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세기 후에도 움직일 시계를 위하여
‘Divined Gift’.‘신이 주신 선물’이라고까지 칭송되는 스위스 하이엔드 워치 메이커‘미셸 파르미지아니(Michel Parmigiani)’. 자신의 이름으로 시계를 세상에 내놓은 지 35년 만에 세계 3대 마스터 워치 메이커로 부상한 기린아가 궁금하다. 최근 한국을 찾은 그에게 시계 얘기를 꺼냈을 때 그는 ‘자연‘과 ‘우주’란 주제부터 풀어냈다. 450년 시계 역사가 담긴 그의 시계는 분명 ‘소우주’다.앤티크가 인기를 모으면서 ‘복원(Resto -ration)’도 일종의 유행이 됐다. 과거의 것을 그 시절 그대로 고스란히 돌려놓는다는 것은, 어쩌면 과거를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작업이다. 시계의 복원은 몇 가지 부품을 교체해 기능만을 되돌려 놓는 ‘수리(Repair)’와 달리 시계가 탄생한 시기의 시대성과 장인의 철학까지 통째로 이해하고, 때론 자기 자신을 역사 속으로 던지는 시대와 시간을 초월하는 타임리스(Timeless)한 일이다.“과거로부터의 유산을 복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미래로 접근할 수 있는 열쇠를 가졌다고 믿습니다. 과거의 오래된 시계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지난 450년의 시계 역사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앤티크 시계가 가진 비밀을 밝히는 것은 매우 박진감 넘치고 유익한 일이죠. 시계 하나에도 역사와 과학, 수학 등 많은 놀라운 요소들이 들어있기 때문이지요.”오래된 시계를 복원하는 일을 가리켜 ‘죽은 사람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것’같다고 말하는 미셸 파르미지아니. 그는 현존하는 3대 시계 명장(캐비노티에; Cavinotiers) 가운에 한 명(Michel Parmigiani, Francois-Paul Journe, Antoine Preziuso가 그들이다)으로 원래는 시계 복원사였다. 그는 1950년 12월 스위스 꾸베(Covet)라는 외딴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매혹적인 자연 경관을 접하며 성장한 그는 어릴 적부터 시계 장인들의 작업현장에 흥미를 가졌다. 기계공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생긴 수공업에 대한 관심과 장인들로부터 간접적으로 얻은 경험은 그를 훗날 시계 장인으로 성장시키는 데 있어 자양분이 됐고, 시계는 물론 바이올린까지 만들게 됐다. 다른 워치 메이커들과 달리 파르미지아니는 수공예의 자유로움을 미술은 물론 천문, 음악 분야에까지 접목시켰다. 스위스 시계학교 교장들이 파르미지아니의 천부적인 재능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음은 물론이다.450여년의 역사를 오가는 시계 복원은 그의 명성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같은 지역 시계 선인들과 복원작업을 함께 하기에 이르렀는데, 천문시계의 복원작업 마무리 단계를 진행하게 되면서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지식과 경험을 안게 된다. 시계 복원사로 활동한 10년간 그의 손을 거쳐 간 것은 시계라기보다 ‘역사’였다. 기능은 기본이요, 시계가 가지는 예술적 가치(Object D’art)까지 몇 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살아 숨쉬게 됐다.1975년, ‘복원의 천재’는 쉽지 않은 결정을 했다. 스위스 시계 산업이 어려운 국면에 처해있던 시기, 아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파르미지아니의 이름을 단 회사를 설립한 것. ‘시간예술로의 여행(Parmigiani Mesure et Art du Temps)’ 이라는 회사를 통해 복원사이자 개인 컬렉션을 만드는 독립 워치 메이커로 부상하면서 ‘르 로끌 박물관협회(Musee des Monts at Le Locle)’로부터 공식 시계 복원사로도 인정받게 됐기 때문이다.“어릴 때부터 훌륭한 시계장인들 틈에서 자랐습니다. 자연스럽게 시계 복원사업에 흥미를 느끼게 됐죠. Parmigiani Mesure et Art du Temps을 설립한 지 20년이 될 때 제 고객이자 글로벌 제약기업인 산도스 재단(Sandoz Family Foundation)의 믿음이 더해져 ‘파르미지아니 플리에르(Parmigiani Fleurier)’라는 독자적인 브랜드를 론칭하게 됐습니다.”파르미지아니 플리에르가 출범하면서 회사의 덩치는 커졌다지만 그는 아직 시계 복원사로서 ‘시간과의 싸움’을 즐기는 중이다. 