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고급 포도주 시장의 한 축을 이루는 보르도 와인. 보르도 지방에서 생산하는 와인은 가론 강과 도르도뉴 강이 합류해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가는 지롱드 강이 젖줄이다. 유명 와인 산지로는 메도크, 그라브, 생테밀리옹, 소테른-바르삭 등을 꼽는다.보르도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아버지에서 자식으로 대를 물려 와인을 생산해왔다. 이 같은 전통에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긴 안목으로 포도밭과 그에 딸린 샤토와 양조장에 투자하는 새로운 투자자들이 나타난 것이다.보르도 지방의 새로운 투자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기업이나 개인사업자가 투자 목적으로 와인 사업에 뛰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로 개인이 포도밭을 직접 가꾸고 와인을 만드는 경우이다. 주인 데모크라트 씨 내외는 은퇴 후 보르도 지방에 둥지를 튼 케이스다. 2008년 포도밭과 주택을 매입한 2년째 와인을 만들고 있다. 이들 내외는 15C부터 와인과 인연을 맺은 덕에 젊어서부터 와인에 관심이 많았다. 이들 부부는 나이가 들면 와인을 만들겠다는 은퇴 후의 목표를 위해 젊음을 불살랐다. 지금 경작하는 9헥타르의 포도밭과 양조장 등은 그 보상이다.현재 포도밭에는 25~100년생 포도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포도나무의 80%가 메를로이고, 나머지 20%는 카베르네 쇼비뇽이다. 새 주인을 맞기 전까지 버려진 헛간이 현재는 훌륭한 양조장으로 변신했다. 주인 내외는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데만도 약 50만 유로가 들었다고 했다.부부는 사람을 고용하는 것보다 직접 포도나무를 가꾸고, 양조하는 방법을 택했다. 양조장 시설도 두 내외가 손수 할 수 있도록 초점을 맞추었다. 두 내외는 대학에서 오놀로그(와인 메이커) 학위를 따는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다.손수 빚은 와인을 내놓으며 남편 데모크라트 씨는 과일 맛이 나는 게 Domaine de Saint Amand 와인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지금의 포도밭을 선택한 이유도 과일 맛을 내는 토양을 가졌다는 점 때문이다. 그 덕에 지난해 병입하자마자 20%의 와인이 팔려나갔다.“전통적인 보르도와인은 바릭에서 오랫동안 숙성되어 나무 냄새가 나는 게 특징이지만, 저희는 그런 맛은 최소화하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과일향이 나는 와인을 더 좋아해서, 그런 와인을 만들려고 합니다.”Chateau Biac 샤토 비악은 문헌의 기록만으로도 2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곳이다. 포도밭 한가운데 들어선 성의 뜰 앞에 서면 포도밭 너머로 유유히 흐르는 가론 강의 풍경이 펼쳐진다. 가론 강이 범람을 거듭하며 실어 나른 다양한 토양이 샤토 비악의 포도나무를 키우고 있다. 이런 이유로 지역에서는 샤토 비악을 ‘작은 보석 같은 곳’으로 불려왔다.보르도의 작은 보석 샤토 비악은 지난 2006년 새로운 주인을 맞았다. 영국의 은행가 윰나 아설리 부부가 그들이다. 이들 부부가 샤토 비악을 구입한 배경은 다소 로맨틱하다. 막내가 대학에 들어간 후 아내가 이젠 휴가를 달라며, 세계여행을 떠나겠노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아설리 씨는 아내와 떨어져있기 싫어서 평소에 눈여겨봐 둔 샤토 비악을 선물한 것.“샤토 비악을 사준 후 크리스마스 선물이 달아졌어요. 보석이나 스카프에서 큐브나 포도밭에 필요한 트랙터 같은 걸로 바뀌었죠. 혹시 ‘백만장자가 되는 법’을 아세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억만장자가 된 후 백만장자가 될 때까지 계속 쓰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와인 투자는 백만장자가 되기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는 은행가다. 은행가다운 사업성 검토가 없을 리 없다. 구매 전 무통 로췰드의 전문가를 불러 포도밭 토양을 분석하고, 어떤 와인을 생산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도 세운 것도 그 일환이다.“와인 생산자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싼 가격에 많이 팔 것이냐, 10년 이상을 보고 최고의 와인을 생산할 것이냐죠. 저희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올해는 우박으로 레드와인의 65%를 손해 봤습니다. 그렇지만 품질이 좋아서 2009년 빈티지에 많은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현재 샤토 비악은 9헥타르의 밭에서 포도가 자라고 있다. 와인은 레드와인이 90%, 스위트와인이 10%를 차지한다.Chateau Fleur de Piaut 보르도와인은 바릭의 향이 짙게 밴 레드 와인으로 대표된다. 그런 의미에서 소테른-바르삭 지역은 보르도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레드 와인이 아닌 스위트 와인 생산지로 이름이 높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특히 여성들이 많이 찾는 와인이 소테른-바르삭 와인이다.알베릭 플로리쏜 씨는 소테른에서 만난 와인 메이커다. 총 5헥타르에 이르는 그의 포도밭에서는 스위트와인 2.5헥타르, 레드와인 1.5헥타르, 화이트와인 1헥타르가 자라고 있다.농부가 되기 이전 그는 은행에서 일하던 화이트 칼라였다. 