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주년 몽고식품(주) 김현승 사장

몽고간장은 한때 경남 마산(지금의 창원)의 명물이었다. 1970년 터전이던 경상도 지역을 넘어 전국구로 유통망을 넓혔고, 지금은 미국, 유럽 등 전 세계가 먹는 케이푸드(K-Food)가 됐다. 강산이 열 번도 더 변하는 동안 3대가 똘똘 뭉쳐 오로지 간장 외길인생을 묵묵히 걸어온 결과다. 고(故) 김홍구 초대 회장과 김만식 회장에 이어 몽고식품을 이끌고 있는 김현승(47) 사장은 “우리 가족 몸에는 피가 아니라 간장이 흐른다”고 말한다. 이 한 줄에 몽고식품(주) 109년이 녹아 있다.
[SUCCESSOR] “우리 가족 몸에는 피가 아니라 간장이 흐른다”
올 초 종영한 화제의 TV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는 무학소주, 몽고간장, 시민극장 등 마산 3대 부잣집 자제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극중 주선자는 이들을 미팅 자리에 불러 모으며 이렇게 큰소리친다. “마산 돈은 이 오빠야들이 다 들고 있다고 보면 된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지만 ‘무려’ 109년 역사를 자랑하는 몽고간장이 마산을 대표하는 향토 기업 중 하나라는 건 분명하다. 드라마에 따르면 김현승 몽고식품 사장은 마산 돈 다 들고 있는 ‘오빠야’들 중 한 명인 셈. 김 사장은 “방송이 나간 후 실제로 지인들이 진짜 마산 3대 부자가 맞느냐고 물어 보더라”며 “부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몽고간장이 해방 이후 굴곡진 우리 역사와 함께 해 왔다는 점만은 틀림없다”고 말하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몽고식품은 1905년 일본인 야마다 노부스케(山田信助)가 마산의 한 우물 옆에 세운 장유공장에서 출발했다. 이 우물은 고려시대 충렬왕 때 여·몽 연합군이 쓰던 것이어서 ‘몽고정(井)’으로 불렸는데, 훗날 몽고식품이라는 회사 이름도 여기에서 착안했다.

1931년, 당시 17세였던 고 김홍구 전 회장은 이 장유공장에 간장 배달원으로 일하다 성실한 태도로 신임을 얻어 간장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됐다. 1945년 광복 후 야마다가 일본으로 돌아가자 그는 공장을 매입해 사장으로 취임했고 이듬해 회사 이름을 ‘몽고장유공업사’로 바꿨다.

1971년 김홍구 전 회장의 타계로 대를 이어 회사를 경영하게 된 장남 김만식 회장은 지방에 뿌리를 둔 몽고식품을 전국 시장점유율 2위, 부산·경남지역 시장점유율 80%, 세계 30여 개국에 한국의 장맛을 수출하는 우리나라 대표 장류업체로 키웠다.


“10살 때부터 방과 후 간장공장에서 일했어요”
‘간장 가문’의 장손으로 태어난 김 사장은 어릴 적 간장에 밥을 비벼 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10세 때부터는 학교가 끝나면 집 옆에 있던 공장으로 출근(?)해 직원들과 함께 일을 했다. 주문이 들어오면 자전거 뒤에 간장 통을 싣고 마산 자산동 시장 길을 내달렸다. 하지만 머리가 굵어지면서 진로에 대한 고민 역시 깊어졌고, 대학을 서울로 진학하면서는 가업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증권사나 광고회사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당시 유행했던 자동차 튜닝숍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튜닝숍을 하고 싶으니 돈 좀 빌려 달라”고 말했다가 “간장이나 열심히 팔아라”라는 한마디에 좌절했다. 타고난 운명은 한낱 개인의 바람보다 강했다. 결국 그는 1992년 몽고식품에 입사해 영업부터 배웠다. 가족경영을 하는 다른 기업들처럼 “장남이니까 네가 물려받거라”가 아니었다. 김만식 회장은 김현승 사장을 비롯한 삼형제가 철저하게 경쟁하도록 했다. 당시 창원공장을 맡았던 둘째 동생과의 선의의 경쟁에서 판매법인 유통을 맡았던 그가 한판승을 거둬 1999년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해 오던 일이니까 마냥 멋있어 보였어요. 그런데 현장은 생각보다 혹독했죠. 당시 고객 서비스 부서에서 일을 했는데, 간장이 먹을거리다 보니 반품이나 고객 불만이 적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명함을 판 날, 양복을 차려 입고 거래처를 찾아갔는데 화가 난 식당 주방장이 간장을 가지고 오더니 저한테 뿌리더군요. 이거 안 되겠다 싶었지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요? 다음번에는 회사 점퍼를 입고 갔습니다.(웃음)”

