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준 명지의료재단 이사장
병원을 경영하고 신문을 발행하는 이왕준 이사장은 오페라 마니아다.개원의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과 친숙했던 그는 중학교 때 처음 오페라를 본 이후 그 세계에 빠져들었다.
지금도 바쁜 출장길에 짬을 내 오페라를 본다는 그의 오페라 예찬론이다. 이왕준 명지의료재단 이사장은 ‘병원을 고치는 의사’로 불린다. 부도 직전의 인천사랑병원을 인수해 정상화시켰고, 쇄락하던 명지병원 이사장에 취임해 혁신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이 이사장 취임 후 명지병원은 암센터를 열고 권역응급의료센터를 신축하며 750병상 시대를 열었다.
이 이사장의 남다른 행보는 서울대 의대 시절부터 시작됐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그 시절 동료들과 의기투합해 ‘청년의사’라는 신문을 창간하기도 했다. 청년의사는 한때 월간지 창간으로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었지만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지금도 그는 청년의사 발행인, 명지의료재단 이사장, 한국의료수출협회 이사장 등 굵직굵직한 직함으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털털한 인상에 보타이가 인상적인 그를 고양시 명지병원 집무실에서 만났다.
오페라에 취미를 붙인 게 언제부터였습니까.
“아버지가 해양대를 나와 배를 타다 의대에 가서 의사가 되신 분인데, 당신이 음악을 좋아하셨어요. 그 영향으로 음악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저는 초등학교 때 바이올린을 했고, 피아노를 배운 여동생은 서울대 음대를 나왔습니다. 의대 다닐 때는 메디컬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예고 출신의 후배가 들어올 때까지 의대에서 제가 바이올린을 제일 잘 했습니다.(웃음)”
오페라를 접한 건 언제였습니까.
“그땐 다양한 음악을 들었습니다. 한때는 종교음악에 심취해서 레퀴엠(진혼곡)이란 레퀴엠은 다 들었거든요. 오페라는 당시에는 볼 기회가 없었어요. 음반으로 오페라 듣는 건 재미 없잖아요. DVD로 봤죠. 그러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오페라를 봤어요.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으로 이탈리아 파르마오페라단이 내한공연을 가졌거든요. 이탈리아 3대 오페라단의 공연을 본다는 생각에 전주에서 서울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왔죠. 표 값이 비싸기도 했지만 전혀 문제될 게 없었어요. 학교에는 오페라 보러 간다고 양해를 구하고 초등학교 6학년이던 여동생이랑 상경했죠. 지금도 그때 공연 장면과 멜로디가 다 기억납니다.”
오페라에 대한 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됐겠네요.
“그때는 오페라뿐 아니라 클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중1부터 고3까지 매주 2장씩 클래식 음반을 샀으니까요. 그때 모은 음반만 6000장쯤 됩니다. 당시 전주에 클래식 음반을 파는 가게가 두 곳 있었는데 매주 돌아가면서 갔습니다. 갈 때마다 혹시 빠뜨린 음반이 없는지 입구부터 맨 안쪽까지 2시간 이상 뒤졌어요. 그러다 보니 매장 직원보다 어떤 음반이 어디 있는지 제가 더 잘 알았을 정도였으니까요.”
클래식 좋아하는 분들 보면 오디오에도 관심을 갖던데요.
“오디오 욕심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어머니 곗돈 탄 걸로 300만 원짜리 최고급 오디오로 업그레이드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3000만 원쯤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당시 오디오 세트로는 전주 시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고 했으니까요. 고등학교 시절에 웬만한 클래식은 다 뗐다고 보면 됩니다.”
대학시절에는 어땠습니까. 운동권이었다고 들었는데, 운동권과 클래식은 잘 매치가 안 되는데요.
“처음엔 의대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했습니다. 그러다 국악에 빠졌죠. 예과 2학년 때 의대에 풍물패를 만들어서 상쇠로 공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후배들에게 풍물패를 물려주고 학생운동을 본격적으로 했죠.”
옥고도 치르셨죠.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이었나요.
“그 한 단계 위인 국가보안법 위반이었습니다.(웃음) 1986년 붙잡혀서 서대문구치소에서 6개월을 살았습니다. 1987년 6월 항쟁 후 복권됐고요. 구치소에서도 풍물을 했습니다. 검사가 수사한다고 아침 8시부터 부르는데 포승줄을 안 풀어주더라고요. 하루 종일 반 평짜리 방에 앉혀 뒀다, 저녁 먹을 때부터 새벽 1, 2시까지 심문을 해요. 낮에 하도 무료하니까 장단도 맞춰 보고 손가락으로 가락도 두드렸어요. 그러다 보면 흥이 날 때가 있거든요. 그러면 벌떡 일어나서 장단을 맞추는 거죠. 간수들이 그걸 보고 ‘저 자식 드디어 돌았구나’ 하고 자제를 시킨 적도 있습니다.(웃음)” 복권 뒤에도 풍물을 하셨나요.
