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남자들이 말하는 남자의 진짜 인생

좋다. 남자들에게 요구되는 ‘남성상’도, 스스로 혹은 세상이 만든 어떤 ‘틀’도 그렇다고 치자. 그래도 문제의식이 있는데, 안에선 힘들다고 아우성을 치는데 그대로 다 떠안은 채 계속 살 수는 없지 않나. 해서 두 남자가 마주 앉았다.

유행하는 힐링 에세이식의 그런 순화된 이야기 말고, 쩨쩨하면 쩨쩨한 대로, 도발적이면 도발적인 대로 남자의 삶을 제대로 끄집어내 보는 것, 그게 이 대화의 지향점이다. 마음 속 저 깊은 곳의 이야기를 툭 건드리는 순간, 어쩌면 벌써 진짜 위로가 시작되는지도 모를 일이니.
[SPECIAL REPORT] 김용택 시인과 우종민 교수의 도발적 제언 “남자다움을 내려놓아라”
‘겁나게’ 자유롭게, 자기 방식대로 살아온 60대 남자와 진료실에서 수많은 군상의 남자들을 만나며 진단하고 치료해 온 40대 남자. 섬진강 시인 김용택과 심리 치유 전문가인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우종민 교수의 만남은 어쩌면 극단적이었다. 고단한 남자의 삶을 말하기에 시인은 너무나 행복하게 살고 있고, 우 교수는 두터운 현실의 벽을 너무나 절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라는 지극히 일차원적인 공통점은 많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더구나 세상을 바라보는 깊이 있는 눈을 가진 시인의 연륜과, 경험과 이론으로 무장한 우 교수의 촌철살인이 더해지니 대화는 일사천리. 때론 유쾌하게, 때론 심각하게 ‘날것’ 그대로의 솔직한 언어들이 핑퐁처럼 오간 이날의 이야기를 전한다. 아, 그 시작은 두 사람 모두 ‘격하게’ 공감한 철들지 않는 남자들에 관한 거다.


# 김 “남자는 철들면 끝”
우 “사춘기 앓는 남자들의 정체성 고민”

김용택 시인(이하 김용택) 철들면 끝난 거지요. 요샌 먹는 것도 철이 없잖아요. 지금 참외 먹고 수박 먹는 것도 그렇지.(웃음) 우리들이 생각하는 ‘철’이라는 건 어떤 의미에선 정치적인 것이죠. 적당히 넘어가도 되는 순간에 그렇지 못하면 철이 없다고 그러니까. 그런 의미의 철이라면 안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철이 들면 낡아 가는 거고, 낡아 간다는 건 새로운 걸 받아들일 힘이 없는 거니까. 난 늘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고를 하고 싶어요.

우종민 교수(이하 우종민) 선생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다만 정신의학적으로 보면 인생사에서 발달의 단계는 어릴 때만 있는 게 아니에요. 몸은 늙어가도 정신적으로는 성숙해지는 거, 그게 발달이죠. 나이가 80이 돼도 그때 해야 할 과제가 있는 겁니다. 후대가 잘 되길 바라고, 양보할 줄 알고, 판을 만들어 줄 줄 아는 역할, 그런 것들을 잘 하는 게 철 드는 것이죠. 그런데 어릴 때는 너무 야수적이고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행동들만 하면 문제가 되니 규범에 맞추라고 배워요. 그 규범이 평판, 처세 이런 것들인데, 진정한 의미에서 철이 든다는 건 본능적인 것과 처세하는 것과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고, 그게 자아의 기능이죠.

김용택 남자들에게 유독 ‘철’이 들었느니 안 들었으니 하는 건 아직 남성 우월적 사고가 남아 있기 때문 아닐까요. 철이 없다는 것은 책임을 안 진다는 것, 책임에서 벗어난다는 것일 텐데, 그런 면에서 ‘철 좀 들어라’ 하는 건 남자에게 책임이 강조되고 강요될 때 하는 말인 것 같아.

우종민 사실 요새는 철없는 여자도 많아요. 남자들이 그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하는데요. 진료실에서 환자들 이야기 듣고 있다 보면 진짜 여자들이 너무한다 싶을 때도 있어요.

