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심리 혹은 습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동굴’은 공간 개념이 아닌 혼자만의 시간, 자기만의 세계와 더 가깝지만, 그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한 공간은 어쩌면 필수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의 저자 존 그레이의 말처럼 동굴에 들어간 남자는 나올 때 더 큰 힘으로 돌아오는 법. 자신만의 동굴, 즉 아지트에서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하고 있는 세 남자의 이야기가 여기 있다.
CASE 1
정재엽 카레클린트 대표의 홈시어터 룸
자유와 해방감, 심리적 안정감을 얻다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한 아파트. 핑크빛 모드가 한창인 이 아담한 신혼집에는 아주 특별한 밀실이 하나 있다. 오로지 ‘남편의, 남편에 의한, 남편을 위한’ 영화감상실이 그것. 밀실의 용도 자체로만 봐도 대단한 영화광임을 짐작케 하는 주인공은 바로 수제 원목가구 브랜드 카레클린트 정재엽 대표다.
지난 1월 실내 건축 인테리어를 하는 일명 ‘건축녀’와 결혼한 ‘가구남’ 정 대표에게 영화는 가구 그다음으로 중요한 삶이다. 결혼 전 싱글라이프를 즐길 때도 작은 오피스텔을 통으로 영화관처럼 꾸며 놨을 정도로 대단한 마니아인 그가 신혼집을 꾸미면서 유일하게 욕심낸 공간이 바로 홈시어터 룸이다.
취미 공간 그 이상, 재충전을 위한 공간
현관 바로 옆, 뭔가 용도를 정하기에 애매할 정도로 협소한 방 하나가 그렇게 영화감상실로 재탄생했다. 슬라이딩 도어를 달아 공간을 최대한 확보한 것은 기본, 실제 영화관 같은 느낌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사방 벽을 벨벳 암막 커튼으로 둘렀고, 80인치 사이즈의 빔 프로젝트 스크린과 빵빵한 오디오 사운드를 커버해 줄 방음벽과 방음천장 시공도 잊지 않았다. 어디 그뿐이랴. 마치 직접 영화관에 있던 걸 가져다놓은 듯한 ‘극장용’ 의자는 또 어떻고. 빨간색 가죽 시트에 컵과 팝콘 등을 놓을 수 있는 미니 테이블, 영화 감상에 빠뜨릴 수 없는 맥주를 넣어 둘 알루미늄 재질의 보냉 기능 컵홀더까지 영화관 골드 클래스가 전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다.
“제가 원하는 극장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의자도 직접 제작했어요. 처음엔 의자 하나만 놓으려고 했는데, 아내 눈치가 보여서 두 개를 들였죠.(웃음) 그런데 실제론 아내가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다 보니 전적으로 제 공간이 됐어요.”
마치 작은 극장을 방불케 하는 공간은 그러나 취미 그 이상의 의미다. 회사에서 돌아와 일단 편안한 옷차림으로 홈시어터 룸에 들어선 순간 느끼는 자유와 해방감, 그리고 심리적 안정감은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아주 작지만 저에겐 너무나 큰 공간이에요. 단순히 영화만 보는 게 아니라 음악 감상도 하고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하는데 그 자체로 힐링이 된답니다. 여자도 마찬가지겠지만 직장에서, 사회에서 스트레스 받고 격려와 위로가 필요한 남자들에게 자기만의 공간은 진짜 꼭 필요한 것 같아요. 남자들은 속성상 어디 가서 터놓고 말하지도 못하잖아요. 자기 공간에서 분출하고 돌아왔을 때 재충전이 되고, 일과 삶에 큰 에너지를 얻죠. 자기 공간이 꼭 서재일 필요도 없고 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그 존재감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힘이 될 테니까요.”
CASE 2
이원복 덕성여대 석좌교수의 낭만 와인 바
한강변 장미살롱에서 위로와 영감을 얻다 서울 잠실에 위치한 이원복 덕성여대 석좌교수의 아파트. 대문을 열고 주방을 향해 몇 걸음 옮기자 통 유리창 밖으로 시원스레 펼쳐진 한강과 성수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분명 집으로 들어갔는데, 오히려 가슴이 탁 트였다. 창가에 놓인 식탁과 유럽풍 기역(ㄱ)자 의자, 오디오와 와인 셀러는 마치 하나의 세트처럼 짝을 이뤘다.
