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닐 카울 라이카 카메라 아시아태평양 지사장

명품의 가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빛을 발한다. 세계 최초의 상용 카메라 라이카 카메라도 다르지 않다.

몇 년 전 오스트리아 빈 옥션에서는 1923년에 제작된 라이카 앤티크 카메라가 약 20억 원에 낙찰돼 화제를 모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의 역사를 기록했던 수동 카메라는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마니아들의 ‘추앙’을 받는 고급 헤리티지의 대명사로 군림하고 있다. 라이카 카메라 브랜드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방한한 수닐 카울(Sunil Kaul) 라이카 카메라 아시아태평양 지사장에게 물었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한 세기를 견딘 브랜드의 생존 전략에 대해.
[GLOBAL LEADER] “60년째 쌩쌩한 카메라, 이게 사치품인가요?”
레드 팬츠와 행커치프. 5월 9일 서울 강남의 한 갤러리에서 열린 라이카 카메라 100주년 기념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낸 수닐 카울 라이카 카메라 아시아태평양 지사장은 정열의 레드 포인트 패션을 자랑했다. 빨강은 라이카 카메라 로고의 상징인 동시에 브랜드를 향한 자신의 존경과 사랑을 나타낸다고 했다. 인도 태생의 싱가포르 국적을 가진 카울 지사장이 아우디 등 글로벌 자동차회사를 거쳐 라이카 카메라에 둥지를 튼 지 5년. 라이카 카메라의 인간 중심적인 기업 철학은 사진에 ‘사’자도 몰랐던 그를 라이카 카메라의 열혈 마니아로 만들어 놓았다.


100주년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라이카 카메라는 독일 웨츨러 라이츠사의 광학 기술자였던 오스카 바르낙이 1914년 4월 발명했어요. 정확히 100주년을 기념하는 달은 3월인데, 한국에선 세월호 침몰 사고 등의 이슈로 인해 조금 늦게 자축행사를 갖게 됐습니다.”


라이카 카메라는 이 시대 포토그래퍼들의 로망인데요.
“라이카 카메라는 처음 영화용 필름을 테스트하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당시 크고 무거운 대형 유리 평판 카메라가 영화 촬영에 사용됐는데, 이를 대신해 35mm 활동사진용 네거티브 필름을 사용한 실험용 카메라를 제작했어요. 라이츠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1925년에 이르러 ‘레이카1(Leica1)’의 판매를 시작했죠. 라이카 카메라는 로버트 카파 등 유명 사진작가들이 과거 전 세계 전쟁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더욱 알려졌고요.”


100주년 한정 에디션 ‘라이카 T시스템’은 어떤 특징이 있나요.
“혁신적인 디자인을 첫손에 꼽고 싶어요. T시스템의 보디는 통 알루미늄을 장시간 손으로 직접 깎아 만들어 촉감이 매우 좋고 견고하죠. 만질수록 매끈하고 부드러워 계속 만지고 싶어져요.(웃음) 아우디와 디자인 협업으로 만들어진 본체는 깔끔한 선으로 이뤄져 단순함과 간결함의 극치를 보여 줍니다. 또 누구나 쉽게 구동할 수 있죠. 버튼 하나로 촬영할 수 있고 사진을 찍은 뒤 자체 보정을 거쳐 와이파이(Wi-Fi) 기능으로 공유할 수 있어요. 스위치만 켤 수 있다면 여덟 살짜리도, 80대 노인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쉽고 간편합니다. 원하는 피사체를 쉽고 빠르게 렌즈 속에 담을 수 있다는 건 큰 행복이에요. 저 역시 개인적으로 주문했죠.”


한 세기 동안 이어져 올 수 있었던 라이카 카메라의 철학은 무엇인가요.
“뻔한 이야기지만 기본이 정말 중요합니다. 라이카 카메라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만큼 하나의 공정도 허투루 할 수 없어요. 장인정신이 밑받침 돼야 합니다. 가령, T시스템은 1.2kg짜리 통 알루미늄 보디를 50분 동안 밀링(milling·절삭 공정)해서 틀을 만들고 또다시 45분간 폴리싱(polising·표면에 윤을 내는 연마 작업) 과정을 거쳐요. 하나의 보디를 깎고 다듬는 데만 2시간이 걸립니다. 대량 생산이 불가능하지만 그만큼 명품을 만든다는 자부심이 강하죠. 또 하나는 사진 찍는 주체, 즉 포토그래퍼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겁니다. 우리는 카메라를 팔려고 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진을 좋아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사람들이 사진을 즐기고 좋아해 찍는 것에 대한 열정이 생긴다면 최고의 도구(tool)인 라이카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될 것이고, 라이카 브랜드에 대한 애착도 생길 겁니다.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접근이죠. 이렇게 더디지만 진심으로 천천히 가다 보니 100년에 이르렀어요.”