“그때는 명창들 소리를 들으러 다녔습니다. 국립극장 등에 판소리 공연이 있으면 쫓아다녔습니다. 국악, 판소리 관련 책 몇십 권을 구해서 독학으로 배웠어요. 오정수, 박동진 같은 명창들의 마지막 무대를 지켜봤죠. 아주 끝까지 가 본 거죠. 국악계에 ‘소리명창 위가 고수명창, 고수명창 위가 귀명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귀명창 수준이었어요.(웃음)”
판소리 끝에는 어떤 게 있던가요.
“판소리의 원조가 굿 아닙니까. 그때부터는 굿을 보러 다녔습니다. 황해도 대동굿, 경기도 도당굿, 동해안 별신굿, 진도 씻김굿 등 열심히 보러 다녔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동해안 별신굿 기능보유자 김석출, 진도 씻김굿 기능보유자 박병천 등 이런 분들 노는 걸 직접 봤습니다.”
오페라로 다시 돌아온 건 언제부터입니까.
“2000년대 들어섭니다. 30대 후반이 되니까 갑자기 오페라가 좋아졌습니다. 사람이 속물이 되니까 예전에 듣던 종교음악보다 사랑과 연애, 권력과 질투, 야망 등 인간사를 다룬 오페라가 좋더라고요. 순수한 것에 감동받기보다 세상사에 공감하게 된 거죠. 제가 사는 모습이 오페라에 다 있었어요. 어느 날 오페라를 보는데 내가 울고 있더라고요. 오페라 ‘리골레토’를 다시 보면서 여러 대목에서 울었습니다.”
해외 극장도 직접 찾아가신다고 들었습니다.
“대부분 출장을 겸해서 갑니다. 해외에선 뉴욕 메트로폴리탄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2001년 여름 처음 미국 여행을 갔습니다. 구치소에 산 이력 때문에 그전에는 비자가 안 나왔거든요. 그해 겨울에 다시 뉴욕을 갔는데, 그때 메트로폴리탄에서 오페라를 봤습니다. 그 뒤론 뉴욕에 갈 때마다 메트로폴리탄에서 오페라를 봅니다. 비행기 시간이 빠듯할 때는 극장 앞에 택시를 대기시켜 놓고 공연을 봅니다.”
에피소드도 적지 않겠습니다.
“자주 찾다 보니까 재밌는 일도 많았어요. 필라델피아 출장이었는데, 뉴욕에 들러 공연을 보려고 계획을 짰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연착해서 뉴욕에 도착하니 8시였어요. 그때 공연이 ‘돈 카를로’라고 5막, 3시간 40분짜리 공연이었어요. 일단 극단으로 갔는데 이미 2막이 끝난 상황이었어요. 티켓박스도 문을 닫은 터라 총괄 매니저한테 장황하게 상황 설명을 한 후에 겨우 입석을 얻어 자리에 앉았습니다. 4막 1장만 보고 공항을 갔지만, 최고의 공연이었어요.”
오로지 공연을 보러 해외에 갈 때도 있죠.
“일본처럼 가까운 곳은 주말에 공연 보러 가기도 합니다. 제대로 오페라 여행을 간 건 지난해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었습니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일주일 내내 공연만 보는 축제입니다. 고3 때 20년 안에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30년이 걸린 거죠. 전체 공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랜 준비가 필요한데, 저는 6개월 공을 들였습니다. 구두부터 턱시도까지 다 새로 맞추고요. 지난해가 제가 한국 나이로 쉰 살이 되던 해였거든요. 30년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저한테 주는 선물이었던 셈이죠.”
기대만큼 좋던가요.
“공연의 감동도 중요하지만 여행은 가기 전에 느끼는 설렘이 중요하잖아요. 준비하는 내내 설레고 즐거웠습니다. 공연 중간 중간 독일의 큰 숲과 냇물 사이를 산책했는데, 평지에 있는 숲속 길을 2~3시간 걷는 느낌도 색달랐습니다. 한국에서 등산할 때는 힘들어서 아무 생각이 안 났지만 평지를 산책하는 기분은 달랐어요. 생각도 정리되고 마음이 안정된다고 할까요. 그런 게 너무 좋았습니다.” 여행을 많이 다니시죠.
“지난해에만 25번 해외 출장을 갔습니다. 한 도시를 가면 다섯 가지는 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봐야 합니다. 둘째는 그 도시에서 가장 맛있는 걸 먹어 봐야 합니다. 셋째는 현지 하이엔드들이 즐기는 고급문화를 접해 봐야 합니다. 제 경우엔 오페라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다음은 밤 문화, 그리고 현지인들이 즐기는 문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영국 맨체스터에 가면 축구를 보고, 미국에 가면 야구를 봐야죠.”
오페라 외에 다양한 공연을 즐기시잖아요. 그게 어떤 의미입니까.
“오페라 외에도 클래식, 발레 등 공연장에 가는 횟수가 많습니다. 한국에서 하는 대부분의 공연은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레퍼토리만 좋으면 가니까요. 저는 공연장을 가는 게 제일 좋습니다. 얼마 전에는 대관령 음악축제에 다녀왔는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7년째 가고 있습니다. 공연이 끝난 연주자들에게 치킨에 맥주 사주는 것도 큰 즐거움이고요. 그런 게 제 삶에서 중요한 의미입니다.”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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