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시인 윤홍천

외유내강. 소년 같은 외모도, 차분한 말투도 더없이 부드러웠지만,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 강한 의지와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클래식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콧대 높은 그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아 버린 이 마성의 피아니스트는 그러나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다고 고백했다.

시인의 감성은 그렇게 그의 삶을 통해 건반 위에 표현되고 있었다.
[BREAK FOR MUSIC] 세상을 보는 호기심으로 행복을 연주하다
지난 7월 9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 금호아트홀에서는 프란츠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B단조’가 흐르고 있었다. 유일하게 조명이 켜진 무대 위에서 연주에 몰입해 있는 이는 바로 피아니스트 윤홍천(33). 다음 날 같은 공연장에서 있을 공연을 위해 연습 중이던 그의 연주가 계속된 30여 분간 공연장 안에는 그야말로 폭풍이 몰아쳤다. 연주 시간이 길고 다양한 변주로 피아니스트를 ‘시험’에 들게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까다로운 곡이지만, 그의 감성을 거쳐 표현된 연주는 마음을 뒤흔들고도 남았다. 소리만이 아니었다. 표정과 몸짓 등 온몸으로 발산하는 카리스마는 왜 그를 ‘미래의 거장’이라 일컫는지 설명해 주었다.

긴 연주가 끝난 뒤 쑥스러운 듯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그는 영락없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말 한 마디 나누기 전이었지만, 어쩐지 맑은 내면이 감지되는 첫인상. 표정 하나로 많은 이야기를 건네 오는 그는 분명 사람들이 부르는 것처럼 ‘피아노의 시인’임에 틀림없었다.


화려한 콩쿠르 경력 대신 무대와 음반 활동을 택하다
이미 유럽에서는 ‘보석 같은 피아니스트’라 불리며 현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는 그가 국내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지는 불과 3년. 30대 초반이라는 젊은 나이까지 감안하면 그는 이제 시작하는 입장이다. 음악이 주는 감동은 동서양이 따로 없는 법.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국내외 무대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한국 무대라서 특별히 더 편안한 건 없어요. 제 성격이 무대에 연연하기보다 스스로 제 자신에게 기대하는 바를 채우고 싶다는 목표 의식이 더 강하기 때문일 거예요.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는 ‘나를 위해’ 연주한다고 했고,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청중을 위해’ 연주한다고 했지만, 저는 무대에 섰을 때 좋은 무대를 선보여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도 제 자신을 만족시키는 연주는 중요하죠. 그래야 좋은 연주가 나오거든요. 다만 한국 무대가 더 좋은 점이라면 젊은 청중들이 많아 신선한 에너지를 얻는다는 거예요. 그 덕분에 사진과 음악이 어우러진 ‘슈베르트 여행기’처럼 다양한 형태의 무대를 시도할 수도 있었죠.”

국내 활동이 확대되고 있으나 여전히 그의 주 무대는 유럽이다. 클래식의 본고장으로 콧대 높은 그곳에서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그가 유럽 무대에 더 집중하는 데는 ‘유럽에서 꾸준히 활동하는 한국인 연주자’가 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깔려 있다. 그의 존재감이 남다른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거창한 타이틀이니 티켓파워니 하는 외형의 화려함이 아닌 음악적 깊이와 감동으로 인정받으며 울림을 주고 있는 것.

그의 지난 음악적 행보 또한 같은 맥락에 있다. 사실 그는 국내 연주자들의 프로필에 따라붙는 화려한 콩쿠르 이력처럼 내로라할 입상 경력이 있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다. 2008년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에서 영재특별상을 받고, 2009년 클리블랜드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3위를 한 정도가 거의 전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음악이 많은 이들에게 더 큰 감동이 될 수 있었던 건 콩쿠르에 집중하는 대신, 연주와 음반이라는 연주자의 ‘기본’을 따른 데 있었다. 2011년 독일 바이에른 주 문화장관으로부터 젊은예술가상을 받았고, 2013년에는 독일 빌헬름 켐프 재단 최초의 동양인 이사로 취임한 것도 연주 활동과 음반을 통해 현지에서 인정을 받은 덕분이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는 어릴 적부터 콩쿠르에 적극적인 편이 아니었다. 다섯 살에 유치원 선생님이 애국가를 반주하는 걸 보고 피아노에 반해 동네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던 그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피아노가 좋아서 칠 따름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에 입학하고 예원학교에 수석 입학할 정도로 연주 실력이 뛰어났지만 그 또한 좋아서 열심히 한 결과일 뿐이었다. 그러나 입상 경력을 중시하는 분위기상 콩쿠르에 자주 나갈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흥미가 떨어지고 연습도 즐겁지 않았다. 예원학교 재학 중이던 1996년 미국 보스턴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로 유학을 간 건 그래서였다. 하지만 콩쿠르로부터 자유로워지기까지는 그 후로도 시간이 걸렸다. 독일 하노버 국립음악대에 다닐 당시, 주변에 세계적인 콩쿠르 입상자들이 차고 넘쳤으니 그도 입상 타이틀을 가져야만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동안 피아노를 치면서 불안했던 게 요리사로 비유하자면 하고 싶은 요리를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입맛에 맞추는 요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어요. 누구는 신맛을 좋아하고 또 누구는 단맛을 좋아하니 이건 레몬도 아니고 망고도 아닌 맛을 내야 했던 거죠. 또 콩쿠르에 나가서도 공개되는 점수를 보면 어떤 사람은 엄청 좋게 평가하는데 또 어떤 사람은 전혀 반대로 평가하니 그 기준도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아닌 것 같은데 또 해야 할 것 같고, 부담과 갈등이 컸죠. 제가 한국 사람이라 그랬던 것 같아요. 사실 유럽 시장에선 콩쿠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콩쿠르라는 건 내가 발전하기 위해 나가야 하는 거지,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게 아니잖아요. 콩쿠르에서 나보다 등수가 높다고 해서 피아노를 나보다 더 잘 치는 게 아니라는 걸 후배들이 좀 알았으면 좋겠어요. 음악을 어떻게 점수로 매기겠어요.”

