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제는 모든 역사에 공통적으로 존재했으나 어디서나 같은 의미였던 것은 아니다. 특히 동양의 신분제와 서양의 신분제는 성격이 크게 달랐다. 사회의 기틀이었고 차별적인 성격을 지닌 점은 마찬가지지만, 동양의 신분제는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지배하기 위한 서열의 의미가 강한 반면 서양의 신분제는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규정했다.동양의 신분제는 상위 신분과 하위 신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위상으로만 나뉠 뿐 신분이 사회적 기능이나 역할을 규정하지 않았다. 동양 사회 특유의 병농일치 개념이 그 예다. 당나라의 골간이었던 부병제는 농민이 전시에 병사로 복무하는 병농일치의 제도였으며, 고려와 조선의 군사제도도 기본적으로 병농일치의 성격이었다.그와 달리 서양의 역사에서는 고대부터 농민과 병사가 확실히 구분되었다. 농민들은 국가의 경제적 토대를 담당하는 역할이었고, 병사는 국가를 방어하거나 적을 정복해 영토를 늘리는 역할이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용병을 고용할지언정 농민을 병사로 부리지 않았다. 로마제국에서도 농민들은 농사를 지었으며, 로마 군단이 정복을, 게르만 용병이 변방의 방어를 맡았다. 이런 차이 때문에 로마시대에 존재했던 ‘전문적인 전투 집단’으로서의 상비군은 동양 사회의 경우 근대 이후에야 생겨난다.높은 신분은 그 신분에 어울리는 사회적 역할을 가진다. 이런 발상이 서양 역사 특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즉 ‘귀족의 의무’라는 관념을 낳았다. 사회의 지도층이나 상류층은 그 신분에 어울리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기원은 보통 기원전 3~2세기에 벌어진 포에니 전쟁에서 찾는다.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카르타고와 싸운 이 전쟁에서 당시 로마의 귀족들은 스스로 전쟁 비용을 부담했을 뿐 아니라 평민보다 먼저 전장에 나가 싸우다 죽는 것을 명예로 여겼다.흔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도덕적 개념으로 여기지만 그 원천은 도덕이 아니라 역사에 있다. 거꾸로 말하면, 동양 사회에서 지금까지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 부족한 원인은 도덕성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역사가 부재했기 때문이다.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역사적인 개념이라면 포에니 전쟁 이전에도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5세기에 동방의 대제국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해왔을 때 양측 군대 지휘관들의 자세는 확연히 달랐다.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 밀티아데스는 마라톤 전투에 직접 참전했고 스파르타의 장군 레오니다스도 300명 전사들과 함께 싸우다 전사했지만, 전쟁을 기획한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는 살라미스 해협에서 바다에 빠져 죽어가는 페르시아 병사들을 아이갈레오스 산꼭대기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기원전 4세기의 알렉산드로스에서 18세기의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간 서양의 역사에 등장하는 지배자들은 군사원정이 계획되면 거의 예외 없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그에 비해 동양의 지배자들은 몸소 전장에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늘 장수와 군대를 파견했다. 한 무제의 업적으로 잘 알려진 서역 원정과 흉노 정벌도 황제가 직접 이룬 게 아니라 ‘명령’만 내렸을 뿐이다.중국 역대 한족 왕조의 수많은 황제들 가운데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고비 사막을 넘은 황제는 명대 초기의 영락제가 유일하다. 동양식 룰에서는 지배자가 전장에 나가는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고, 실제로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동양의 역사에서는 전장에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거의 전무했다. 이 점 역시 개인적 용기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신분이 그런 역할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역사는 대단히 심각하다. 우리 역사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원정은 커녕 방어전에서조차도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친히 군대와 생사를 함께한 사례가 없다. 고려 초기의 왕 현종은 자신이 거란에 대해 강력한 압박 정책을 추진했으면서도 막상 거란이 남침하자 멀리 전라도 나주까지 도망쳤다. 비슷한 시기에 잉글랜드 왕 리처드와 프랑스 왕 필리프가 왕의 신분으로 십자군 원정에 참전했던 사실과는 크게 비교되는 지배자의 자세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의 왕 선조는 남쪽에서 북진하는 일본군의 위세에 놀라 잽싸게 북쪽 끝단의 의주까지 피신했다. 당시 선조는 부끄러움을 알았던지 가족과 측근들만 거느린 채 한밤중에 폭우를 뚫고 몰래 야반도주했다. 비슷한 시기 스웨덴 왕 구스타프는 유럽 대륙의 혼란기를 틈타 자신의 왕국을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시키기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발트 해를 건너 30년 전쟁에 뛰어들었다가 뤼첸 전투에서 전사했다.그래도 고려의 현종과 조선의 선조는 궁색하게나마 변명이 가능하다. 왕조시대에 왕국의 주인은 왕이었고 가장 중요한 일은 사직을 보존하는 것이었으므로 수많은 백성들이 희생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겨우 사흘이 지났을 때 대통령이던 이승만은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던 약속을 헌신짝처럼 팽개치고, 수백 명의 피난민들을 희생시키며 한강 인도교를 끊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명색이 공화국 체제인 대한민국에서 국정의 최고 지도자가 대국민 약속을 어기고 국민들을 희생시켜 제 목숨을 보존한 것은 엄연한 범죄 행위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서도 이승만은 처벌을 받기는커녕 거뜬히 대통령으로 재선되었고,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의 일각에는 이승만을 국부로 섬기자는 세력이 있다.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전쟁을 기원으로 하지만 전쟁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평화 시에 권력과 부를 지닌 사회의 상류층이 공공의 이득을 위해 봉사하는 행위는 모두 노블레스 오블리주다.아무리 15세기 북이탈리아의 도시들이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해도 각 도시를 지배하던 유력 가문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이 없었다면 르네상스 예술은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모두 예술을 발전시키겠다는 고결한 각오에서 예술가를 후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부분 개인적인 미학적 취향이나 권위를 과시하려는 세속적 욕망에서 예술을 장려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각 도시의 지배자들이 예술 후원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르네상스 미술의 걸작들이 그렇게 대량으로 생산되어 후대까지 전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근대 음악이 발달한 17~18세기 독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음악가도 자신의 음악을 사주는 팬들이 없으면 먹고 살 수 없다. 지금과 같은 방송 매체나 오디오 장비가 없었던 시절의 음악 팬은 군주와 귀족들이었다. 수많은 영방국가들로 나뉘어 있는 독일 지역의 군주들이 음악의 ‘소비자’로 나서지 않았다면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미국의 기업가인 록펠러가 뉴욕 시에 수도시설을 기부하고 2010년까지 시민들의 수도료를 면제해준 것이라든가, 전도가 유망한 젊은 연주자들에게 고가의 명품 바이올린을 무료로 대여해주는 스트라디바리 협회의 활동은 박애나 도덕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역사와 전통에 따른 행위다. 반면 오늘날 동양 사회의 상류층에게서 기부 문화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든가, 높은 사회적 신분을 누리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는 의식이 부족한 것은 도덕의식의 결여라기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회 발전에 기여했던 역사가 부재한 탓이다.인문학 저술가 및 번역가 dimeol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