김 사장은 입사 후 현장에서 혹독하게 경영수업을 받았다. 오기가 생긴 그는 영업, 무역, 마케팅 등을 단계적으로 익혀 갔다. 특히 1997년 중소기업 고유 업종이 해제되면서 더 이상 지역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자 수도권 대리점들을 뛰어다니며 영업망을 확보해 나갔다. 2000년대 들어 급증한 대형마트에 납품을 하면서 유통망을 전국적으로 넓히는 데 일조했다. 그는 “그때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는데, 당시의 현장 경험들이 현재 경영하는 데 있어 자양분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저는 무조건 발로 뛰는 현장 경영을 중시합니다. 보고서가 아니라 직접 두 눈으로 봐야 확신이 서거든요. 그다음에 판단을 내려요. 대기업은 오류가 생겨도 탄탄한 자금이 뒷받침되지만 중소기업은 한 번의 실수가 걷잡을 수 없는 후폭풍을 가지고 오니까요. 그러다 보니 지금도 제가 직접 해외로 다니는 시간이 많아요. 이런 건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것 같아요. 과거 부친께서도 대면 영업을 정석으로 아셨어요. 시장 상인들을 만나러 다니느라 발이 부르틀 정도였죠.”
1. 1960년대 간장 압착기에서 작업 중인 근로자의 모습.2. 1970년대 몽고장유양조장의 반자동 작업 라인의 모습.3. 1960년대에 생산된 간장의 제품 용기.
1. 1960년대 간장 압착기에서 작업 중인 근로자의 모습.2. 1970년대 몽고장유양조장의 반자동 작업 라인의 모습.3. 1960년대에 생산된 간장의 제품 용기.
근면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경영 전략은 곧 브랜드와 제품에 대한 평가로 이어졌다. 몽고식품은 거래처와 한 해 두 해가 아니라 100년을 거래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했다. 고객들의 불만 처리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어떨 땐 사소한 고객 불만에 그들이 놀랄 만큼의 보상을 해 주기도 했다.

“대기업과 달리 매뉴얼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지 않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소비자 신뢰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면 뭐든지 했어요. LG전자의 해피콜 서비스 등 성공한 마케팅 사례는 모두 도입해 경쟁력을 키우는 데 힘썼습니다. 진간장 하나를 사면서도 엄청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 줬지요. 그들이 20~30년간 우리의 골수팬이 됐어요. 하지만 ‘묻지 마’ 팬들이기에 언제든 한순간에 돌아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머리를 쓰다 보니 요즘 부쩍 흰머리가 많이 늘었어요.(웃음)”

한결같은 맛은 말할 것도 없다. 몽고간장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음식을 했을 때 맛있어야 한다는 시각으로 접근한다. 즉, 간장을 활용해 누구든지 쉽게 요리할 수 있도록 제품을 만든다. 실제로 김 사장도 해외 식품박람회에 가면 종종 불고기, 잡채 등 간장을 활용한 요리를 만들어 해외 바이어들에게 선보인다.


100주년 계기 사업 다각화 고민
‘펩시콜라 vs 코카콜라’

몽고식품 109년의 역사가 순탄하게만 흘러온 것은 아니다. 특히 2010년 노사 갈등으로 인한 ‘직장 폐쇄’ 결정은 그에게 큰 시험대였다. 당시 사람들은 “100년 기업이 문 닫는다”고 수군거렸다.

“50년 이상 근속한 직원들에게 회사 측의 입장을 아무리 설명해도 통하지 않았어요. 오해가 켜켜이 쌓여 갔죠. 자성의 차원에서 직장 폐쇄를 강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조 측과 끊임없이 대화를 했고 갈등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 결국 6개월 만에 정상화가 이뤄졌지요.”