길게는 1만 시간이 소요되는 지난한 과정에는 기술력과 함께 미술가, 음악가, 수학자, 천문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로서의 관점에서 이미 없어진 시계 분해도를 상상하는 원천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시계를 해체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 시계 내부에 있던 같은 크기의 톱니바퀴를 만들 수 있는지, 휠과 파트를 복원할 수 있는지, 섬세한 에나멜 손상부분의 색채와 광채를 살릴 수 있는지, 보석 피니싱(Finishing)기술을 재현할 수 있는지 등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연구가 뒤따른다.“복원한 시계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현재 밀라노에 있는 카스텔로 스포르제스코 뒤코뮨(Castello Sforzesco Ducommun)이 1817년에 제작한 태양 행성 천문시계인 ‘플라네테르(Planetaire)’였어요. 태양과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태양 행성운동을 나타내는 투영기로 각각 복잡한 톱니바퀴를 조합해 각 행성의 시 운동을 재현하는 시계였는데, 그야말로 도전이었죠. ‘플라네테르’ 같은 시계는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죠. 시계 내부를 정확히 추측하기도 쉽지 않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무덤에 묻혀 있다가 도굴꾼이 도굴한 시계라 습기, 온도 변화로 시계 부품들이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손상돼 있었어요. 복원하는 데만 꼬박 1여년이 걸렸는데 그만큼 감동은 컸어요.”설계도가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복원가는 최초의 금속 벽시계가 만들어진 16세기부터 이후 450년간의 문화와 역사를 모두 꿰뚫어야 한다. 시대마다 시계를 만드는 원칙과 트렌드가 있기 때문. 하지만 세계 유수의 박물관에 망가진 채로 ‘멈춰진’ 시각을 가리키던 시계들이 그의 손을 통해 생명력을 얻었으니 장인의 손은 충분한 역사적 가치를 창조하고 있는 셈이다.‘파텍 필립’의 벽시계와 탁상시계, 포켓시계, 사냥용 시계, 꽃병시계, 새장 또는 노래하는 새와 권총을 쏘는 시계 등이 멈췄던 시간 속에서 튀어 나와 2009년 현재를 살고 있는 주인공들이다.그런데 100년을 훌쩍 넘는 시계명장 가문이 즐비한 ‘시계 강국’ 스위스에서 이제 갓 서른 중반의 청년격인 파르미지아니 시계가 ‘신흥명품’으로 시계 마니아들의 손에 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파르미지아니는 부품에 장착된 무브먼트, 다이얼, 케이스, 핸즈(시계 바늘), 생산까지 100% 독자적인 생산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2009년 현재 남성 컬렉션 10종과 여성 컬렉션 8종을 생산하고 있는데 파르미지아니의 전 컬렉션의 타이틀은 시간을 재는 최소 단위인 칼파(Kalpa)로 표현됩니다. 최고의 정밀성을 담아내려는 노력이죠.”시계 복원작업을 통해 축적된 노하우와 경험을 담은 파르미지아니의 시계는 불특정 다수의 고객을 원치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시계를 꼽자면 톱10 안에 파르미지아니 시계가 등장하는 이유다.‘토릭 웨스트민스터 투르비용 & 미니 리피터’는 국내 론칭가격이 10억3000만 원에 이르렀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종소리를 그대로 구현한 이 시계는 4개의 공(Gong)이 각각 다른 4가지 소리를 내면서 15분 간격, 1분 간격, 1초 간격으로 소리를 들려주는, 고난도 기술이 적용된 시계다. 세계적인 슈퍼카 ‘부가티(Bugatti)’와 5년의 공동개발 끝에 탄생한 ‘부가티 타입 370’ 역시 가격과 스타일 면에서 세계적인 화두가 됐던 모델. 한화 4억 원 상당, 단 10개만 생산된 한정판으로 마치 손목 위에 ‘시스루(See through)’ 자동차 엔진이 있는 듯한 모습을 떠올리는 모델이다. ‘부가티’ 모델에 들어간 부품 하나하나는 100% 인하우스 작업장에서 직접 제작됐는데, 시계 제조가 자동차 세계와 만나 완전히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토릭 웨스트민스터 뚜르비용 & 미니 리피터’는 영국의 팝스타 엘튼 존이, ‘부가티 370’은 세계적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처음 착용해 세계적인 이목을 집중시켰다.스위스에서 태어나 시계 만드는 일을 배우고, 명장들의 시계를 복원하고, 결국 자신의 이름을 단 매스터피스를 생산하게 된 일련의 과정은, 어쩌면 미셸 파르미지아니에겐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한정판으로 만드는 시계들 역시 그 ‘운명의 시간’을 따르고 있는지도 또 모른다. 몇 세기가 지나도 시곗바늘을 움직이고 있을 파르미지아니를 위해.©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