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만든 고전들_여덟 번째 ‘아리랑’

한민족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노래가 바로 ‘아리랑’이다. 민요로 익숙한 ‘아리랑’을 영화나 소설로 먼저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터. 형식을 무관하고 ‘아리랑’이 가진 정서는 일관된다. 힘든 삶의 굽이굽이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고비를 넘어서는 강인한 정신력과 힘을 담고 있는 ‘아리랑’은 이념마저 넘어서며 한민족의 뿌리가 되고 있다.
일러스트 추덕영
일러스트 추덕영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1964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남북한 대표팀이 회동을 가졌다.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의였지만 휴전 10년 만에 남북이 만난 터라 분위기는 냉랭했다. 결국 단일팀 결성은 좌절됐다. 하지만 이 회의에서도 아주 화통하게 합의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국가(國歌)를 ‘아리랑’으로 하자는 문제였다. 1960년대 냉전의 시대 속에서 남북한의 합의는 쉽지 않았으나 그 모든 사정에도 불구하고 ‘아리랑’에 대한 민족적 지지는 어렵지 않았다. 그만큼 한국을 대표하는 노래가 ‘아리랑’이라는 사실은 이념의 고개조차 훌쩍 넘어섰다.

재작년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됐다. 한민족과 국가의 문화적 자산에 대한 세계적 공인이다. 일제강점기에도 만주와 간도, 일본과 대만에서 불리던 노래가 ‘아리랑’이다. 600여 년 전에는 한민족의 노래이지만, 동아시아 근방 곳곳 한민족이 머물렀던 곳마다 불리던 노래다.


‘아리랑’이 가진 슬픔에 대한 공감과 생명력
1926년 나운규의 무성영화 ‘아리랑’은 이런 바람과 지향이 담겨진 결과다. 3·1 만세운동 후 한동안 조용하던 길거리를 나부끼는 노래가 바로 ‘아리랑’이었다는 것은 ‘아리랑’의 현재성을 말해준다. 영화 ‘아리랑’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3·1 만세운동 이후 투옥된 한 청년의 누이가 악덕 지주의 마름에 의해 겁탈당할 위험에 처하자 청년은 결국 마름을 죽이고 일본 순사에게 체포된다. 주인공 청년이 순사에게 끌려 고개를 넘어갈 때 ‘아리랑’ 민요가 울려 퍼지는데, 앉아서 구경하던 관객들이 같이 합창하며 목 놓아 울다가 급기야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감동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농촌의 피폐한 현실을 배경으로 3·1 만세운동 이후 정신이상을 앓게 된 청년과 악덕 지주의 힘을 등에 업고 청년의 누이를 겁탈하려는 마름의 관계는 조선이 놓인 현실의 단면이었다. 이 부박한 삶을 그리면서 ‘아리랑’을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영화 상영 첫날 검열 소란이 있었지만 당시 관객들은 문짝이 부셔질 정도로 밀려들었다고 한다. 이 영화 이후에도 일제강점기 내내 20여 종의 ‘아리랑’ 노래가 변주돼 조선 곳곳에서 불렸다.

원래 ‘아리랑’은 강원도를 중심으로 경기, 충청, 전라, 경상 등에 걸쳐 전국적으로 향유되던 민요로 남북한을 통틀어 60여 종 3600수 정도가 되는 노래다. 노래뿐만 아니라 영화, 소설, 시로 각색된 것을 포함하면 그 범위는 가히 놀라울 정도다. ‘아리랑’을 민요로 떠올리는 세대도 있지만, 가요로 떠올리는 젊은 층도 있으며, 노래가 아니라 소설이나 영화를 먼저 얘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다만, ‘아리랑’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슬픔에 대한 강한 공감과 생명력은 그 뿌리에 놓여 있다. 그중 하나로 1960년대 이후 청년들의 필독서였다고 전해지는 님 웨일즈의 ‘아리랑’도 빼놓을 수 없다. 1984년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출판되기 전부터 읽혔던 책이다. 이 책은 1938년 중국에서 활동했던 혁명가 김산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미국 여성 님 웨일즈가 김산의 삶을 수기 형식으로 회상하는 이야기인데, 그 삶 속에 녹아 있는 강인한 정신과 의지가 가히 상상 이상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간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일제강점기 혁명가의 숨어 있는 정신에 흠칫 놀라울 정도다. 그 때문일까. 리영희 선생이 일본 서점에서 ‘아리랑’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 이 서적을 잡자마자 읽고 난 후 서울로 돌아와서도 그 흥분을 잠재우지 못해 서로 추천하며 돌려 읽었다고 전해지는 책이다.