그렇게 오랜 갈등의 시기를 거친 그는 2009년 클리블랜드 콩쿠르 3위 입상 후 경연 자체에 회의를 느끼고 다른 방향을 택했다. 독일 음반사에 직접 연주 CD를 보내 음반 제작을 제의하고, 유명 지휘자에게 협연을 위한 오디션을 요청하기도 하는 등 무대와 음반 활동을 통한 청중들과의 직접적 교류를 하는 것이었다.


피아노는 삶을 살아가는 방식
나이도 어린 동양인의 연주에 유럽인들이 열광하는 건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그의 음악이 가진 진실성이었고, 또 하나는 문화와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연주에서도 자연스레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전자가 타고난 면이라면, 후자는 일정 부분 오랜 유럽 생활이 가져다준 것이다.

“그들의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고, 음악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좋아하는 것 같아요. 사실 한국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외국에서 살았던 시간이 더 긴데 그로 인해 얻어진 양쪽 문화에 대한 이해가 제 장점인 것 같아요.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을 함께 갖고 있으니 작가들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죠. 누군가 제 음악에 선(線)이 있다고 하면서 ‘동양적인데 동양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표현한 적이 있어요. 그런 양면성이 제 음악의 색깔인 것 같아요.”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음악에 감동받는 데는 이처럼 음악과 작곡가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해 그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세밀한 감성을 더한 것에 있다.
[BREAK FOR MUSIC] 세상을 보는 호기심으로 행복을 연주하다
“사람들은 제가 시적인 표현을 한다고 말하는데, 저는 다른 사람보다 감정 표현을 잘하려고 하지 않아요. 다만 어떤 사물을 봤을 때 더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더 정확한 표현이 가능한 것 같아요. 로맨틱한 곡 안에도 로맨틱뿐만 아니라 다양한 감정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 듣는 사람들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를테면 쇼팽은 그냥 아름다운 게 아니고 열정과 차가움을 갖고 있으며, 모차르트도 그저 밝고 쾌활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 어두운 면도 함께 있거든요. 모차르트의 ‘피아노 콘체르토 C단조’는 그 어떤 곡보다 어둡고 비관적인 곡인데, 깨끗하게만 연주한다면 그 느낌을 이해할 수 없지 않겠어요.”

그가 ‘해석’과 ‘이해’에 방점을 찍는 건 ‘피아니스트는 작곡가에게 빚지고 있다’는 강한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작곡가는 일류, 피아니스트는 이류”라고 말하는 그는 훌륭한 음악은 아무나 만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뿐만 아니라 작품을 이해하는 과정 자체가 즐겁고 재미있으니 스스로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단계인 셈이다.

그의 이야기들로 짐작했겠지만, 피아니스트 윤홍천에게 음악은 그냥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따라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지만, 그 생각 또한 어떤 식으로든 연주에 영향을 끼친다. 하다못해 발코니에 심은 씨앗이 싹 트는 것을 지켜보는 그 소박한 행복마저 음악으로 발현되니 피아노와 무관한 삶이란 없다. 그러니 책과 영화를 즐기고 세상을 온통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의 음악이 다른 이들의 음악과 다른 건 어쩌면 당연해 보였다.

“제게 피아노는 하나의 우주예요. 피아노 안에 중심도 있고 배경도 있고 모든 걸 갖추고 있죠. 피아노를 치는 일이 가장 행복하고 지금껏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지만, 박수를 받을 때 무대에서 내려오고 싶다는 마음이 커요. 그럴 수 있는 건 식물이 꽃을 피우는 게 행복하고 맛있는 커피 한 잔에도 제 스스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물론 아직 저는 30대 초반이고, 피아니스트가 40대부터 본격적으로 꽃이 피니 아직도 더 발전해 가야 할 현재 진행형의 상태죠.”

그를 만나고 며칠 후 현대음악의 거장이라 불리는 세계적인 지휘자 로린 마젤의 타계 소식이 들려왔다. 수차례 내한 공연을 했고 장한나의 스승으로 또 국내 연주자들과의 협연 등으로 국내 클래식 팬들과 친숙한 그인지라 안타까움이 더 컸지만, 실은 소식을 전해들은 뒤 먼저 윤홍천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는 올해 12월, 마젤이 이끄는 독일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로 돼 있었다. 마젤이 직접 발탁해 뮌헨 필하모닉 전용 홀에 서게 될 최초의 한국인 피아니스트로서, 지난해 이와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자체로 큰 반향을 일으킬 만큼 대단한 이슈였다. 그 자신에게도 마젤과의 협연은 꿈의 실현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1994년, 내한한 그의 무대를 보며 언젠가 함께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그 ‘꿈’을 현실로 만든 건 다름 아니라 그 자신이었으니 더더욱 큰 의미가 있었다. 지난해 초 직접 마젤에게 음반과 편지를 보냈고, 오디션을 거쳐 성사된 협연이었던 것. 그러니 클래식 팬들에겐 로린 마젤의 타계가 두 가지 비보인 셈이다. 불행 중 다행히도 12월, 뮌헨 필하모닉과의 연주는 예정대로 진행된다니 위안을 삼을 수밖에.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