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르와리스트가 된 변호사
촘하고 크리미한 거품을 좋아하다 보니 아사히 생맥주와 기네스 맥주를 아무래도 자주 찾게 된다. 얼마 전 친구와 식당에 들어갔을 때 일이다. 메뉴판에서 아사히 생맥주가 보이지 않자 평소 내 맥주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친구는 묻지도 않고 아사히 병맥주를 주문하려 했다. 그걸 마시느니 카스를 마시겠다고 하자 그새 또 취향이 변했냐며 재깍 날선 핀잔이 날아왔다. 좀 억울했지만 ‘쨍~’하고 잔을 부딪히며 그가 내는 “캬~”하는 소리를 듣고 서야 참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그래, 중국산 아사히 맛 좋냐?” ⑴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놀라는 그 모습을 즐기며 말을 이었다.“라벨 잘 봐. 우리나라에 들어온 아사히 병맥주는 중국에서 만든 거더라. 일본에서 만든 오리지널 아사히 맛보려면 큰 통에 들어있는 거 사야겠던데!”그나마 병맥주야 라벨이 있어 생산국을 알 수 있지만, 아사히 생맥주는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 아직도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분명 재료 산지에 따라, 만든 장소에 따라 맛의 차이가 나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믿는 나는 평소에 이러한 것들을 매우 꼼꼼히 체크하는 편이다. 이 버릇이 이제는 습관처럼 몸에 밴 근저에는 종종 터지는 ‘먹을거리 안전성’에 대한 우려도 한몫 했지만 와인 쪽에서 숱하게 들어온 ‘원산지와 테르와르(Terroir)’ 개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테르와르’는 포도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의 지질, 기후, 온도 등 밭을 특징짓는 자연 환경 일체를 아우르는 말이다. 면적을 기준으로 보면 원산지는 대개 지역, 도시, 마을 급이 속한다. 테르와르는 통상 포도밭 정도의 크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최고의 와인을 만드는 포도밭에서 난 포도와 그곳으로부터 약간 비껴났을 뿐인 곳에서 생산한 포도로 만든 와인의 맛과 향은 확연히 다르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자연(환경)에만 의지해 와인을 만드느냐는 식의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테르와르 신봉자들을 가리켜 ‘테르와리스트(Terroirist)’라 부르며 비아냥 거리기를 일삼는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시장에서 없어 못 파는 와인들은 테르와리스트들의 그것들이다.2004년 칸느영화제 비경쟁 부분에서 초청되었던 다큐멘터리 ‘몬도비노’에서 많은 테르와리스트를 만날 수 있다. 동시에 필름에서는 거대 자본과 몇몇 와인업계 거물들로 인해 전 세계 와인 맛이 천편일률적으로 동일해 지고 있는 상황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내용이 이렇다 보니 이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을 때 한때 와인업계가 시끄러웠을 것이란 당신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소믈리에 자격증을 가진 미국인 감독 조나단 노시터는 이러한 양측의 모습을 담기 위해 4년에 걸쳐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브라질 등을 종횡무진 누비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감독이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 카메라에 담은 사람이 바로 위베르 드 몽티이(Hubert de Montille)다. 쏟아지는 와인 폭격(거대 자본을 상징)에도 맨머리를 들이밀고 어딘가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눈초리를 풀지 않고 있는 인물, 그가 위베르 씨다. 화면 속에서 그는 오직 땅과 와인만을 아는 전형적인 시골 노인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가 바로 1990년대 초, 당시 부르고뉴 거대 네고시앙⑵ 중 하나인 패블리(Faiveley)가 사기 혐의로 로버트 파커를 고소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을 때, 원고 측 변호를 맡아 파커와 한번 세게 붙었던 주인공이다.양조업을 시작했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위베르 씨는 숙부와 함께 17세부터 양조 일을 시작했다. 오랜 세월, 고집스럽게 오직 땅의 기운만이 고스란히 담긴 포도만을 선별해 와인 만든 수고를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들이 놓쳤을 리 없다. 현재 그의 도멘 드 몽티이 와인은 미슐랭 가이드의 레스토랑 와인 리스트에 빠짐없이 올라가 있다.위베르 씨는 최소 10년, 대부분 20년에서 30년은 지나야 진가가 나타나는 장기 숙성용 와인을 만들어 왔다. 그러니 드 몽티이 가문이 노시터 감독 레이다 망에 잡힌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도멘 드 몽티이(Domain de Montille)는 그의 아들 에티엔이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데 초기엔 꼭 그의 아버지처럼 변호사와 양조업을 병행했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부르고뉴에 정착해 오직 와인에만 모든 열정을 쏟고 있다.도멘 드 몽티이뿐 아니라 최근 그는 여동생 알리스와 함께 네고시앙 두 몽티이(DEux Montille)를 설립해 활동 영역을 넓혔다.노씨터 감독이 2대에 걸친 드 몽티이 가족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물론 대량 생산 시스템 덕에 와인 산지로부터 이토록 먼 곳에서도 저렴하게 와인을 마실 수 있게 된 편의성을 모르는 바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편의성을 취하는 데에 익숙하면 익숙해 질수록 그것으로 인하여 어딘가에서는 그만큼 자연이 훼손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와인 라벨에 ‘드 몽티이’ 이름이 새겨지는 것보다 테르와르(를 온전히 지키는 일)가 10배는 더 소중하다고 힘주어 말하던 위베르 씨의 모습이 여태 잊혀지지 않는다. 에티엔과 알리스로 대표되는 부르고뉴 젊은 테르와리스트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습은 단순히 포도주 많이 나오는 나라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상이 아니다. 우리 역시 다음 세대들에게 우리가 받아 누렸던 자연을 고스란히 물려주어야 한다. 만약 이 최소한의 의무조차 소홀히 한다면 후세들 앞에서 대체 무슨 낯으로 설 수 있을까?자, 그러니 어떤가? 지금부터라도 테르와리스트들의 정신을 대량으로 생산해 주위 사람들에게 무차별 살포하는 아름다운 테러리스트가 되어 보는 것 말이다.⑴ 중국에 이미 칭다오 같은 세계적인 맥주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중국 맥주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고 당연히 일본에서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맥주가 알고 보니 다른 나라에서 만들어 진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임을 밝힌다.⑵ 네고시앙이란, 와인 도매상을 가리키는 프랑스어. 포도 재배자들로부터 포도를 매입하여 양조 및 판매를 하거나 아예 병입까지 마친 와인에 자신들의 이름을 붙여 판매하기도 한다. 어떤 네고시앙은 아예 자체 포도원을 가지고 있어 재배, 양조, 판매까지 도맡기도 한다. 네고시앙은 프랑스 내에서도 부르고뉴 쪽에 특히 많이 있다.글 김혜주 알덴테북스 대표·사진 알덴테북스, 와인나라, 트윈 와인©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