1990년대 초반 정보기술(IT) 붐이 일 때는 인쇄회로기판(PCB)업체를 인수했다가 수십억 원을 날려 어려웠던 적도 있다.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데다 오랜 기간 동안 한 가지 업종으로 가족경영을 해 오다 보니 업종 다각화 유혹도 상당했다. 실제 50년 이상 된 지역의 장류업체 가운데 무리하게 확장을 하다가 문을 닫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다고 기업의 생존이 달린 문제이니 사업 다각화에 그냥 눈감고 있을 수만도 없는 일이다. 김 사장은 “100주년을 계기로 몽고식품이 펩시콜라가 될 것이냐, 코카콜라가 될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고 말했다.
김현승 사장은… 1968년 경남 마산 출생. 단국대 무역학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무역학과 졸업. 1992년 몽고식품 주식회사 입사. 1999년 몽고유통 대표이사 사장 취임. 2002년 몽고식품 주식회사 전무이사. 2005년 몽고유통주식회사 대표이사, 몽고식품 주식회사 최고경영자 겸임.
김현승 사장은… 1968년 경남 마산 출생. 단국대 무역학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무역학과 졸업. 1992년 몽고식품 주식회사 입사. 1999년 몽고유통 대표이사 사장 취임. 2002년 몽고식품 주식회사 전무이사. 2005년 몽고유통주식회사 대표이사, 몽고식품 주식회사 최고경영자 겸임.
“펩시는 콜라 외에 여러 주스 제품을 만들어 코카콜라를 누르고 매출 기준 업계 1위를 탈환했고, 코카콜라는 단일화 전략을 고수하며 브랜드 인지도 면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죠. 코카콜라의 우직함을 따를지 펩시의 다양성을 좇을지가 몽고식품의 화두입니다. 또 하나는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 발맞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합니다. 강산이 열 번이나 바뀐 만큼 세상도 무섭게 변했죠. 쌀 소비량은 눈에 띄게 줄었고, 갈수록 아이도 거의 낳지 않아요. 적게 먹는 대신 하나를 먹어도 제대로 먹는 사회적 분위기에 맞춰 VVIP 마케팅도 펼치고 있습니다.”


‘가화만사성’으로 최장수 기업 명맥 이어나갈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변해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가치는 진정성이라는 게 김 사장의 지론이다. 몽고식품은 ‘음식은 장맛이고 장맛은 전통’이라는 슬로건 아래 발전을 거듭해 왔다. 돈이 된다면 이리저리 가리지 않고 문어발식 확장을 하는 기업들 사이에서 묵묵하게 100년 이상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좋은 장이 가족 건강을 지킨다는 우직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회장님께서는 오직 간장뿐인 인생을 살면서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자신의 몸이 간장 냄새에 젖어있다고 늘 자랑스러워하셨다”고 회상했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1970년대 고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고 육영수 여사는 고향인 대구지역에서 먹던 간장 맛을 잊지 못해 청와대로 몽고간장을 주문했다. 어느 날 청와대에서 사람들이 마산에 내려와 대뜸 공장을 둘러보자고 했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져 낡디낡은 공장을 둘러보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이들은 연구실 문을 열어 보고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간장을 직원들이 직접 작대기로 젓고 있는 모습을 본 것. 당시에는 화학간장이 많던 시절이었다. 그걸 보고는 “진짜배기다” 하면서 돌아섰다. 양조간장은 콩과 소맥을 원료로 해서 6개월에 걸쳐 발효, 숙성시킨 것으로 5대 영양소를 골고루 가지고 있다. 몽고식품은 원가가 조금 비싸긴 해도 양조간장을 위주로 생산한다.

몽고식품은 100년 기업이 드문 우리나라에서 장수 기업의 본보기가 돼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 이 명맥이 200년, 300년으로 이어지기를 염원하는 기업가들도 많다. 김 사장은 100년 기업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꼽았다. 집안이 화목해야 회사를 잘 키울 수 있다. 여기서 집안이라 함은 자신의 가족뿐 아니라 모든 몽고식품 직원들을 아우르는 말이다. 그는 “경영자가 긍정적이고 행복해야 가족 구성원들의 만족도도 높여 줄 수 있다”며 “회사를 내 아이에게 물려줄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그런 가정교육을 우선적으로 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김 사장이 풀어야 할 숙제들도 많다. 당장은 상장이 눈앞의 과제다. 자금이 유입된다면 일본의 제일 식료품업체인 기코망을 넘어설 플랜도 짜 놨다. 프리미엄 시장 공략을 위한 제품 개발에도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현재 몽고식품 제품의 30% 이상이 프리미엄급 제품들이다. 특히 전통의 몽고송표간장을 비롯해 복분자간장, 대추간장은 서울 강남권을 중심으로 인기가 높다.

김 사장은 하지만 평생 간장만 팔다가 죽고 싶지는 않다고 고백했다. “지적 호기심이 왕성하다”는 그는 언젠가 요리사 자격증에 도전할 계획이다. 경영 현장을 떠나면 회사와 관계없이 식당을 운영해 보고 싶단다. 떡볶이 가게가 될 수도, 한식 레스토랑이 될 수도 있다. 자연인 혹은 요리사로 돌아갈 김 사장과 몽고식품의 미래가 자못 궁금해졌다.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