이름 하여 이 교수의 낭만 와인 바 ‘장미살롱’. 와인을 좋아하는 그가 한강을 바라보며 마음껏 와인도 마시고, 기러기 아빠를 찾아오는 사람들과 수다도 떨며 밥도 먹는 온전히 자신만의 공간이다. 그저 전망 좋은 주방에 불과했던 이 공간을 자주 함께 와인을 마시던 지인들은 아파트명을 따 ‘장미살롱’이란 그럴 듯한 이름까지 붙였다.
오후 5시쯤 됐을까. 하늘빛이 변하기 시작하자 스페인산 와인 토레스 셀레스테(Torres Celeste)를 음미하던 그의 목소리에도 흥분감이 실렸다.
“낮에는 회색 아파트들만 보여 조금 삭막해요. 그런데 노을이 지고 어둠이 깔리면 180도 달라져요. 반짝이는 한강 물, 밤하늘의 별, 저 멀리 남산까지 이곳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워져요.”
이 교수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1984년 귀국하면서 잠실에 둥지를 틀었다. 어릴 적 기억에 구정물이었던 한강은 수질이나 환경이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게 변해 있었다. 한강변에 터를 잡고 살다가 복도까지 나가지 않아도 집 안에서 한강을 볼 수 있다는 이유로 1986년 옆 동인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 오게 됐다. 한강 전망을 확보하기 위해 빨래를 너는 공간이던 베란다를 공사해 벽면을 텄다. “이렇게 멋있는 공간을 내버려 두는 건 한강 경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어요. 식탁을 놓고 캐나다에서 가져온 독일산 긴 나무의자를 들여놓으니 고급 와인 바 부럽지 않았죠. 2001년 이후부터는 13년째 안 고치고 있어요. 세월의 손때 묻은 이대로가 좋아.”
집에서도 한강 보고파 이사, 나훈아 노래 들으며 마시는 와인 “끝내줘요”
8년 전 가족들을 캐나다로 보내고 이곳에서 와인과 함께 고독도 많이 즐겼다. ‘홑몸노인’ 위로한다고 찾아오는 지인들이 하나둘씩 늘면서 와인 애호가들의 아지트가 되기도 했다. 공간 한편에는 평소 부지런히 사 모은 와인들이 들어 있는 넉 대의 와인 셀러와 뱅앤올룹슨 오디오가 ‘살롱’의 구색을 맞추고 있다. 작업하는 동안 유일하게 귀를 쉬게 하는 그림쟁이들에겐 숨 쉬는 것만큼이나 음악 듣는 게 자연스럽다는 그는 이미자부터 백지영, 베토벤, 소녀시대까지 없는 판이 없다. 이 교수는 “특히 트로트를 좋아하는데, 와인과 한강 야경, 나훈아 노래의 조화는 ‘힐링 트로이카’”라며 환하게 웃었다.
홀로 사는 이 교수에게 사실 자신만의 공간 같은 건 무의미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이곳에서 고단한 하루를 위로받고 또 창작의 영감을 얻는다. 독일 유학 시절 쓴 ‘먼 나라 이웃나라’ 유럽 편 이후 모든 시리즈가 여기서 나왔다고 하니, 장미살롱은 대한민국 스테디셀러의 발로이기도 했다. 나이 들수록 외로워지는 남성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루 종일 밖에 있다 집에 돌아와도 제대로 리프레시할 만한 곳이 없죠. 거실은 아내와 딸에게 빼앗기고 침실은 조용히 들어와 잠만 자는 공간에 불과해요. 자동차 안이 유일하게 소리 지르고 울부짖을 수 있는 공간이란 요즘 현실이 참 씁쓸해. 이 시대 남성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지친 몸과 외로운 영혼을 달래는 공간은 참 중요합니다.”
