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kor Wat,Cambodia
태국 국경에서 먼지 폴폴 피어오르는 비포장 길을 내달리기를 7시간. 끝날 것 같지 않던 지루한 여정은 베이스캠프 시엠립에 이르러서야 문명과 역동성, 희망에 찬 삶의 모습으로 여행자의 피로를 달래준다. 인도차이나 중앙평야에 우뚝 서 있는 이 고대 왕국의 유적에는 물과 햇빛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맑은 물에 투영되어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이곳은 파란 많은 역사와 함께 감동과 수수께끼를 동시에 던져주는 곳이다. 태국의 골든 트라이앵글을 제외하고는 인도차이나 반도 내의 최고 여행지라 할 수 있다. 무려 600여 년 간(790~1432년) 캄보디아를 통치한 크메르 왕국의 절대군주들은 죽은 후 신과 합체한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에 앙코르 부근에 많은 신전과 사원을 건설했다.캄보디아는 아픔을 겪은 날들이 많은 나라다. 이곳 앙코르 와트 유적지에 당도하면 그 아픔의 흔적을 이곳저곳에서 많이도 발견하게 된다. 천년 이상을 밀림에 의해 외부와 차단된 채 버텨온 앙코르 유적지는 그런 아픔을 이겨내 온 캄보디아 인들의 강인한 국민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오랜 인고의 세월 끝에 빛을 발하는 앙코르 유적. 캄보디아 인들은 이곳을 그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한다. 자랑스러운 문화유적을 가졌다는 뿌듯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때 동남아시아를 지배했던 크메르 제국의 영광에 대한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상처가 많은 이 나라에 오늘날 앙코르 유적은 그들의 지치고 고단한 삶에 신이 주신 위로의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신비의 베일은 1859년에 프랑스의 고고학자 앙리무오가 캄보디아 톤레삽 호수 근처의 유적에 관한 책을 읽고 깊은 호기심을 갖게 되면서부터 하나 둘 벗겨지기 시작한다. 그는 네 번에 걸쳐 인도차이나 반도를 탐험했는데 1861년의 두 번째 탐험에서 밀림 속의 앙코르 유적을 발견하게 된다. 그 당시 톤레삽 호수가 있는 시엠립은 태국 영토였다. 시엠립은 1907년에 다시 캄보디아로 반환됐고 일반인의 접근이 일절 금지됐던 앙코르 문화유적은 1993년 일반에게 공개되면서부터 빛을 발한다.앙코르사원은 세계 최대의 사찰이다. 750m의 1층 회랑 벽에는 힌두교 신화와 크메르 제국의 승전에 관한 기록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크메르 왕조의 전성기인 12세기에 수리야 바르만 2세(1113~1150)에 의해 사암으로 만들어진 이 매머드 사원은 골조에만 7톤짜리 돌기둥 1800여 개가 투입됐다. 이들 돌기둥은 무려 60여km 떨어진 지점에서 채취해 운하를 통해 선박으로 운반해왔다 하니 신비의 제국을 꿈꾸던 역사적 대공사의 장엄한 단면을 상상할 수 있다.인도와 인도차이나 지역의 문화유적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이 사원은 4개 면을 동시에 건립하기 시작해 40여 년 만에 완공됐다. 앙코르 와트에서 중앙의 높은 탑과 이를 동서남북으로 에워싸고 있는 4개의 낮은 탑은 5개의 봉우리를 지녔다는 힌두교의 성산 메루를 나타낸다고 한다. 힌두교에서 메루는 창조신 브라마의 거처로 우주의 중심으로 일컬어진다. 메루를 중심으로 형성된 대륙은 7개의 대양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게 힌두교의 우주관이다. 동서 1.5km, 남북 1.3km로 만들어진 앙코르 와트의 붉은 돌담을 따라 폭 2백여m로 파여진 해자는 인도 신화에 나오는 바로 그 대양(大洋)을 의미한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동양지역 대부분의 사찰이나 신사의 출입구는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있기 마련인데 이 사원은 죽은 사람을 위한 사원에서와 같이 주 출입구가 서쪽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이점을 들어 이 사원이 왕의 사후를 예비한 영묘로 지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이른 아침 앙코르 톰의 숲 공기는 상쾌했다. 두세 아름도 넘을 거목들은 하늘의 대부분을 가렸고 검은 코끼리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을 듯한 짙은 정글지대가 끝날 무렵 옛 사원의 첨탑들이 얼굴을 내밀었다.