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예술, 음악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
김대진은 피아노를 닮았다. 한 음 한 음 정확하고도 견고한 소리를 내는 것도 그렇고, 그 음들이 합쳐져 도무지 측정할 수 없는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내는 것도 그렇고, 그 소리들이 깊은 감동을 자아내는 것도 그렇다.한 사람이 이토록 많은 울림을 줄 수 있다니, 과연 그는 오리지널이다. 긴장해 보기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기자의 나이보다 더 많은 세월을 피아노 앞에서 보낸 거장에게 그것도 ‘피아노’를 매개로 말을 건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기도 했고,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또 훌륭한 선생님으로서 충만한 존재감을 과연 활자가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것도 고민의 지점이었다.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구실에서 김대진 교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자신의 가장 본질적인 언어이자 표현의 수단인 연주자로서의 음악 세계는 물론이고, 대한민국 음악 영재를 키워 낸 스승으로서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계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았으며, 수원시립교향악단의 지휘자로서 국내 음악인들 지원에 대한 아쉬움도 드러냈다. 그의 한 걸음 한 걸음,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의 수준을 끌어왔던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또 한 단계 도약하는 데 밑거름이 될 얘기들이었다.
손열음과 김선욱을 탄생시킨 ‘신의 손’
피아니스트로 그의 이력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지만, 지금 현재 그의 이름 앞에는 스승, 교육자라는 타이틀이 먼저 붙는다. 그 스스로 “가장 중심적이고 나를 지탱해 주는 근본이자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든 자리”라고 할 정도로 가르치는 일이 늘 우선순위다. 클래식 음악계의 스타이자 젊은 거장이라 불리는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김선욱을 비롯해 걸출한 제자들을 수도 없이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자로서 막중한 사명감과 뜨거운 열정이 수반된 결과였다.
“좋은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었으니 운이 좋았죠. 선욱이나 열음이는 제가 아니었어도 분명 큰 인물이 됐을 겁니다. 다만, 변화의 흐름이랄까, 그걸 읽어내는 게 선생으로선 중요했던 것 같아요. 시대가 바뀌면서 선생의 역할도 달라졌거든요. 곡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사람을 가르치는 게 선생의 할 일인 거죠. 가령 피아노를 칠 때 빨라지는 습성이 있는 친구들은 전반적으로 모든 습관이 빨라요. 그런 면을 가르치는 거죠.”
1994년, 당시 갓 설립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로 교편을 잡기 시작했으니 어느덧 20년. ‘신의 손’이라 불리는 그는 그러나 여전히 가르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한다. 누군가의 스승이라는 자리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일 터다. “가르친다는 것, 그게 뭔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20년을 가르쳤으면 이제 좀 감을 잡아야 할 텐데, 가르칠수록 어렵고 가르칠수록 두렵습니다. 다만 큰 전환점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요. 단적으로 말하면, 모든 개성이 궁극적으로는 즐거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겁니다. 그 사실을 좀 더 일찍 깨우쳤더라면 좋았을 텐데, 개성을 심어 주기 전에 객관성을 너무 많이 심어 줬던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죠. 물론 객관성으로 인해 어떤 그림을 담고 어떤 음식을 담아도 그 틀은 예쁘고 단단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젠 아이들의 장점과 특징을 찾아주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실 김 교수는 즐거워서 재밌어서 피아노를 열심히 쳤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파서 일주일간 학교를 쉬게 된 그는 집에 있던 피아노를 가지고 장난을 치며 놀았다. 그걸 본 외할머니가 자연스레 찬송가 멜로디를 가르쳐 주었고, 그렇게 피아노와 첫 인연을 맺게 된 후 그에게 피아노는 항상 즐거운 것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국립교향악단과 협연으로 데뷔 무대를 치렀을 때도, 이듬해 첫 독주회로 큰 이슈와 화제의 대상이 됐을 때도 긴장은커녕 들뜨고 설레고 기쁨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깊이깊이 피아노에 빠져들었던 그가 피아노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건 여러 위치가 겹치면서였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위치, 클래식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메신저로서의 위치, 또 피아니스트라는 존재 의식 등 피아노를 매개로 그가 해야 할 일들은 너무나 많았다. 그 자리들은 분명 그의 선택이었지만, 돌아보면 운명처럼 다가왔다.
“‘운명’이란 말을 믿지 않을뿐더러 자기 운명은 자신이 만들어 간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저는 워낙 계획을 많이 세우고 오랜 기간 준비하는 편인데도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계획 없이 준비 없이 찾아오는 것 같아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그랬고, 수원시립교향악단 지휘자를 맡게 된 것도 그랬습니다.”
