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적립금 100조 원 시대가 도래했다. 2013년 말 퇴직연금 적립금은 약 84조3000억 원을 기록했다. 100조까지는 15조7000억 원 정도가 부족한 수치.

최근 3년간 퇴직연금 적립금 증가 규모가 2011년 20조8000억 원, 2012년 18조6000억 원, 2013년 16조9000억 원임을 감안하면 올 연말에 100조 원을 돌파할 가능성이 꽤 높아 보인다. 퇴직연금 100조 시대에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일러스트 김영민
일러스트 김영민
퇴직연금이 100조 원을 돌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년 이내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다른 연금제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다. 1988년에 도입된 국민연금 역시 2002년에야 100조 원을 돌파했으니 15년이나 걸렸다. 1994년에 도입된 세제 적격 개인연금의 적립금은 2012년 말 현재 78조8000억 원을 기록하고 있다. 최근 3년간 적립금 증가 규모가 8조~11조 원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2014년 말에 100조 원에 근접할 것으로 예상된다. 올 연말에 100조 원을 달성한다고 가정하면 대략 21년이 걸리는 셈이다.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가입 대상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국민연금의 가입 대상은 18~60세의 전 국민이고, 개인연금은 18세 이상 전 국민이다. 이에 반해 퇴직연금의 가입 대상은 근로자로 한정되며, 그중에서도 주로 5인 이상 사업장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이다. 이처럼 가입 대상의 범위가 훨씬 좁은 퇴직연금의 성장 속도가 더 빠른 이유는 뭘까.

첫째 이유로는 가입 방식의 차이를 들 수 있다. 국민연금은 가입 시점 이후부터 기준소득월액에 연금보험료율(9%)을 곱한 금액을 매달 보험료로 납부하고, 개인연금은 가입 당시 정한 일정액을 매월 납입하는 구조다. 반면에 퇴직연금은 가입 시점을 기준으로 그 이후는 물론이고 그 이전까지 쌓여 있는 퇴직급여까지 퇴직연금으로 전환할 수 있다. 쉽게 말해 퇴직연금 도입 이전의 근무 기간 동안 발생한 퇴직금까지 퇴직연금으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제도전환분이라 하는데, 2013년 말까지 45조 원에 달하는 자금이 제도전환 형태로 퇴직연금으로 흘러들어 왔다. 이 자금이 그대로 퇴직연금에 잔류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제도전환분이 없었다면 퇴직연금 시장의 규모는 지금보다 훨씬 작았을 것이다.

둘째 이유는 주 가입자의 속성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국민연금은 전 국민을 가입 대상으로 하지만 주 가입자는 사업장 가입자다. 국민연금 가입자의 58% 정도가 사업장 가입자다. 이는 사업장 종사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퇴직연금과 유사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속성에는 차이가 있다. 300인 이상 대기업의 퇴직연금 도입률은 90%를 넘는 반면에 299인 이하 중소기업의 도입률은 15.9%에 불과하다. 국민연금은 의무 가입이라는 특성상 중소기업의 국민연금 도입률은 100%라고 봐야 한다. 대기업의 경우 중소기업보다 급여 수준이 높은 현상을 감안하면 국민연금보다 퇴직연금의 평균 월 납입 금액이 더 많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국민연금의 기준소득월액은 최저 25만 원에서 최고 398만 원으로 제한돼 있다. 따라서 기준소득월액이 398만 원을 초과하더라도 398만 원으로 간주된다. 반면에 퇴직연금의 경우는 보험료율이 8.3% 이상으로 국민연금보다 낮지만 소득 기준에 한도가 없고, 급여가 올라가면 납입하는 부담금도 올라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퇴직연금, 국민연금보다 빠른 성장세…커버리지 확대·건전성 강화 필요
퇴직연금은 그 구조적 특성상 국민연금이나 개인연금보다 빠른 시일에 100조 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조가 앞으로도 계속되리라 장담하기는 힘들다. 대기업의 퇴직연금 도입이 일단락되고, 구조조정이 확산되는 등 퇴직연금 시장의 성장을 둘러싼 환경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퇴직연금의 지속적인 성장을 담보하고, 근로자의 노후 생활 보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100조 시대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을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퇴직연금의 인프라를 강화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첫째 방향은 퇴직연금의 커버리지 확대다. 퇴직연금은 고령화 시대 근로자의 노후 보장을 책임지는 주춧돌이다. 문제는 이런 주춧돌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근로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퇴직연금 가입률이 낮을 뿐 아니라 그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이런 기업일수록 근로자의 퇴직급여 수급권은 더욱 취약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중소기업의 퇴직연금 가입은 더욱 절실한 상황이다. 이를 위해서는 퇴직금과 퇴직연금으로 이원화돼 있는 퇴직급여제도를 퇴직연금으로 단일화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현재 30인 이하 사업장을 대상으로 고용노동부에서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중소형 기금제도의 조속한 출범이 필요하다. 단일화와 중소형 기금제도를 통해 퇴직연금의 사각지대를 없애자는 것이다.

둘째 방향은 퇴직연금제도의 건전성 강화다. 퇴직연금이 근로자의 노후 보장 수단으로 튼튼하게 뿌리내리는 데 제도의 재무적 건전성은 필수 영양제다. 우선 이직을 하더라도 퇴직연금을 은퇴할 때까지 쌓아갈 수 있는 통산 장치이자 추가 납입 장치로 활용되는 개인형퇴직연금(IRP)의 보완이 필요하다. 지금 퇴직연금 시장에서는 IRP 계좌 개설과 동시에 해지 서류를 함께 제출하는 아이러니가 일어나고 있다. IRP로 퇴직급여를 의무적으로 이전하도록 제도를 개선하긴 했지만 이전, 이후의 유지책에 대해서는 아무런 장치를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IRP가 진정한 통산 장치로서 기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퇴직연금의 중도 인출 요건에 준하는 수준의 해지 제한이나 부분 해지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의 개선도 제도의 건전성 강화에 관련된 중요한 이슈의 하나다. 지금과 같은 저금리 시대에 적립금을 원리금보장형으로만 운용하면 기업은 법에서 요구하는 사외적립비율을 맞추기 위해 더 많은 부담금을 납입해야 하는 문제에, 가입 근로자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수준의 적립금을 마련하지 못할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예방하고 기업과 근로자가 퇴직연금을 통해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적립금 운용의 개선을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투자원칙보고서(IPS)의 의무화, 퇴직연금위원회(또는 투자위원회)의 상설 기구화, 디폴트 옵션 및 자산 운용 규제의 개선 등이 바로 그것이다.

셋째 방향은 가입자 보호를 위한 불건전 영업 행위 규제의 강화다. 퇴직연금제도의 핵심 이해관계자이자 주 수혜자인 근로자는 사실 제도나 적립금 운용에 대한 지식이 낮은 편이다. 이 때문에 기업이나 퇴직연금사업자와의 협상에서 열악한 위치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가입자 보호를 강화해야 하는 현실적 이유다. 근로자의 사업자 선택권에 제한을 가하는 계열사 밀어주기 계약, 여전히 횡행하고 있는 은행의 꺾기 관행, 가입자보다는 자사 또는 계열사 중심의 상품 추천 행위, 불완전판매 행위 등이 대표적인 불건전 영업 행위다. 이러한 영업 행위가 버젓이 이뤄지는 한 제도에 대한 신뢰를 확보할 수 없다. 제도에 대한 신뢰는 퇴직연금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밑바탕이자 가장 중요한 인프라임을 명심할 때다.


손성동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금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