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nri Matisse in Rosary Chapel
1. 니스 전경. 그림 같은 해변 에메랄드 초록바다에 레몬향기가 흩날리는 듯 상쾌하다. CANON EOS 5D, CANON LENS EF 1:2.8 L 24-70mm DIGITAL 최선호ⓒ스의 해변에 따가운 유월의 햇살이 내린다. 백사장이 아닌 둥근 자갈이 깔린 해수욕장에는 아침부터 비키니의 멋진 여인이 해변을 거닌다. 야자수가 일렁이는 바닷가에는 에메랄드 푸른 비취빛이 넘실댄다. 니스에는 마티스 최후의 걸작이자 영원한 생명의 안식처가 있다. 방스에 있는 로사리오 성당이 바로 그곳이다. 이곳은 마티스가 만년에 그의 모든 열정과 집념 그리고 삶의 즐거움을 색과 빛으로 승화시켜 작업한 <생명의 나무> 스테인드글래스와 <십자가의 길>, <성 모자상>, 그리고 <성 도미니쿠스상>이 영원과 맞닿은 맑고 경건한 ‘마티스 성당’이다.칠십이 넘은 노년의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는 1941년 정월, 리옹에서 십이지장 암수술을 받고 작품을 마무리 할 수 있게 삼사년만 더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의사에게 간청했다. 마티스는 바닷바람을 쐬라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니스 북쪽 시미에의 높은 곳에 위치한 대형 호텔 레지나로 작업실을 옮겼다. 이 호텔은 영국에서 오는 겨울 관광객을 위해 1897년 지어진 호텔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묵은 적이 있는 특급 호텔이다. 하지만 1943년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시미에 공습이 있은 뒤 마티스의 한 시기도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의 니스 시대는 루마니아 블라우스를 입은 채 졸고 있는 모델을 그린 <꿈>(1940)과 함께 끝났다. 마티스는 니스를 떠나 산기슭에 자리 잡은 중세도시 방스의 별장 ‘르 레브’로 작업실을 옮겼다.노대가 마티스는 앓아눕는 일이 잦았다. 평생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담배로 인한 폐색전증과 위하수증 때문에 쇠로 된 벨트를 차고 다녔는데, 그 때문에 오래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지난 50년 동안 나는 잠시도 작업을 중단한 적이 없다.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일하고 점심을 한다. 점심 후 낮잠을 간단히 잔 다음 오후 2시에 다시 붓을 들고 오후 내내 저녁 때까지 줄곧 일을 했다. 상상이 안 갈 것이다”라고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붓 대신 가위를 들고 휠체어에 앉아 종이 오리기 작업을 하였다. 방스의 로사리오 성당 <생명의 나무> 작업의 초안을 시미에 레지나 호텔 천장 높은 그의 작업실에서 완성했다.로사리오 성당의 인연은 19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리옹의 젊은 간호사 모니크 부르주아는 마티스를 간호하면서 맺은 인연으로 드로잉과 유화의 모델이 되기도 하고, 마티스 만년의 걸작 <재즈>의 종이 오리기를 도와주기도 하였다. 1946년 수녀가 되어 자크 마리로 불리게 된 그녀는 방스에 있는 도미니쿠스 수도회로 옮겼고, 그곳에서 마티스와 인연을 다시 이어가기기 시작했다. 1947년 말 자크 마리 수녀의 추천으로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레시기에 수사가 마티스에게 방스에 성당을 지으려는 계획을 알려 왔다. 자크 마리 수녀는 수녀들의 예배당 스테인드글래스를 마티스의 작품으로 만들고 싶었다. 마티스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자신의 삶과 예술을 ‘건축학적 그림’인 스테인드글래스로 완성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대가의 의지는 열정으로 불 타 올랐다.성당은 가로 15m에 세로 6m 높이 5m로 ‘ㄱ’자 형의 작은 공간이었다. 마티스는 요한계시록 22장 2절 에 나오는 “…내게 생명수가 흐르는 그 강은 그 성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양쪽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어서 일 년에 열두 번,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또 그 잎은 모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라는 구절을 주제로 선택하였다.2. 니스의 시미즈 호텔 레지나에서 팔십이 넘은 만년의 마티스가 십이지장 암수술을 받고 휠체어에 앉아 종이오리기 작업을 하고 있다. 방스의 마티스 성당 <생명의 나무> 작업의 초안을 이곳에서 완성했다.레지나 호텔의 마티스를 가까이 지켜 볼 수 있었던 자클린 뒤엠은 훗날 자신의 기록인 <선과 그 밖의 것들>에서 마티스의 하루 일과와 계절에 따라 파리와 니스를 오가던 생활을 상세히 기록하면서 니스 작업실 풍경과 빛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여름이 끝날 무렵 우리는 다시 (파리에서) 니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이제는 레지나 호텔에서 묵을 차례였다. 그 호텔의 로비는 으리으리한 장식물로 치장되어 있었고, 호텔에 들어서면 마치 박물관이나 사원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박물관 같은 공간을 이루는 다른 방들에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가져온 고색창연한 골동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니스와 방스의 마티스 거처에서만 볼 수 있는 그 특이한 빛, 태양의 위치에 따라 반쯤 드리운 얇은 커튼에 여과되어 들어오는 그 부드러운 빛은 마치 수도자가 생활하는 그리스 어느 사원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마티스의 작업실은 실제로 수도자의 생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 방스의 도미니쿠스 수도회 성당의 모형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마티스의 성당 드로잉 작업은 종이에 자크 마리 수녀가 마티스가 원하는 녹색 노랑 파랑의 과슈 물감을 칠하면 마티스가 연필로 드로잉하고 그에 맞추어 종이오리기를 한 다음 벽에 풀로 붙여 나가는 방식이었다. 언뜻 보면 마티스가 대가의 노련함으로 쓱쓱 쉽게 잘라낸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종이를 원화의 의도에 가깝도록 수없이 자르고 덫 부쳐 작업을 <생명의 나무>를 완성했다. 그 뿐 아니라 세라믹 타일에 그려진 드로잉은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을 팔십 노대가의 눈으로 그려낸 마티스 최후의 만찬이다. 마치 추사의 절필 봉은사 <판전(板殿)> 편액을 보는 듯하다. 예술 최고의 경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가 보다. 고졸함이 바로 그것이다. 마티스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어린아이가 사물에 다가갈 때 느끼는 신선함과 순진함을 보존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평생 어린아이로 남아 있으면서도 세상의 사물로부터 에너지를 길어오는 성인이 되어야 한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3. 마티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