스승인 오정진 교수가 대한항공 피격사건으로 고인이 된 후 그는 교육자로 스승의 열정을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던 그가 교육자의 정체성을 처음 갖게 된 순간이었다. 이후 줄리아드 음대 박사 과정을 끝내고 맨해튼 음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무렵, 교사에 대한 열망을 이루기 위해 서울대 교수 공채에 두 번 지원했다. 그러나 한 번은 채용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 한 번은 임용이 되지 않으면서 가르치는 일과는 인연이 없는 듯 포기하려던 찰나, 한 통의 전화가 운명을 갈랐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기 전날,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대 총장이자 저의 옛 은사님인 이강숙 교수님에게 인사차 전화를 걸었어요.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말에 교수님은 만나자고 하셨고, 그 자리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직을 제안하셨죠. 그땐 뭐에 홀렸는지 그 자리에서 하겠다고 대답했어요. 수원시립교향악단 지휘도 ‘우리나라 음악계 활성화를 위해 애쓰는 분인데 잘 부탁합니다’라는 수원시장님의 간단명료한 한마디에 맡게 됐죠. 개인적으로 지휘에 관심이 많아 공부도 했었고, 모차르트 전곡 연주회 등 많은 음악회에서 따로 지휘자 없이 공연을 하기도 했었지만,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될 거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거든요. 그러니 운명이란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되는 겁니다.”
운명처럼 다가온 몇 번의 터닝 포인트
지난 2008년, 그렇게 수원시립교향악단 제6대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김 교수에게 지휘는 어찌 보면 그간 해 왔던 클래식의 대중화, 대중의 클래식화의 연장선이었다. 나아가 우리나라 연주자들의 수준이 한껏 높아진 상황에서 잠재 인력의 활용이라는 측면에 대한 고민까지 포함하고 있기도 했다. 실제로 그가 수원시립교향악단을 맡으면서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뛰어난 실력의 교향악단으로 국내 오케스트라 위상을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줄리아드 졸업생 등 우수한 인재들을 수원시립교향악단의 신입 단원으로 영입하는 등 긍정적 변화들이 뒤따랐다.
“우리나라 오케스트라는 세계적 수준이 되고도 남을 가능성이 충분해요. 외국 콩쿠르에 나가면 우리나라 학생들이 상을 휩쓸고 있고, 해외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 있는 잠재 인력도 많이 있죠. 그런데 그분들이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려고 하질 않아요. 인식의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 경제적으로 생활이 안 되는 거죠. 그걸 바꾸는 데 서울시립교향악단이 큰 역할을 했고 수원시립교향악단도 일정 부분 몫을 하고 있어요. 그런 면에서 수원시립교향악단이 기업의 지원을 받는 건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 2월 수원시립교향악단이 유럽투어를 할 때 삼성전자에서 지원을 했었는데, 그게 아주 모범적인 메세나 사례죠. 베를린 필하모니처럼 외국의 유명 오케스트라가 내한한다고 하면 너도나도 후원하겠다고 기업들이 나서는데, 그걸 보는 국내 클래식 음악인들은 씁쓸할 수밖에 없어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과 더불어 아주 오랫동안 그의 과제이기도 했던 클래식의 대중화는 그렇듯 이제 또 다른, 그만의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바흐 음악의 포르테와 브람스의 포르테가 달라야 한다는 개념도 없었던 시기, 심지어 자신이 연주하고 있는 곡을 한 번만이라도 들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시기에 클래식을 접하고 공부한 그가 첫째 목표로 정한 클래식의 대중화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일이었다면, 이제는 그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이면서 동시에 음악 선진국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는 것에 방점을 찍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외국에서 보는 우리나라의 음악 수준이 훨씬 더 높아요. 기대치를 갖고 있는데 그걸 채우지 못 하고 있죠. 우리나라 학생들이 외국 콩쿠르에 나가 상을 많이 받는데 이후 어떤 교류나 역할도 없이 상 받는 걸로 끝나 버리니 감정이 좋을 리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 교향악 축제 때 예술의 전당 측과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사무국이 교류를 맺고, 콩쿠르 1등에게 한국 연주 무대에 서는 부상을 주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국 무대 진입에 대해 고마워하며 생각보다 너무 좋아하더군요. 진작 했어야 할 일인데 이제야 물꼬를 튼 겁니다.”
글로벌 교류뿐만 아니라 청소년 음악회, 토요 음악회, 음악 페스티벌 등 국내 음악 팬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에도 여전히 욕심내는 그다. 지난 발걸음들이 이뤄 놓은 성과들이 하나 둘 가시화되는 것도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다.
“바로 며칠 전 토요 음악회가 끝나고 이메일 한 통을 받았어요. 청소년 음악회를 시작한 게 벌써 10년 전인데, 당시 제가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했대요. ‘청소년 음악회가 성공인지 실패인지 모른다. 그로 인해 클래식에 입문하고 성장하고 계속 클래식 음악회에 올 수 있다면 성공이라 말할 수 있다’고. 그 얘기를 인용하면서, 자신이 바로 그 청소년 음악회로 입문해 지금까지 클래식을 즐기는 사람이니 성공한 것 같다고 하더군요. 정말 뿌듯했어요.”
그가 운명적으로 받아들인 피아노, 그리고 선생의 자리와 지휘자라는 위치가 개인을 넘어 수많은 이들의 삶마저 바꾸어 놓았으니 그의 존재감에 어찌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수많은 타이틀이 더해지며 피아니스트 김대진을 만나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 얼마 전 내놓았던 슈베르트 음반의 달달함처럼 피아노 앞의 그를 자주, 그리고 오래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게 수많은 팬들의 바람임을 그 또한 모르지 않는다. “피아노를 치는 일이 그렇게 행복한 줄 몰랐다”는 고백 뒤로 덧붙여진 “그래서 무언가를 계획 중”이라는 말에 기대를 해볼 밖에.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 사진 이승재 기자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