김용택 그래요? 나는 그런 걸 안 당해 봐서….

우종민 선생님은 너무 좋은 분을 만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웃음) 남자들에게 너무 많은 게 요구되는 시대예요. 돈도 잘 벌어야지, 또 기타 등등 그밖에 잘해 줘야 해요.

김용택 나는 남자로 살기도 하지만, 그냥 한 인격체로 살아요. 밖에서 사장이면 집에 와서도 사장 노릇 하고, 학교에서 교장이면 집에서도 교장 노릇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집에 오면 남편이고 아버지라야 하는데. 각자 독립된 인격체가 돼야 사랑이 싹트지. 나는 기본적으로 남자, 여자를 구분하기 싫은 사람이에요. 그게 바로 우리들이 만들어 온 병폐 아닌가. 남자라서 이렇다, 여자라서 이렇다 구분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 60대 남자의 삶, 그런 것도 잘 모르겠어요. 물론 내가 살고 있는 환경적인 차이도 있겠지만 말이죠.

우종민 보편적으로 이 시대 남자들의 삶을 보자면, 지금의 70대들은 자산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어요. 6·25전쟁 때 멀쩡한 남자 반은 죽거나 장애인이 되거나 북으로 갔으니 상대적으로 빈 땅이 많았죠. 새벽부터 열심히 일하면 조그만 집이라도 살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70대가 제일 안정된 삶을 살고 있죠. 그런데 60대들은 중간에 어정쩡해요. 적응의 과제를 겪고 있죠. 자신들이 살아 왔던 가부장적이고 집단적인 환경에서, 아내들이 밥솥에 밥 해 놓고 나가면 그 상황에 빨리 적응해야 하는 겁니다. 40대는 일종의 사춘기 같은 시기예요. 고단하죠. 40대에서 50대 초반이 일은 제일 많이 하는데 특별히 자산을 가질 게 없어요. 경제적 비용도 많이 들어가는 데다 아이들도 떠나가는 나이죠. 자기 수명은 점점 짧아지고 조직에선 자리가 위태로워요. 요즘은요, 미국에서 박사 학위 받아 와도 5년, 10년이면 퇴물이 되는 시대예요. 그러니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오는 겁니다. ‘나는 뭐냐’ 하고.
[SPECIAL REPORT] 김용택 시인과 우종민 교수의 도발적 제언 “남자다움을 내려놓아라”
김용택 그렇지. 게다가 요즘은 금방 죽는 것도 아니잖아요. 100세까지 사는 시대니까.

우종민 45세라고 해 봐야 이제 반 정도 산 거거든요. 앞으로 반을 뭐하고 살아야 할지 고민이 끝이 없죠. 언제 밀려날지 모르니 가게라도 알아봐야 하나, 뭘 배워야 하나, 밤에 잠이 안 오는 거예요. 그렇다고 이게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숙제이고 과제예요. 모든 숙제는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떠나 빨리 내는 게 상책이에요. 어떻게든 거쳐서 지나가야 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하죠.

김용택 그러고 보면 나는 그 부분에서 겁나게 자유로운 사람이에요. 우리 사회에서 40대들에게 설문을 하면 40~50%가 자기 직장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즐겁지도 않고 만족하지도 않은데 그냥 밥벌이이니까 하는 거지. 정말 불행한 일이죠. 하기 싫은 일 20~ 30년 더 해야 하는 그 자체가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나같이 자유로운 사람은 설령 욕을 먹더라도 그렇게 말해요. “그렇게 불행하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라”고. 그럼 또 사람들이 물어요.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근데 돈보다 중요한 게 정신 아닌가. 100세까지 산다는데, 적어도 80세까지는 독립적인 삶을 꾸려 갈 힘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하기 싫은 일 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좋아하는 일을 찾아봐라’, ‘그래서 70이 돼서 성공하면 되지 않냐’그게 내 생각이죠. 안 될 것 같다, 그렇게 못 하겠다 하면 지금처럼 살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것도 아니면 직장을 정말로 좋아해야 하는 거죠. “너의 현재가 너의 삶이어야 한다”, “지금 행복한 삶의 터전이 아니라면 내일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SPECIAL REPORT] 김용택 시인과 우종민 교수의 도발적 제언 “남자다움을 내려놓아라”
# 김 “사내라는 걸 털어 버려라”
우 “인간관계에 보험 들라”