웨일즈의 ‘아리랑’은 1941년 뉴욕에서 초판 된 후 일본에서는 1953년부터 시작돼 1965년경 성공적으로 대중에게 읽히기 시작했으며 중국어 번역판은 1977년 홍콩에서 출판됐다. 정작 한국에서는 1984년경에야 겨우 출판됐다. 미국인 웨일즈의 시선에 포착된 이름 없는 조선 청년 김산은 조선인의 결기와 힘이다. 알려지지 않던 한 청년의 삶에서 기약 없는 미래를 버티는 힘과 그 속에 놓인 정신력을 엿보았던 것이다. 웨일즈는 김산을 떠올리며 ‘김산’이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는 아리랑 열두 고개를 넘었지/ 마지막 고개는 그의 운명/ 그는 1938년에/ 사형당했다고 했네// 장엄한 오페라의 비극과도 같은/ 선과 악의 싸움/ 중세시대와도 같은 어둠에 의해/ 새로운 사상이 파괴되었네// 그는 아리랑 열두 고개를 넘었지/ 고개마다 대패했지만/ 스스로에게만은 승리를 얻었네/ 그곳에서만은 후퇴하지 않았네”라는 내용이다. 웨일즈가 보기에 ‘김산’이라는 한 청년을 통해 전해들은 ‘아리랑’은 삶의 어려운 구비와 고개의 이름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힘이다. 김산은 옥중에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마지막 고개를 넘어간다”라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대해 언급하지만 이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열세 구비를 넘으리니”라고 해서 그 고개를 넘어서는 힘에 대해 언급한다. ‘아리랑 고개’는 매번 마지막을 고하고 싶을 정도로 곤고하기도 하지만, 이내 노래를 부르며 마지막이 아닐 것이라고 믿는 힘이기도 하다. 열두 고개를 넘어선 자가 다시 열세 번째 고개를 이야기하는 끝도 없는 힘의 이야기다.


한국인의 역사가 담긴 ‘현재’의 노래
‘아리랑’은 신나고 즐거운 노래이기도 하지만, 그 힘의 근원은 곤핍한 삶에 대한 응시와 그 삶을 이겨내기 위한 힘과 의지가 있다. 따라서 ‘아리랑’은 시대를 넘어 그 누가 불러도 좋을 만큼 다양하게 변주됐다. 실제 강원도에서 애창되는 ‘정선아리랑’ 편을 보면 “만수산 검은 구름이 몰려든다”고 고민하는 ‘수심 편’이 있기도 하고,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 달라”고 애원하는 ‘애정 편’이 있기도 하다. 또 조선왕조가 세워지자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고 숨어든 고려왕조 충신들의 설움과 울분이 담긴 노랫말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가 무엇이든 당시 사람들이 품고 있던 생활 감정들을 녹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명장면으로 기억되는 영화 ‘서편제’의 ‘진도아리랑’ 장면은 일상의 평화로움 속에 깃든 울울한 정서가 아름답게 그려진다. 멀리 고갯길을 넘어서는 늙은 노래꾼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남동생 세 사람이 ‘아리랑’을 부르며 화면에 등장하더니 이내 조금씩 꿈틀꿈틀 형체가 드러나자마자 그 리듬과 가락이 황톳길에 가득 찬다. “개똥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노래, 그 속에서 들리는 “청천하늘에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속엔 수심도 많다”는 울울한 정서, ‘수심’의 내용과 깊이를 알지 못하더라도 제 나름의 삶과 역사를 통해 지레 공감되는 이야기다. ‘잔별’의 비유로 제 존재를 드러내는 늙은 아비의 우렁우렁한 노래 속에서도 이내 ‘수심’을 슬쩍 얘기하는 이 마음의 결이 ‘아리랑’이다.

한국에서 ‘아리랑’은 단지 과거의 노래가 아니다. 늘 현재 속에서 불리던 노래이고,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매번 달랐지만 다른 만큼 생생하다. 하나의 노래에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가 이토록 많이 담긴 노래를 찾아볼 수 없으며, 하나의 노래에 올림픽에서부터 한국전쟁까지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노래다. ‘잔별’들의 노래였으나 실은 그 잔별들의 마음의 힘을 느낄 수 있는 노래다. 그러나 이 노래가 해방 이후 잘 불리지 않았다는 것, 트로트와 가요, 이야기로 그 맥을 잇고 있으나 중요한 것은 ‘아리랑’ 민요가 고갯마루를 넘어서는 공동체의 힘을 뿜어내는 노래로 잘 애창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는 저마다의 고개를 넘어서는 잔별들의 노래이기도 하지만 노래라는 것이 본디 그러하듯, 선창되고 후창되며 흥얼흥얼 합창되는 ‘민요’였다는 것, 즉 이렇게 같이 부르며 고갯마루를 넘어서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인의 힘이란 같이 부르는 노래의 힘일지도 모르겠다.


박숙자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