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을 가다 제주도
올레길, 영어교육도시, 의료특구 등 몇 년 동안 이슈가 꾸준했던 제주도는 자산가들 사이에서 매력적인 투자처로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최근에는 중국 자금이 유입되면서 조용했던 시골마을이 또다시 들썩이고 있다. 제주도 자산가는 예로부터 양식업, 농업 등으로 부를 일으킨 전통 부자들과 외지에서 ‘돈을 싸들고’ 들어온 신흥 부자로 크게 나눌 수 있다.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가 발표한 ‘2013 한국부자보고서’에 의하면 제주의 금융 자산 10억 원 이상 개인 자산가는 1300여 명이다. 2014년 제주 인구가 6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보이는 만큼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인을 비롯해 서울과 수도권 등 외지에서 제주로 정착하는 ‘큰손’들이 가파르게 늘고 있어 몇 년 안에 도내 부(副)의 지형이 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제주은행에 따르면 2013년 1월 기준 제주도 내 총 예수금은 16조3181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8% 증가했다.투자 자산 중 주식 비중 10% 미만
제주의 전통 부자들은 50~70대를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양식업자와 선주, 감귤 등 농업으로 돈을 번 농장주, 그리고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테마파크, 박물관 사업자 등이 대표적 자산가군으로 꼽힌다. 관광지의 특성상 호텔, 펜션 등 숙박업을 하는 자영업자나 이름난 음식점의 사장들도 일부 여기에 포함된다. 다른 지역과 달리 제주에 본사를 둔 상장 대기업은 다음커뮤니케이션 정도로 최고경영자(CEO)형 자산가는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제주 부자들은 섬사람의 특성상 보수적 색채가 짙은데, 이는 투자 성향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일부 젊은 층을 제외하고는 정기예금, 채권, 보험 등 안전자산을 선호한다. 제주에 있는 금융기관들은 제주 전통 부자의 자산관리에서 주식투자 비중을 10% 미만으로 보고 있다. 반면, 서울 및 수도권에서 이주해 온 자산가들은 투자 성향이 비교적 공격적이다. 이들은 저축성보험, 즉시연금보험, 종신연금보험과 같은 안전자산뿐 아니라 직접 주식 거래를 하는 경우도 많다. 물가연동국채, 브라질 채권 등 절세 상품에 관심이 많고, 최근에는 중위험·중수익 상품으로 알려진 월지급식 주가연계증권(ELS) 상품을 선호한다. 김일환 제주은행 고객지원부 WM팀장은 “제주의 나이 든 자산가들은 증여와 상속에 관심이 많지만 수도권 자산가들에 비해 액션플랜이 부족한 편”이라며 “평균 자산이 상대적으로 적은 요인도 있지만 굳이 증여세를 부담하면서까지 상속세 절세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론도 크다”고 말했다. 제주도 자산가 가운데는 각종 토지 개발로 특수를 누린 경우가 많다. 지역 곳곳의 개발 호재로 인해 부동산 가격이 상승한 데다 2011년 ‘세계 7대 자연경관지’로 선정되면서 외국인 관광객이 증가한 데 따른 것이다. 실제 제주시가 2009년 대정 지역 제주영어교육도시를 개발하면서 토지 보상을 했는데, 이때 20억 원이 넘는 ‘돈벼락’을 맞은 땅 부자들이 여럿 나왔다는 게 현지 부동산개발업자들의 이야기다.