우종민 아무리 이런 이야기를 해 줘도 “당신들은 의사니까, 시인이니까 특수한 것 아니냐”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어요. 시각 자체가 냉소적인 거죠. 해서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하자면 이건 제가 매년 1월 1일에 하는 방법이기도 한데, 아주 구체적인 날짜, 시간을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첫째는 자기 부고장이 언제 날아갈지 그 날짜를 따져 보세요. 현재 기준으로 여자들은 92세, 남자들은 85세가 평균 기대수명이죠. 지금 45세의 남자라면 현재 기준으로 40년이 남았지만, 10년마다 수명은 3~4년씩 길어져요. 그래서 45세라고 하면 50년을 더 살게 되는 겁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뒤, 내 부고장이 날아갈 날짜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봐야 실감이 나는 거예요. 또 하나, 10년 단위로 쪼개서 자기 삶의 모습을 적어 보는 겁니다. 자기 자신, 배우자, 자녀들로 칸을 나눠서 그때 뭘 하고 있을까를 적어 보는 건데, 아마 놀랍게도 적을 게 없을 거예요. 3년 전 저 또한 해 봤는데 30분 동안 쓸 말이 없더군요. 아무 생각이 없는 거예요. 당장 이것부터 실천하면 자기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현재에 발목 잡혀 있어요. ‘손실기대효과’라고 하는데, 지금 엄청 크게 느껴지는 손실이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닐 때가 많아요. 먼 미래에 내가 어떻게 되는가는 눈에 들어오지 않죠. 당장 그만두면 인생이 망하는 것처럼 불안한 거예요.

김용택 나는 철저하게 현재를 살고, 행복하고 즐겁게 지냅니다. 초등학교 선생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놀고 공부했던 것도 좋아서 그랬고, 선생을 그만둔 지금은 또 지금대로 좋아요. 선생을 그만두고 나니 기자들이 하나같이 물어요. 아이들이 그립지 않느냐고. 난 전혀 안 그립다고 답하죠. 지나간 세월을 그리워하면 뭐합니까. 그때가 재밌고 행복했으니 지금도 즐겁고 재밌는 겁니다. 난 늘 ‘지금’이 좋은 사람이에요. 오늘도 우 교수님 만나 이렇게 공부하고 있잖아요. 생각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삶이 바뀌고 세계가 바뀌는 겁니다. 나를 고치고 바꿔서 세상의 가장 중요한 핵심에 맞추는 거죠. 나는 되고 싶은 게 없었어요.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봤어요. 어느 날 시를 쓰고 있었을 뿐이고, 그러다 보니 시가 재밌었던 겁니다. 또 시를 안 써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되고 싶은 게 없었기 때문에 다 이뤄졌죠.

우종민 성공이라는 게 부수적으로 돈과 영향력도 깔려 있고, 그 당연한 욕망이 없는 수컷이 어디 있겠어요. 그걸 부정할 수는 없는데, 정신건강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가 제일 문제인 게 자기 자신에 대해 완벽주의적인 기준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대개 부모의 영향 때문에 그래요. “넌 커서 뭐가 될래”, “뭐가 돼야 해”, “어느 대학에 가야 해” 하고 부모들이 말하죠. 그런데 거기 맞추지 못하면 실패했다는 자의식이 쌓입니다. 또 기준이 높아져서 남이 그 기준에 맞게 못하면 그걸 참지를 못해요.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 끝까지 몰아붙여요. 그러다가 나중엔 나가떨어지죠. 건강에 적신호가 오면서 온몸이 지치고 회복이 안 돼요. 그런 증상을 겪는 40~50대가 지금 대한민국엔 너무나 많습니다. 이제 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 앞만 보고 가는데 돌아보면 남는 게 없어요. 전무를 하다 퇴사하나, 과장을 하다 퇴사하나 은퇴하고 집에 가면 마찬가지잖아요. 그래서 제가 말하는 남자의 제일 중요한 과제가 마음씨 좋은 옆집 아저씨가 되는 겁니다. 동네 눈도 좀 쓸고, 우는 아이도 좀 달래 주고, 잘못 된 게 있으면 혼도 좀 내는 아저씨 말이에요.
[SPECIAL REPORT] 김용택 시인과 우종민 교수의 도발적 제언 “남자다움을 내려놓아라”
김용택 아, 그렇군요. 저도 동생을 보면서 느끼는 게 많아요. 우리 집은 명절에 식구들이 모이면 남자들이 집안일을 담당하는데 바로 아래 동생이 그걸 다 한단 말이죠. 은퇴한 친구들이 할 일 없어서 힘들어하면 제가 그러죠. 집안일 하라고.(웃음)

