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최대의 한국기업 헤닉권 권병하 회장
권 회장은 직함이 많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오랜 기간 한인회장으로 활동했고 지금도 한국인투자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말레이대학 한국어학과 학생 전원에게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고 경찰청 직원 자녀 장학금 조성을 위해 150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난 1982년 한 한국 청년이 말레이시아에 도착했다. 그는 공항주변에 있는 삼성 LG 등 국내 대기업의 광고판을 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저 광고판에 내가 세운 회사를 광고하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그가 가진 돈은 모두 1520달러. 한국에서의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남은 돈이다. 그런데도 그는 “여기서는 내가 무엇을 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27년이 지난 현재 그가 세운 회사는 GE 지멘스 등 다국적 기업과 경쟁해 연 매출 1억 달러를 올리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주력 품목인 버스덕트(Busduct)시장에서는 세계시장 점유율이 30%나 된다. 그가 바로 말레이시아의 최대 재외동포기업인 헤닉권(Heni kwon)의 권병하 회장이다. 지금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주변에는 ‘Thanks for making us No1,Henikwon’이라는 문구의 대형 광고판 2개가 있다.헤닉권은 쿠알라룸푸르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사이언스 파크’에 자리 잡고 있다. 본사 건물은 1만여 평의 대지에 지은 2층짜리 건물로 공장과 붙어 있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2층 권 회장의 방에 들어서니 옆 창문으로 170여명의 근로자들이 일하는 공장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헤닉권은 버스덕트라는 단일 상품을 생산하고 있다. 버스덕트는 건물 내에서 일반 전선을 대체하는 케이블로 고압의 전류를 필요로 하는 대형 빌딩, 공장, 발전소 등에 주로 쓰이는 제품이다. 이 회사의 내수시장 의존도는 5%에 불과하다. 나머지 95%는 일본 중동 등 세계 40개 국에 수출하고 있다. 덕분에 지난해에는 말레이시아 정부가 주는 수출대상까지 받았다. 권 회장은 “개발 단계에 있는 아시아 시장 점유율이 60%나 되기 때문에 향후 성장 전망도 밝다”며 “전기 업종에서 세계 1위 기업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 기업인으로 꼽히는 권 회장도 처음 사회생활은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출발했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권 회장은 1973년 종합상사인 국제상사에 입사했다. 그가 처음 배치된 곳은 기계부.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주력 수출 품목이 의류, 가발일 정도로 수출산업은 보잘 것 없었다. 기계부 역시 목공기계나 발동기 견직기 등을 주로 동남아에 수출하는 업무를 담당했다.그러나 권 회장은 이 업무를 맡으면서 무역업에 눈을 떴다. 당시 우리나라는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일본에서 기계를 무더기로 들여왔다. 창원 울산 부천 등 곳곳에 공단이 만들어지면서 공장도 크게 늘어났다.“당시에는 유지보수용 기계부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청계천 판매상에게 가서 기계부품을 수입한다고 하면 30%를 보증금으로 줬을 정도였죠. 내 돈 없이도 장사를 할 수 있는 시절이었습니다.”그래서 권 회장은 1978년 국제상사를 그만두고 오퍼상을 열었다. 주로 일본과 체코 등에서 기계부품을 수입해 국내에 판매했다. 사업은 순탄하게 성장했다. 그러자 당시 집권당에서 청년 사업가인 그에게 손길을 뻗쳐왔다. 평소 사업에 성공해 국가사회에 이바지하겠다고 생각하던 권 회장도 싫지만은 않았다. 서울시 중구반공연맹지부장, 중구발전위원회 위원 등을 맡으며 정치권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의 나이 불과 32세 때였다. 