사람들이 사진에 관심을 갖는 일이 카메라를 파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작업 공정의 특성상 대량 생산을 할 수가 없어요. 물건보다는 라이카의 가치를 파는 것이 더 중요하죠. 실제 2년에 한 번 독일 쾰른에서 열리는 포토 박람회가 있어요. 다른 카메라 브랜드들은 자사 제품 홍보에 열을 올리지만 라이카는 사진 전시를 위주로 해요. 그곳의 가장 큰 홀을 빌려 제품은 일부만 놓고, 라이카 카메라로 찍은 아름다운 사진들을 걸어 놓습니다.”
[GLOBAL LEADER] “60년째 쌩쌩한 카메라, 이게 사치품인가요?”
한때 강남 아파트 한 채 가격보다 비싼 카메라로 불렸지요. 지난 100주년 사진 경매 프레쇼에는 6억 원에 가까운 카메라들이 대거 전시됐고요. 고가품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습니다.
“라이카 카메라는 웰메이드(well­made)로 우수한 퀄리티를 자랑합니다. 이러한 제품력이 브랜드를 만들어 온 거예요. 반대의 경우도 있죠. 일부 명품은 브랜드 파워가 있어 제품 퀄리티와 상관없이 어떤 제품도 로고만 넣으면 잘 팔려 나갑니다. 라이카가 럭셔리 브랜드가 된 건 최고의 장인이 정말 좋은 소품으로 꼼꼼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1953년에 나온 카메라가 아직 멀쩡하게 작동이 돼요. 헤리티지의 가치는 바로 이런 데서 나옵니다. 이게 사치품인가요. 결코 비싼 게 아니라고 봅니다.”


라이카 카메라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저희 할아버지는 고물 카메라 한 대를 유독 아끼셨어요. 할아버지는 제가 고장이라도 낼까 봐 만지기만 해도 종종 화를 내셨는데, 그게 바로 라이카 카메라였습니다. 라이카 카메라는 보물이라는 인식이 있던 차에 러브콜을 받았으니 너무 좋았죠. 아버지는 내게 “왜 (아우디에서) 작은 회사로 옮기려 하느냐”고 했지만 나는 브랜드의 가치를 알기에 망설이지 않았어요.”

아우디와 라이카라, 둘 다 명품을 만드는 기업이지만 규모나 성격 측면에서는 완전히 다르지요.
“아우디는 모든 게 매뉴얼화된 체계적인 프로덕션 회사죠. 버튼 하나만 누르면 모든 공장이 저절로 가동돼 하나의 자동차가 완성돼요. 라이카 카메라는 핸드 크래프트 컴퍼니(가내수공업)예요. 기계에 의존해서 돌아가지 않아요. 그러니 사람이 제일이고요. 카메라 만드는 장인이 아프면 생산도 늦춰져요. 수제작인 데다 최상의 자재로 만들어지므로 고객의 수요를 즉각적으로 채워 주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어요. 출시와 관련해 언제 제품을 받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지 못하지만 고객들은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성미가 급한 것으로 유명한 한국 고객들도 우리 제품을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죠. 아우디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한국 소비자의 특성은 어떠한가요.
“4년 전만 해도 한국은 아시아태평양 전체 시장에서 5%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8~2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독일산(made in Germany), 크래프츠먼십(craftsmanship)의 가치를 이해하고 좋은 물건을 얻는 데 투자를 아끼지 않죠. 또 사진에 대한 열정이 뛰어나고 단순히 사진 찍는 것(taking picture)을 넘어 창의적인 사진 찍기(creating picture)를 즐기는 것 같습니다.”


날로 진화하는 휴대전화 카메라로 인해 카메라업체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현 상황은 어떻게 보십니까.
“개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휴대전화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그것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문화를 긍정적으로 봅니다. 하지만 휴대전화 카메라로 질 높은 사진을 찍기엔 한계가 있어요. 지금 이런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나중엔 ‘진짜 사진’을 위해 더 나은 도구를 찾을 거라고 믿습니다. 이 시장에서 최상의 위치에 있는 라이카 카메라가 바로 그것이죠.”


지사장님도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요, 사진과 경영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요.
“입사하고 난 뒤 처음엔 사진기로 뭔가를 찍기만 하면 모든 피사체가 다 흔들리는 거예요. 밤마다 울면서 고뇌했던 것 같아요.(웃음) 그때부터 셔터 스피드, 조리개 등 사진에 대해 공부했고요. 지금도 프로는 아니지만 가족들을 예쁘게 찍어 줄 실력은 돼요. 사진과 경영은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경영은 고객의 수요 충족과 주주의 만족이라는 두 가지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한데, 사진도 마찬가지로 밸런스를 잘 유지해야 작품이 나옵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을 잘 잡아야 한다는 점에서 판단 능력 역시 중요한 덕목이고요.”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