앙코르 와트로부터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위대한 도시’라는 뜻을 지닌 앙코르 톰은 당시 100만 명이 살았다는 앙코르왕국의 도성이었다. 이 도성은 1050~ 1066년 사이 유다야디티아바르만 2세에 의해 축조되고, 후기 앙코르 시대로 불리어지는 1181~1219년에 자아바르만 7세에 의해 남아 있는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세워졌다. 자아바르만 7세는 인도 대승불교의 도움을 빌어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고자 이 바이욘 사원을 건립했다고 한다.그런 의미에서 바이욘 상은 당시 왕 자신의 모습이자 그가 추앙했던 신의 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들 앙코르 문화 유적지를 자세히 둘러본 사람들은 “앙코르 와트가 크메르 역사와 예술의 도입부라면 바이욘 사원은 당대의 가장 위대한 통치자였던 왕과 마음이 오가는, 무언의 본격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의미 있는 곳”이라고 한다.이 도성은 한 변이 3km로 정사각형이며 중앙에는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는 바이욘 묘가 높이 솟고 그 동서남북으로 2개의 주축대로가 도시를 4분하며, 2주축이 성벽과 만나는 곳에 왕도의 문이 4개, 왕궁에서 동으로 뻗은 대로 위에 1개 등 도합 5개의 문이 있다.웅장한 스케일에 신성함만 강조하는 앙코르 와트와 달리 세월의 무게와 고단한 역사를 실감케 하는 바이욘 사원은 정원 자체도 녹음에 둘러싸여 평안하고 포근하다. 거대하지만 온화한 불상에서 느껴지는 인간미 때문에 여행자에겐 마치 어머니의 품속 같은 포근한 정감으로 한없는 평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영원한 미소, 앙코르 톰처럼 끝없이 이어질 여행자들 발걸음 속에서 우리들의 추억들이 포근하고 온화해 지기를 소망해 본다.1 왕실의 제단이자 사원으로 쓰였던, 피미아나까스 Phimeanakas2 캄보디아 말로 커다란 도시란 뜻의 앙코르 톰, 남문을 통과해 들어가면 크메르 제국의 수도, 과거로의 여행이 시작된다.3 앙코르 와트, 앙코르 톰 전체 항공 지도4 여행자들이 앙코르 와트 정문을 향해 걸어 들어가고 있다.5 탁트인 앙코르 와트의 전경, 역사의 흥망성쇠를 느끼게 한다. 6 앙코르 톰에서 세필로 바이욘 상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 7 바이욘 사원을 둘러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여행자.8 마치 사진과 같은 바이욘 사원의 화가그림. 9 앙코르 톰의 남문을 향해 들어가는 수도승들. 10 피미아나까스 정상에서 바라본 왕궁의 풍경11 앙코르 와트 중앙문을 향해 들어가는 진입로와 해자. 12 적막을 뚫고 찬란한 하루를 마감하는 환상적인 좌우 대칭의 앙코르 와트.바다만큼 넓은 호수 톤레삽. 캄보디아 전국토의 15%나 차지하는, 언제나 사용 가능한 거대한 저수지 역할의 톤레삽이 있기에 고대 크메르 왕국이 영화를 누리지 않았을까 한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적셔주는 어머니 강 메콩이 범람하면 톤레삽에 비옥한 옥토를 머금은 물이 흘러들고 건기가 되면서 물길이 프놈펜 쪽으로 다시 빠지면서 자연스레 곡식을 심기만 하면 되는 비옥한 누적토가 남는다.물이 차면 어획을 하고 물이 빠지면 농사를 짓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최적의 조건을 제공하는 톤레삽 호수의 사람들은 그 물길을 따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조금은 지루하고 반복적인 시간을 살아간다. 톤레삽에 절대 의존하며 유사 이래 일체가 되어 살아가는 자연인들에게 행복한 보금자리로서 전연 손색이 없는 호수이다.호수 주변에는 수상 가옥들과 베트남 보트 피플들의 일상이 존재한다. 관광객을 상대하기도 하지만 자체적으로 소규모 공동체를 형성해 자신들만의 공동생활을 영위한다. 대부분 보트를 타고 이곳저곳 저곳으로 이동하며, 물자를 나르기도 하고, 일상생활의 상품을 구입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집안에서 놀거나 친구와 물놀이를 하거나 집을 지킨다. 엄마와 아이들이 함께 목욕하는 장면도 자주 목격된다. 지구상 어느 곳과 다를 바 없이 일상의 삶이 존재하지만, 여행자에게 비추어 지는 흔하지 않은 삶의 모습은 그 자체로 톤레삽의 경이로움이며, 희망이다.글·사진 함길수 자동차 탐험가©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