CASE 3
김태우 디자인그룹 아리 대표의 시크릿 아지트
삶의 역사이자 흔적, 창의의 원천이 되다 외부의 모든 것으로부터 완벽히 차단된 오직 나만의 공간, 심지어 집과 가족들까지 확실하게 분리된 제3의 공간에 대한 바람은 모두의 로망일 터. 서울 강남 한복판, 그것도 자신이 직접 설계한 빌라의 꼭대기 층에 그 로망을 실현한 김태우 디자인그룹 아리 대표는 그런 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다.
“5~6년 전까지만 해도 건축설계 사무실로 쓰던 곳이에요. 사무실을 이전하고 공간이 비면서 마침내 로망을 실현하게 됐죠. 솔직히 강남에서 이런 고가의 아지트를 얻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기회가 참 좋았어요.”
그때부터 이곳은 김 대표의 마음 속 영순위 장소가 됐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뭔가 생각할 거리가 있을 때도,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한 순간에도 여지없이 발길은 아지트로 향했다. 갈수록 하는 일이 많아지고 외부 일정이 늘면서 느긋하게 머무를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요즘에도 김 대표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아예 이곳으로 출근하고 퇴근 후에는 시간에 상관없이 늘 들른다.
가장 솔직한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는 공간
아주 친한 지인이 아니면 좀처럼 오픈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자신만의 공간인 그곳은 아닌 게 아니라 김 대표의 모든 역사가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룸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서 있는 커다란 책장에 빽빽이 꽂혀 있는 전 세계 건축 관련 잡지와 책들, 김 대표가 직접 설계한 건축물의 모형들, 그의 취미를 보여 주는 몇몇 미술작품들과 오디오 기기, 심지어 출장이나 여행길에 사 온 작은 소품들까지 다양한 관심과 주제를 반영한 물건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그렇게 그의 지난 시절들이 고스란히 담긴 이곳은 역사이자 흔적일 뿐만 아니라 창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젊었을 땐 이런 공간이 없으니 여기저기 많이 다니면서 아이디어를 얻곤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곳에 와서 그냥 멍하니 있다가도 퍼뜩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죠. 작은 소품 하나하나도 창의적인 생각의 좋은 재료가 되는 겁니다. 정리 안 된 공간에 대한 변명 같기도 하지만, 솔직히 여기저기 놓여 있는 물건들이 무심코 아이디어를 줄 때도 많아요. 그러니 저처럼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겐 이런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죠.”
그도 그럴 것이 김 대표는 현재 맡고 있는 직책이 많다. 디자인그룹 아리 대표이자 한국건축가협회 부회장이고 광운대에서 겸임교수를 맡고 있으며 국토교통부와 문화체육관광부 등에 건축 관련 자문 역할도 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근대운동에 관한 건물과 환경 형성의 기록 조서 및 보존을 위한 조직인 도코모모 코리아(Docomomo Korea) 부회장으로 올해 서울에서 열리는 2014년 세계대회의 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일과 여가가 좀처럼 분리되지 않는 삶이다 보니 아지트에서도 어쩔 수 없이 일과 관련된 회의나 모임 등을 할 때도 있지만, 그럴 때조차 공간의 성격은 격식과 거리가 멀다.
“그래도 넘치지는 않지만 필요한 건 모두 다 있어요.(웃음) 조그마한 냉장고 안에 와인도 구비돼 있답니다. 어쩌다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 오기도 하거든요. 사실 여기는 오직 저를 중심으로 한 공간이고 그만큼 저란 사람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경우엔 클라이언트들을 모시기도 해요. 서로 소통이 잘 돼야 하는데 그런 면에선 이곳만큼 자연스러운 저를 보여 줄 수 있는 공간이 없으니까요.”
어쩌면 자기 자신의 가장 솔직한 민낯과 마주하는 그 공간에서 김 대표는 오늘도 음악을 듣고 차를 마시고 글을 쓰고 설계 도면을 그리며 스스로의 삶을 풍성하게 채워 가고 있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 | 사진 김기남 기자 ·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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