급기야 1981년 총선 때는 서울 성동구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했다 낙선을 하기도 했다.“사업에 전념을 못하게 되니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사회도 너무 혼란스러웠죠. 마침 여기저기 보증을 섰던 당좌수표가 부도가 나면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정리하고 해외로 나가기로 한 겁니다.”처음엔 나름대로 계획도 있었다. 그는 호주로 가서 청소용역업을 하든가 나이지리아에 가서 못 공장을 하는 꿈을 꿨다. 꽤 괜찮은 아이템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말레이시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사업을 정리하고 남은 돈 1520달러와 한국에서의 사업 경험이 그의 전 재산이었다.권 회장은 “우리 세대는 사업을 잘 할 수 있는 환경을 타고 났다”고 말한다. 전쟁과 배고픔 속에 절망하던 시절, 잘 살아보자고 절규하던 시절, 그리고 외국 의존 일변도에서 벗어나 국산화와 수출을 외치던 근대화시기를 성장하면서 모두 경험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 사람이 100년 이상 걸려야 경험할 수 있었던 일들을 불과 30년 만에 모두 겪었는데 이를 통해 돈을 벌어야겠다는 목적의식과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한다는 방법론까지 습득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이 그의 최대 사업 밑천이었다.실제 권 회장이 말레이시아에서 성공한 과정을 살펴보면 그의 사업 감각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알 수 있다. 감각이 뛰어날 뿐 아니라 배짱도 놀라울 정도다.“저는 처음 방문한 국가에 가면 제일 먼저 호텔 옥상에 올라갑니다. 시내를 내려다보고 평평한 벌판에 단독주택만 있으면 생필품이 필요한 사회입니다. 반대로 빌딩이 많고 전깃불이 번쩍이면 중간재를 팔면 되죠. 박물관을 찾아가 정서와 문화를 파악하고 백화점에 가서 제품을 둘러보면 시장조사 다 끝납니다. 백화점 카탈로그를 갖고 한국제품과 비교해 봐도 뭘 수입할지 금방 알 수 있어요.”권 회장은 말레이시아에서 첫 사업아이템을 용접용 노즐로 정했다. 시내 곳곳에 있는 자전거 수리점이나 철공소에서 용접을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용접용 노즐은 대부분 일제 부품을 썼다. 국내에서 비슷한 제품을 수입하면 훨씬 싸게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국내에서 용접용 노즐을 만드는 회사를 수소문해서 제품 생산을 의뢰했다. 그는 1983년에 말레이시아 판매상으로부터 용접용 노즐 1만3500달러어치를 주문받아 첫 거래를 성사시켰다. 이 거래로 10%인 1350달러를 벌었는데 당시에 사무실 임대료가 월 50달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꽤 큰돈이었다.국제상사 시절부터 전기제품에 관심이 많았던 권 회장은 또 배전시설에 사용하는 마그네틱 컨텍터를 수입했다. 마그네틱 컨텍터 역시 일본 회사인 후지전기가 말레이시아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권 회장은 후지와 기술제휴 관계에 있던 한국의 금성계전으로부터 제품을 공급받아 30% 이상 싼 가격에 판매했다.자동펌프 수입으로도 꽤 짭짤한 수익을 남겼다. 말레이시아 가정에서도 우리나라와 유사하게 자동펌프를 이용해 수돗물을 퍼올렸다. 당시 한국에서는 한일자동펌프가 유행이었는데 말레이시아에서는 산요제품이 인기가 높았다. 권 회장은 산요와 기술제휴를 하고 있던 한일자동펌프 회사로 찾아가 펌프 수입계약을 맺었다. 산요제품과 거의 같지만 가격은 30% 이상 싸니 당연히 날개 돋친 듯 팔렸다.그 당시 일화 하나. 원래 한일자동펌프는 산요로부터 기술제공을 받는 조건으로 해외수출을 하지 않기로 했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에서 예상 외로 많은 제품이 팔리자 산요 측에서 한일자동펌프에 항의를 했다. 한일자동펌프 측은 어쩔 수 없이 수출을 중단했다. 이에 권 회장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대한민국이 살아갈 길은 수출밖에 없는데 해외동포가 한국제품을 수입하려고 하는데 팔 수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내용이었다. 정부가 개입하자 한일자동펌프 측은 산요 측과 협상을 했고 이후 일정량을 더 공급하는 조건으로 타협을 봤다. 