국토교통부 공시지가를 보면 지난해 12월 기준 전국 땅값이 0.16% 상승한 가운데 제주도(0.24%)와 세종시(0.31%)의 땅값 상승폭이 가장 두드러졌다. 제주시에서는 기존 시청 주변의 구제주가 중심이었다면 4~5년 전부터는 연동 신시가지 주변이 신제주로 불리며 새로운 부촌으로 떠올랐다. 제주 특1급 호텔인 그랜드호텔을 비롯해 호텔 20여 곳이 모여 있는 바오젠 거리의 상가 임대료와 권리금은 최근 2년 동안 2배 가까이 상승했다는 것이 부동산 업계의 귀띔이다. 부동산개발업체 드림랜드의 진성효 대표는 “신제주권은 첨단기술단지, 영어교육도시 등의 특화된 콘텐츠를 갖춘 곳이 지속적으로 개발되고 있어 길게 보면 주택 임대 수요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 자산가들이 돈을 많이 묻어 놨다”고 말했다. 신제주권이 뜨면서 자산가들이 대거 이주한 노형동 등 신시가지의 고급 아파트들은 평균 분양가가 3.3㎡당 1000만 원을 호가한다. 상가 투자도 늘고 있다. 김일환 팀장은 “연동 일대에 자리 잡은 지역 부자들은 건물을 지어 1, 2층은 안정적인 상가 임대수익을 올리고 3, 4층은 외지인들을 대상으로 연세(1년 단위의 집세)를 받아 주택 임대소득을 얻는 방식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서귀포시는 올해 말 준공을 목표로 서호동과 법환동 일대에 혁신도시단지가 건설하고 있다. 여기에 공무원연금관리공단을 포함한 9개의 공공기관이 입주하면 주변 유동 인구가 연 약 15만4000명 정도 발생할 것으로 예상돼 주변 땅값이 벌써부터 들썩이고 있다. 국제학교 인근 ‘반정착’ 자산가 많고, 수입차 급증세
육지에서 제주도로 내려온 자산가들은 도심보다 드넓게 펼쳐진 바다, 우거진 숲 등 천혜의 자연환경을 누릴 수 있는 곳을 찾아 정착하는 추세다. 4~5년 전부터 해안도로를 낀 지역을 중심으로 바다와 멀지 않고 숲이 우거진 자연 속에 별장을 짓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제주공항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애월읍은 제주도 전원 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 귀농자나 은퇴한 자산가들에게 인기가 많다. 가수 이효리·이상순 부부와 가수 이정이 이곳에 별장을 짓는 등 스타들의 세컨드 하우스도 속속 들어서고 있다. 2011년 대정 지역에 문을 연 내국인 대상 국제학교 역시 육지 자산가들의 ‘제주행’을 부추겼다. 연간 학비가 최대 5000만 원에 달해 주로 부유층이 자녀를 보내는데, 도민보다 수도권에서 내려와 ‘반정착한’ 자산가들의 자녀가 많다. 이 지역 한 부동산중개업자는 “실제 국제학교 등하교 시간대에 학교 정문에 고급 외제 승용차가 줄을 잇는 진풍경이 펼쳐진다”며 “국제학교 인근 아파트에는 고급 세탁소, 테이크아웃 커피점 등 수도권에서 교육을 목적으로 온 학부모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시설들이 속속 입점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주 부자들의 주요 소비처는 어디일까. 은행권 VIP 담당자들은 “자산가들은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즐길 수 있는 골프, 승마, 요트 등에 지갑을 열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그중에서도 요즘 새 재테크 수단으로 뜨는 것이 ‘마(馬) 테크’다. 말을 소유한 마주는 출주한 경주마가 우승할 경우 우승 상금을 최대 80%까지 가져갈 수 있는데, 1000여만 원에서 최고 7억 원까지 배당된다. 우승을 많이 할수록 배당수익이 높아지며, 초기 진입 비용도 적지않아 부자들이 관심을 많이 가진다는 설명이다. 고급 수입차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제주도는 2014년 3월 기준 수입차가 6508대로 2012년 말 4714대 대비 38% 늘어났다. 2008년 크라이슬러가 수입차 업체로는 처음 제주전시장을 오픈한 데 이어 지난해 BMW와 폭스바겐이 잇따라 전시장을 열었다. BMW 제주지점 관계자는 “오픈 당시 중국인이 4000만 원대 ‘미니 쿠페S’를 일시불로 구매하는 등 외국인 손님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자녀를 제주도 국제학교에 보내기 위해 따라온 학부모 등 한국인 고객도 급증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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