우종민 다행인 건 20~30대 남자들은 많이 달라졌다는 점이에요. 집안일도, 육아도 같이 하고 더불어 남자라서 이래야 한다는 부담감도 내려놓는 거죠.

김용택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하찮고도 중요한 가치가 빨리 집으로 가는 일인 것 같아요. 40~50대 권위적인 가장들의 모습을 보면서 제가 그런 시를 쓴 적이 있어요. ‘아버지 퇴근 / 즉시 샤워 / 쇼파에 벌러덩 / 본 뉴스 또 봐 / 그러다 코 곯아.’(웃음) 기업들이 1시간씩만 근무 시간을 줄인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죠. 나는 제일 부러운 게 부부간에 잘 지내는 사람이에요.

우종민 실손보험이니, 의료보험이니 많이들 이야기하는데 어떤 보험이 수익률 높은 보험일까 생각해 보면 바로 그런 사람에게 드는 보험이에요. 우리나라 자살률이 정말 높잖아요. 누구나 살다 보면 위기에 몰리고 막다른 골목에서 자살을 생각할 수 있으니 그 자체로 병은 아닌데, 누군 죽고 누군 살고 하는 차이가 바로 이야기를 터놓고 할 상대가 있느냐 없느냐예요. 아내든, 가족이든, 친구든, 멘토든 의지할 사람이 있으면 안 죽어요. 특히나 죽겠다는 말은 여자들이 많이 하지만, 실제 실행률은 남자들이 더 많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죠. 여자들은 괴로움을 단계별로 느끼고, 그걸 이야기하다 보면 풀리지만, 남자들은 자기감정을 들여다보지 못하니 행동으로 가는 거예요. 이런 걸 보면 우리나라 남자들이 정신적인 면에서 많이 몰려 있고 쫓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비즈니스적인 관계는 백날 만나 봐야 소용없고, 사람 관계에 보험을 잘 들어 놔야 해요. 사람 보험엔 일시불이 없어요. 부부 사이도 일주일에 한 번 얼굴 보고 두세 시간 사랑한다고 말해 봐야 갑자기 사랑이 싹 트는 거 아니잖습니까. 그걸 하루 20분씩으로 펼치면 적립이 되고 이자가 붙지요.

김용택 무엇보다 자기 스스로 남자라는 걸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강조되고 강화됨으로써 책임지고 지켜야 할 게 너무 많아지니 고단하죠. 맨 처음 한 얘기처럼 인간으로서 인격으로서 난 좀 철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러다 보면 때론 충동적일 수 있겠지만 그렇게 살아갈 길을 찾는 거 아닌가요. 부디 남자들이 사내라는 걸 털어버리면 좋겠어요.

우종민 자기 마음 속 들여다보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해요. ‘자꾸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판만 신경 쓰니 일이 즐겁지 않죠. 심지어 대기업에서 억대 연봉을 받는 사람도 ‘엔조이(enjoy)’가 없고 ‘릴렉스(relax)’가 안 돼요. 늘 비교해서 남보다 잘했나, 못했나만 보니 행복하지도 않고요. 안테나를 밖에만 두지 말고 안으로 두어서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고, 뭐가 어려운지,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잘 들여다보세요. 너무 가혹하고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 다그치지도 말고요. 오래 살잖아요. 자신에게 좀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어요.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