마그네틱 컨텍터 수입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는데 권 회장은 후지전기와 담판을 해서 말레이시아 수입만은 예외로 하기로 타협을 끌어내기도 했다.헤닉권을 설립한 후에도 권 회장의 비즈니스 감각은 빛을 발했다. 당시 말레이시아 가로등은 대부분 영국의 쏜(Thorn)사 제품이었다. 권 회장은 가로등을 갖고 서울 뚝섬에 있는 금속업체를 찾아가서 똑같이 만들어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 회사는 문제없다며 금세 동일한 모형의 제품을 만들어냈다. 권 회장은 일부 디자인을 수정해서 말레이시아 시청에 가로등을 공급했다.지금 헤닉권의 주력제품이자 단일 품목인 버스덕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버스덕트 시장이 유망하다고 본 권 회장은 물건을 사겠다며 경쟁업체를 찾아가 제품 사진을 찍었다. 제지하는 경쟁업체 직원에게는 “내가 이 제품에 문외한이어서 구매자에게 설명하는 카탈로그를 만들어야 한다”고 둘러댔다. 그 후 권 회장은 사진을 바탕으로 제품을 만들어 버스덕트 시장에 뛰어들었다.“당시에는 일본이나 유럽 등 선진국에서 만든 제품을 우리나라에서 수입해서 팔면 뭐든지 괜찮았어요. 그만큼 우리나라는 브랜드만 없을 뿐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거든요.”헤닉권의 주요 고객은 도시바 미쓰비시 히타치 등 일본 업체들이다. 이들은 세계 발전소의 약 60%를 건설하고 있다. 권 회장은 “일본 회사들은 너무 까다로워 GE 지멘스 등 다국적 기업들조차도 제품공급에 어려움을 겪는다”며 “헤닉권은 품질과 디자인 신뢰성 면에서 일본 업체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자랑했다.헤닉권의 모토중의 하나는 ‘Only one’이다. 버스덕트 한 제품만을 파서 이 분야의 세계 1위 기업이 되겠다는 것이다. 권 회장은 “외국인인 내가 이 땅에서 현대그룹이나 GE그룹 같은 큰 회사를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세계 최고를 지향할 수는 있다. 그러려면 오직 한길을 가야 한다. 전기 업종으로 세계를 제패하는 게 꿈인데 이것도 내 평생 이루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그동안 숱한 사업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버스덕트에만 매달리고 있다.단일 품목을 고집하면 리스크가 너무 커서 회사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기 어렵지 않느냐는 지적에 대해서도 권 회장은 수출지역 다변화를 통해 리스크를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1998년 동남아 외환위기와 2003년 사스로 인한 혼란기에도 헤닉권은 고속성장을 했다”며 “40개 국에 골고루 수출하기 때문에 특정 시장이 위축돼도 매출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로 안정적”이라고 말했다.권 회장은 직함이 많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오랜 기간 한인회장으로 활동했고 지금도 한국인투자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말레이대학 한국어학과 학생 전원에게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고 경찰청 직원 자녀 장학금 조성을 위해 150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이런 공로들을 인정받아 말레이시아 국왕으로부터 다토(Dato)라는 귀족작위를 받았다. 그는 또 말레이시아 해외투자 유치단의 단골 멤버다. 말레이시아 정부 관료들과 세계 각국을 돌며 투자유치에도 앞장서고 있다. 권 회장은 “시집간 딸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가서 잘 사는 것”이라며 “해외 기업인 역시 현지에서 정도경영을 하고 그 사회의 리더 그룹에 진입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빛내는 일”이라고 말했다.그는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올림픽 월드컵을 개최하고, 한류를 유행시켰지만 정치적 사회적 불안으로 인해 선진국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어 너무 안타깝다”며 “한국은 물론 재외동포기업의 발전을 위해서도 하루 빨리 국민통합을 이뤄내야 한다”고 당부했다.글 김태완·사진 이승재 기자 twkim@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