고객의 부동산 등을 대신 매입해주는, 일종의 프라이빗 뱅커였다. 인생의 전환점은 은행 소유주가 바뀌면서 찾아왔다. 새로운 경영진이 그에게 다른 업무를 제안한 것. 전직을 고민하던 그는 고향 인근에 포도밭을 찾았다. 할아버지가 포도밭을 소유한 적이 있어, 전혀 인연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포도밭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어요. 개인적으로 스위트 와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죠. 할아버지도 화이트 와인을 만드셨지 스위트 와인을 하신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양조장을 갖춘 포도밭을 구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러다 이곳을 만났고, ‘미친 척하고 한 번 해보자’하고 덤벼든 거죠.”포도밭을 구입하고 제일 먼저 질 나쁜 포도나무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새 포도나무를 심었다. 오래된 나무가 스위트와인 생산에 좋다는 속설이 있지만 그는 이를 무시했다. 새 포도나무를 심으면서 그는 ‘덜 단 스위트 와인을 만들어보자’고 마음먹었다.스위트와인은 생산비가 많이 드는 반면 생산량이 적다. 그래서 비교적 고가에 팔린다. 고가이면서 고정적인 구매처가 있어 스위트와인은 경기흐름을 크게 타지 않는 장점이 있다. 그래도 아직은 갈 길이 멀다고 했다.“예전에는 은행직원들이 모두 친구였지만 지금은 다 적 같아요. 그만큼 어려워요. 와인을 생산하는 자체는 재밌지만 경제적인 것을 고려하면 쉬운 일은 아닌 듯해요.”Chateau Faugeres 샹테 밀리옹 지역에 자리 잡은 샤토 포제는 총 80헥타르에 이르는 포도밭을 갖고 있다. 한 쪽 포도밭에는 오래된 고성이, 다른 한 쪽에는 모던 형식의 와이너리가 드넓은 포도밭은 내려다보고 있다.샤토 포제의 역사는 1823년부터 시작된다. 99% 레드와인을 생산하는 이곳은 그동안 주인이 몇 번 바뀌었고, 2005년 스위스 출신의 사업가 실비오 덴츠가 인수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대단한 와인 애호가인 덴츠 씨는 이곳 말고도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포도밭을 갖고 있다.샤토 포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모던한 느낌의 와인너리가 눈에 들어온다. 2007년 공사를 시작해 올 9월 완공한 이곳은 스위스의 유명한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를 맡았다. 마이로 보타는 삼성 리움 미술관을 설계한 세계적인 건축가. 새로운 와이너리의 설계에서 완공까지 800만 유로가 들었다고 한다. 그가 설계한 새 와이너리에는 양질의 레드와인이 숙성되고 있다. 이렇게 생산되는 와인은 퍼스트 클래스로 연간 1만2000병에 이른다.샤토 포제에서는 ‘샤토 포제’와 ‘오트 포제’, ‘페비’ 등 세 라인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이중 관심을 끈 것은 여러 지역의 메를로를 블랜딩해서 만든 페비이다. ‘페비’는 전 소유주 남편의 애칭에서 유래했다. 미망인이 죽은 남편을 유지에 따라 최고의 와인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만든 것이 페비였다.1997년부터 샤토 포제의 관리를 담당한 알랭 씨는 “올해 메를로가 아주 좋다”며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보르도 와인은 2000년과 2005년이 포도품질이 좋아 그해 빈티지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알랭 씨는 적어도 2009년 빈티지가 2005년에 버금갈 거라고 내다봤다.Chateau D'Agassac 메독은 보르도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최고급 와인을 생산하는 산지이다. 지롱드 강 하류에 남북으로 길게 80km에 걸쳐 넓게 조성된 와인 산지이다. 메독은 라틴어 ‘Medio aquae(물과 물 사이)’에서 유래한 말로 지롱드 강과 대서양 사이 ‘중간에 있는 땅’이라는 의미다.샤토 다가삭은 메독 지역에 속한 곳으로, 김주혁 주연의 드라마 ‘떼루아'의 촬영지로도 유명세를 치렀다. 샤토는 13세기 건축물로 고성이다. 군사적 목적의 성이 포도밭을 거느리게 된 것은 18세기 무렵이다. 메독지역 전체에 포도밭이 성행하면서 샤토 다가삭의 와인 역사도 비로소 시작되었다.여러 번의 손바뀜 후 1996년 보험사인 그루파마(Groupama)가 구입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금융회사들이 수익의 일부를 부동산 등 안전자산에 투자하게 되어있다. 그루파마도 위험 헤지의 수단으로 샤토 다가삭을 구입했다. 그러나 그루파마는 안전자산에도 일정 이상의 수익을 거두기를 원했다. 그 결과 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해 숙박과 비즈니스센터로 뿐만 아니라 와인의 품질 향상을 위해 포도밭과 와이너리에도 투자를 감행했다. 샤토 다가삭 홍보담당자 장-뤽 웰 씨는 “샤토 다가삭이 샤토 투자에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설명했다.“와이너리를 지을 때도 주변 환경과 어울리는, 친환경적 건물을 지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양조장의 폐수, 폐기물 처리에도 신경을 많아 썼고요. 그 결과 현재는 샤토 다가삭의 브랜드 가치도 많이 올랐고, 지가도 많이 상승했습니다. 요즘에는 저희 경우를 보고 관리가 잘 안된 샤토를 사서 개발하려는 투자자들이 많이 늘었습니다.”레드와인이 주종인 샤토 다가삭은 한 해 25만 병을 생산한다. 그중 1만 병이 한국에서 소비되고 있다.신규섭 기자 wawoo@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