층에서 그의 한복 숍은 단연 ‘튄다’. 한복이기 때문이다. ‘핸드메이드’ 대열에서 결코 빠지지 않을 우리 옷, 디자이너 김영석은 호텔에서 ‘한복’을 짓는다.한복 디자이너 김영석은 현대家의 며느리가 된 노현정 아나운서의 결혼 혼례복 맞춤을 비롯해 VIP 고객이 많기로 유명하다.“제 한복이 가장 어울리는 분이요? 심은하 씨가 그랬던 것 같아요. 아기 돌 때 옷을 해 드렸는데 워낙에 얼굴 생김이 맑고 순수하니 어떤 색을 입혀도 색이 살고 예쁘더라고요.”영부인 김윤옥 여사 역시 그의 오랜 단골이다. 김 여사가 영부인이 되기 전부터 결혼식 등 가족행사를 위한 한복을 만들었던 것이 인연이 됐다. 그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져, 영부인의 해외 순방이나 국제행사가 있을라치면 그도 덩달아 바빠진다.“톡톡 튀는 것보다는 은은한 스타일을 요구하시는데, 블루 계통 색상을 좋아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영부인의 한복은 참석하시는 행사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요. 광복절 같은 경축일은 노랑색 계통을 넣지만, 4·19 기념일 같은 경우엔 차분한 색인 회색 계열이 낫죠. 지난번 영국에서 열린 국제행사(G20 정상회담)때 제가 해드린 한복을 입으셨는데, 평소 입으시던 옷보다 화려한 색상으로 준비해 드렸죠. 전 세계 영부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사진촬영을 할 때 옷이 예뻐서 가운데 앉으셨단 얘기를 들었을 때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만든 사람도, 입은 사람도, 또한 그 얘기를 듣는 사람도 기분 좋아지는 ‘문화 외교’가 아닐 수 없다. G20 정상회담에서의 ‘인기’가 한몫을 했기 때문인지 그는 오는 1월 24일로 예정된 이명박 대통령 내외의 인도 방문 때도 한복을 짓게 됐다. 지난 가을 10주년 기념 한복 쇼를 가진 직후 현지 한인회가 주최한 ‘한인의 날’ 행사로 이미 한복 쇼를 가진 인도 뉴델리에서 그는 대통령의 방문에 맞춰 다시 한 번 한복을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첫 쇼에서 인도 문화부장관의 극찬을 받았던 터라 이번 쇼를 준비함에 있어서도 긴장을 늦출 순 없다.“사실은 지금 대통령을 비롯해 외국에 나가는 국빈급 인사들의 한복을 위한 원단을 제작 중입니다. 그런 분들이 입고 나가는 옷은 보이지 않는 문화적 외교라고 생각하거든요. 한국적인 특별함을 보여주기 위해 지폐 속에 등장하는 세종대왕, 신사임당 같은 인물들과 훈민정음 문자 등이 아주 고급스러운 모티브가 될 겁니다. 마무리 작업이 한창인데 신임 영국대사의 현지 취임식 때 입을 옷에 아마도 처음 사용할 것 같아요.”여자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 색을 쓸 줄 아는 남자, 한복에 민족적 자존심을 담을 줄 아는 남자, 디자이너 김영석이다.“어릴 적 꿈은 고아원을 짓는 거였어요. 아직도 가슴 속에 남아있긴 하지만 지금 시작하기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어요. 자식을 키워본 적 없는 제가 과연 어떻게 해나가야 하나…. 입양을 생각한 적도 많은데 저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도 어려운 문제죠. 그런데 꿈은 항상 진행형이에요. 제가 죽을 때 꿈도 끝나는 거겠죠.”어릴 적 할머니의 광에서 자투리 천 조작들을 발견하며 무한 행복감에 빠졌던 아이는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물건이 없어질라치면 무조건 의심을 받아야했던 학교 근처 고아원 아이들이 이유 없이 측은했다. 왠지 고아원 아이들이 가져가지 않았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우연찮게 시작한 시골살이 때 집에서 운영하던 연탄공장에 쌓여있던 연탄이 폭우로 모조리 부서져 먹물처럼 밭을 온통 물들였을 때 안타깝고 억울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서였을까. 학교 옆 고아원 아이들의 편에 서고 싶은 마음은 그의 꿈이 되었다. 고아원에의 꿈은 아직 미완으로 남아있지만 그가 살아오며 꾼 꿈들은 대부분 이뤄졌다. 이유는 꿈이 ‘소박했기 때문’이다.“20대엔 삼청동이 무작정 좋아 그곳에 있고 싶었어요. 6년이나 삼청동에 있었으니 그 시간은 아주 행복했죠. 처음 3년간은 일요일에도 쉰 적이 없어요. 삼청동에 있는 것 자체가 좋았거든요. 제사 지내는 명절 이틀을 뺀 363일을 일했죠. 밤늦게까지 칠흙 같은 어둠 속에 혼자 앉아 있다가 쇼윈도 너머 지나가던 관광객과 눈이 마주치면 서로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죠.”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그저 행복했던 시간.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삶에도, 일에도 되도록 ‘공간’을 많이 두고 싶어졌다. 마흔을 바라보는 ‘고개’를 넘을 때 시작한 한복이지만 애초부터 평생토록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가능성을 열어둔 삶은 그래서 쉼표도 있고, 급할 것이 없다.“제 삶은 백색이 아닐까 싶어요.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백색 말이죠. 하얀 벽 속에 매화가 피어 있으면 멀리서 보면 백색에 꽃이 묻어나는 것처럼 보이죠? 그런 삶이랄까요?(웃음)”하지만 보일 듯 보이지 않게 묻어나는 삶 속에서 그는 디자이너로서 굵직한 자국 하나를 내고야 말 것 같다. 기모노 못지않게 ‘제대로’ 차려 입는 우리 한복의 ‘성장(盛裝)’, 그 전통을 살려내겠단 욕심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한국 전통인형 작가이자 한복 연구가로 한국 한복계의 ‘전설’로 남은 故 허영 선생이 만들던 전통 인형의 맥을 잇고 싶은 욕심도 있다.“할 수 있다면 허영 선생 유작전을 마련하고 싶어요.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전통 인형이 있는데 우리는 이렇다 할 인형이 없어요. 인형에는 옷을 입혀야 하니 전통 인형을 가지고 해외로 나가서 전시회를 하면 자연스럽게 우리 전통의상도 알릴 수 있거든요. 모델에, 스태프에 엄청난 인원과 자본이 동원되는 한복 쇼보다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저 혼자 다시 출발하라고 하면 힘들겠지만 허영 선생께서 해 놓으신 것을 이어 발전시킨다면 결코 어렵지 않겠죠.”그런데 이 한복 짓는 남자는 ‘거짓말’을 했다. ‘한복은 평생 할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지 않았나. 디자이너 김영석은 소색의 담백한 빛깔로 열 폭 치마처럼 움직일 때마다 우리 곁에서 잔잔한 바람을 일으킬 것 같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