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투자의 달인’ 이채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부사장

“저는 평생 도망자 인생이었던 것 같아요. 고객 돈을 잃지 않기 위해 요리조리 피해 다닌 거죠. 그 덕분에 2006년 4월 ‘한국밸류10년투자펀드’를 시작한 후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손실을 보지 않았습니다.”

이채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부사장 겸 최고운용책임자(CIO)의 사무실은 서울 여의도 한국투자증권 빌딩 17층에 자리 잡고 있다. 벽면엔 색이 약간 바랜 광고가 붙어 있었다. 주인공은 이 부사장이다. 그는 이 광고를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당시 한국밸류10년투자펀드를 시작하면서 절대 고객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오늘 펀드에 가입한 사람도 10년 약속을 지켜야 하는 고객이더라고요. 회사에서 그만두라고 하지 않는 한 ‘영원히’ 이곳에서 가치투자를 하겠습니다.”

이 부사장이 직접 운용하는 한국밸류10년투자펀드의 설정액은 1조4000억 원 규모다. 누적 수익률은 170%를 상회하고 있다. 연평균 수익률만 따져도 약 20%다. 2006년 이후 코스피 지수의 누적 상승률이 40%란 점을 감안할 때 엄청난 성과다. 그는 “중소형주나 대형주를 가리지 않고 가장 저평가된 종목을 골라내는 게 가치투자의 핵심”이라며 “다만 지금은 중소형주가 비싸졌기 때문에 앞으로 대형주 장세가 펼쳐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MARKET LEADER] “중소형주·대형주 가릴 필요 있나요? 무조건 주가 싸면 사는 거죠”
대형주 장세를 점치는 배경이 있다면.
“작년엔 4분기를 빼놓고는 중소형주가 주도하는 시장이었습니다. 올 1분기 역시 중소형주가 훨씬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죠. 1998년 이후 대형주가 중소형주에 비해 갖고 있는 프리미엄의 평균값을 내보니 95.5%더군요. 대형주 가치가 항상 두 배 정도 높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형주의 프리미엄이 중소형주 대비 50% 정도예요. 역사적으로도 대형주의 가치가 사상 최저치 수준까지 떨어진 겁니다. 분명히 다시 오를 겁니다.”


이런 예상에 따라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도 투자 전략을 바꾸고 있나요.
“우리는 개별 기업만 따질 뿐이지 기본적인 투자 전략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투자의 기본은 성장성과 자산 가치, 수익 가치 등 세 가지를 보는 거예요. 자산 가치와 수익 가치는 주가수익비율(PER)이나 주가순자산비율(PBR) 등으로 평가할 수 있어요. 문제는 성장성을 어떻게 따지느냐입니다. 지배구조의 투명성이나 경영자의 자질을 얘기하지만 추상적이고 객관적이지 않죠. 그래서 기업의 성장성에 대한 비중을 딱 20~30%로만 제한합니다. 핵심은 수익 가치인데, 사실 이것도 정확하게 평가하기가 어렵죠. 미래 예측의 영역이니까요. 그래서 과거와 현재 수익이 어떤지를 많이 살펴봅니다. 특히 PER가 7~8배 이하이고 배당이 높으며 재무 구조가 탄탄한 회사를 아주 좋아하죠.”


지수 예측을 잘 안 하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지수를 전망한다는 게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저도 대형주 장세를 예상한다지만, 대형주가 싸니까 사람들이 많이 살 것이란 전망에 근거를 두는 거거든요. 제 목표는 항상 저평가된 종목만 편입하는 겁니다. 편입 종목의 평균 PER가 12~13배까지 높아지면 바로 포트폴리오를 바꿔 8배 이하로 유지하죠. 지수는 항상 기업 실적과 연동돼 있어요. 철저한 종속 변수라는 얘기지요. 작년 초 상장기업의 이익 총액이 100조 원에 달할 것이란 예상이 나오자 주가가 움직였어요. 그런데 뚜껑을 열어 보니 68조 원에 그쳤거든요. 주가도 지지부진했지요. 올해는 기업 실적이 80조~90조 원은 될 것 같아요. 시장 분위기가 작년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주식 투자자들 사이에선 우선주에 대한 관심이 커졌는데.
“우리나라 우선주는 해외와 달라요. 의결권이 없는 데다 비참가적이죠. 내재가치를 보면 보통주만큼 오를 수 없어요. 경영 지배권과 하등 관계가 없기 때문이죠. 일반적으로 경영권 프리미엄을 30% 정도 봅니다. 여기에다 유동성 디스카운트를 10%쯤 더해야죠. 그럼 우선주의 적정 주가는 보통주 대비 60% 수준이 적정하다고 볼 수 있어요. 일반적으로 우선주는 보통주 대비 20~80% 수준에서 움직입니다. 그런데 개별 주가마다 사연이 달라요. 배당을 많이 하는 기업이라면 우선주 디스카운트를 좀 줄여 줘야죠. 또 삼성전자 우선주처럼 거래량이 많아 유동성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면 좀 더 평가해 줘도 된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배당에 인색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저는 배당에 대해 크게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기업 가치에 비해 배당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요. 우선 기업들이 성장하는 단계에선 배당을 안 하는 게 맞습니다. 주주 입장에선 차라리 자기자본이익률(ROE)을 높게 유지하는 게 주가 상승률 면에서 낫거든요. 하지만 어떤 국가나 산업이든 영원히 성장할 수 없기 때문에 성장 둔화에 따라 배당을 늘리는 거지요. 우리나라가 배당을 늘린다는 건, 역설적이지만 무척 슬픈 일이에요. 삼성전자를 예로 들면 지금 배당을 해서 주가를 끌어올릴 수 있지만 굳이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여전히 투자를 더 많이 해야 하고, 유망 기업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인수·합병(M&A)을 해야 하거든요.”


