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훈 한미글로벌 회장의 ‘건축 기행 그리고 인생’(7)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탁월한 디자인으로 호주의 명물이 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건설 사업 측면에서는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꼽힌다. 공사 기간은 당초 계획보다 6년이나 늘어났고, 예산은 15배가 더 들어갔으니 말이다. 여기, 정확히 그 반대의 사례가 있다. 높이 381.6m, 102층 높이의 초고층 건물을 짓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3개월 남짓. 공사비도 당초 예상보다 획기적으로 절약했다. 실로 경이적인 건설 기록을 갖고 있는 이 건축물은 바로 미국 뉴욕의 대표 마천루인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1931년 완공된 이후 미국의 초고층 건물의 아이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연간 400만 명이 찾는 세계적인 관광명소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지어진 1930년대 초는 뉴욕에서 초고층 건설 붐이 일던 시기로, 도시의 마천루는 끝을 모르고 높아지고 있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건립 과정에서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크라이슬러 빌딩과 흥미로운 눈치전(戰)을 벌였다. 뉴욕의 자산가였던 크라이슬러의 월터 크라이슬러와 제너럴모터스(GM)의 존 래스콥은 누가 가장 높은 건물을 지을 것인가를 두고 경쟁을 벌였다. 당초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건설 계획안을 보면 높이가 1050피트로, 크라이슬러 빌딩(1048피트)보다 2피트 정도 높다. 하지만 실제 완공된 크라이슬러 빌딩은 1130피트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계획안보다 80피트 정도 높았다. 크라이슬러 측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보다 더 높은 건물을 짓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비밀리에 높이 56m짜리 첨탑을 조립해 뒀다가 완공 바로 직전에 올린 것이다. 그러나 존 래스콥도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크라이슬러 빌딩이 애초 계획보다 높아질 것을 미리 예상해 건물을 1250피트(381.6m)로 완성했다. 그렇게 두 건축주는 머리를 써가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높이 경쟁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결국 승리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1973년 세계무역센터가 건립되기 전까지 세계 최고(最高) 빌딩 자리를 42년 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처음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건설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GM을 이끌던 존 래스콥이었다. 그는 피에르 뒤퐁과 함께 이 건설사업의 주요 투자자이기도 했다. 이 건설사업에 인가를 내준 사람은 전 뉴욕 주지사이자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앨프레드 E. 스미스로, 그 후 엠파이어스테이트 법인의 대표로서 빌딩 건설사업을 주도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설계는 슈리브, 램, 하먼이 속한 뉴욕의 설계회사(Shreve, Lamb and Harmon Associates)가 맡았다. 이들은 유명 시공업체인 스타렛 브러더스&에켄(Starrett Brothers and Eken)사와 긴밀히 협력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1930년 3월 17일 착공부터 1931년 5월 1일 준공식까지 불과 13.5개월 만에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라는 ‘명작’을 만들어 냄으로써 현대 건축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프로젝트를 완수한 팀이 됐다. 381.6m 높이, 42년 동안 세계 최고(最高) 자리 지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뉴욕 도심 한가운데, 당시 유명한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건설은 이 호텔 철거공사와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1930년 4월 7일 첫 번째 구조 기둥이 박히면서 시작된 공사는 불과 6개월 만에 건물 구조체인 철골이 86층까지 올라가는 기염을 토했다. 더구나 타워크레인이 개발되지 않았던 때라 인부들은 데릭(Derrik)이라는 효용성이 떨어지는 중장비를 사용해 작업을 해야 했다. 콘크리트 펌프카 등도 없는 시절에 인력으로 콘크리트를 운반하는 등 재래적인 환경 속에서 이뤄 낸 성과였기에 더욱 대단했다. 공사가 한창일 때는 매일 트럭 500대 분량의 자재를 운반하고 보관해야 해 어려움이 많았는데, 이때 건물 내에 임시 철도를 만들어 자재들을 각 층으로 신속하게 운반했다.
고용된 3500여 명의 인부들 또한 생산성이 높았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 시기여서 하루에도 수백 명씩 실직자들이 거리로 나왔다. 직장을 잃은 건설 분야의 우수한 인력들을 이 공사에 대거 동원할 수 있었다. 이들은 하루 8시간씩 주 5일만 근무하면서도 피크 시에는 하루에 한 층씩 골조를 쌓아 올렸다. 1930년 8월, 한 달에 22일을 일했는데 22개 층의 골조공사를 완성했다. 하루가 다르게 건물이 올라가는 데다 인부들이 위험천만하게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초고층 빌딩 공사를 하다 보니 뉴욕 시민들에게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공사 기간 동안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운집했다. 사진작가 루이스 하인은 이 건축 과정을 사진으로 남겼는데, 고층 철골에 매달려 외줄타기 하는 인부의 모습 등을 기록한 1000여 장의 사진들은 너무 아찔해 지금 봐도 오금을 저리게 한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1931년 4월 11일 완공됐고, 5월 1일에 준공식을 거행했다. 정확히 13.5개월이 걸렸다. 높이 381.6m, 102층 높이의 초고층 건물을 당초 계획했던 15개월보다 1개월 반이나 단축해 지은 것이다. 공사비 역시 처음 예상했던 3400만 달러보다 1000만 달러가량 절약한 2471만 달러만 들었다.
이렇듯 빠르고 정확한 공사가 가능했던 데는 발주자와 설계자, 시공자의 긴밀한 협력이 주요했다. 특히 여러 업무를 배분하는 일에 있어 건설업자라기보다 건설 관리자의 역할을 한 스타렛 브러더스&에켄사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작업의 상당량을 하도급으로 주었는데, 이는 전체 시공업체들이 주로 자체적으로 작업하는 당시의 관행과는 달랐다. 특히 스타렛 형제 가운데 해군 대령 출신이던 동생이 군대식 관리 기법을 도입해 건축 공정이 딱딱 맞아떨어지도록 이끌었다. 스타렛 브러더스&에켄사의 혁신적인 관리 방식은 이후 초고층 빌딩 건설을 비롯한 현대식 건설 관리의 토대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정작 시공사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완공된 후 “어떻게 이렇게 멋진 건물을 빨리 지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우리가 잘했다기보다는 시공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설계해 준 훌륭한 설계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답했다. 시공사와 설계사가 서로에게 공로를 돌리는 모습은 또 한 번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1933년 영화‘킹콩’의 무대로 유명세를 탄 이래 지금까지 100여 편의 영화에 배경으로 등장했다. 1945년에는 안개 낀 토요일 아침 B-35 폭격기가 사고로 79층을 들이받아 14명이 죽은 사건도 있었다.
지어진 지 80여 년이 지난 이 건물은 여전히 뉴욕의 랜드마크다. 어둠이 깔리면 건물 외벽에는 화려한 레이저 조명의 향연이 펼쳐지고, 매년 1860개 계단을 10분여 만에 오르는 대회도 열린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약 1억 달러 이상 투자해서 친환경 그린 빌딩으로 재탄생해 에너지를 연간 38% 절감하고 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건립 당시 최고의 수준으로 근사하게 지어진 이 건물은 대공황을 겪으며 힘들어하던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희망을 주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향한 그들의 애착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건축은 시대의 거울이라는데 이토록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건축물이라니, 이 프로젝트는 그야말로 대성공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다.
정리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사진 제공 김종훈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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