삼성그룹 계열사의 주가가 요동치고 있는데요.
“삼성그룹은 포스트 이건희 회장을 준비해 왔습니다. 경영 승계에 대해서도 많은 시나리오가 나오고 있고요. 주식시장은 급격한 변동을 가장 싫어합니다. 그런데 삼성과 관련돼선 이미 시장에 많이 노출돼 있어요. 이럴 때일수록 개별 기업의 가치만 보고 판단하고, 또 매매해야 합니다.”
[MARKET LEADER] “중소형주·대형주 가릴 필요 있나요? 무조건 주가 싸면 사는 거죠”
장기간 좋은 성과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 비결이 있다면.
“한 마디로 운이라고 생각해요.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엔 증시가 계속 박스권에서 움직였잖아요. 특정 이벤트를 겨냥하고 움직였던 모멘텀 투자자들은 많이 실패했어요. 그런데 바보처럼 오로지 싼 주식만 바라보고 장기투자를 한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승리자가 됐어요. 저는 이런 바보 같은 장기투자 스타일을 끝까지 유지할 겁니다. 비록 큰 수익을 내지 못하더라도 고객의 돈을 한 푼이라도 잃기 싫거든요.”


한 기업에 투자하면 보통 얼마나 기다리는지요.
“투자 기간을 따로 정해 놓지는 않습니다. 원칙은 ‘적정 주가에 도달할 때까지’이지요. 한 기업의 주가가 한 달 만에 내재가치에 도달하면 바로 팔아 치우기도 합니다. 물론 한 종목을 8~10년 들고 있기도 하고요. 평균을 내보니 종목당 투자 기간이 최소 3년은 되더라고요. 그래서 작년보다 올해가 더 두렵습니다. 작년엔 그렇게 사랑스럽던 종목들이 단기간에 급등하면서 매력을 잃었거든요. 이럴 땐 저평가주로 열심히 갈아타기를 해놓고 기다려야 마음이 편합니다.”


일각에선 한국밸류10년투자펀드로 시중 자금이 쏠리고 있다는 걱정을 하던데요.
“좀 부담되는 건 사실이에요. 덩치가 커지면 시장 대응력이 떨어질 수 있거든요. 주식을 사고파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요. 그래서 한번 따져봤어요. 우리나라 시가총액이 1200조 원인데 저평가주를 20%로 잡으면 240조 원 정도예요. 이 저평가주 시장에서 최대 투자한도를 10%로 잡으면, 24조 원이죠. 그런데 한국밸류10년투자펀드의 운용 규모는 아직 6조8000억 원밖에 안 돼요. 어느 정도 여유가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나라에선 해외와 달리 직접투자자들이 많습니다만.
“저는 주식에 직접 투자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여유 자금으로 투자하면 종목이나 한도에 제한도 없고, 펀드와 달리 꼭 환매할 필요도 없이 장기투자도 가능하거든요. 그런데 전제조건이 있어요. 반드시 하루에 3시간 이상 주식을 공부하고 또 자신이 잘 이해하는 산업이나 기업에만 주목해야 해요.”


어떤 펀드를 골라야 실패하지 않을까요.
“가장 중요한 건 장기 성과예요. 그 펀드매니저의 철학이 유지돼 왔는지, 또 그 철학이 앞으로도 이어질 것인지 살펴봐야죠. 그런 측면에서 역사가 오래된 펀드일수록 좋은 펀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해외 운용 시장에 진출할 계획이 있는지요.
“지금 해외 시장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문화가 크게 다르지 않은 곳 위주로요. 3~4년 후에는 아시아 밸류 펀드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다만 항상 변하지 않을 원칙은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가치투자만 할 거란 사실입니다.”


조재길 한국경제 기자│사진 김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