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PB 시장…흔들리는 비밀주의, 그들의 대응은

스위스의 금융 중심지인 취리히의 파라데 광장. 스위스 PB의 양대 산맥인 UBS와 크레디트스위스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스위스의 금융 중심지인 취리히의 파라데 광장. 스위스 PB의 양대 산맥인 UBS와 크레디트스위스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기본으로 돌아가다(Back to the roots).’ 지난 5월 3일부터 일주일간의 스위스 프라이빗뱅킹(PB) 산업 취재 끝에 얻은 결론이었다.

애초부터 글로벌 PB 시장의 탐방지로 스위스를 염두에 둔 것도 같은 이유였다. 스위스는 PB 산업이 태동한 곳이다. 그 역사만 해도 무려 200년에 달한다. 그 200년을 지속해 오면서 스위스 역시 수차례 위기를 겪어 왔고 살아남았다. 이제 PB 산업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지

갓 20년이 지난 우리로서는 ‘200년을 지속해 온 스위스 PB 산업의 뿌리’를 찾는 작업이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2008년 이후 전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에 지속적으로 변화를 모색해 온 스위스의 PB 전문 은행 롬바드 오디에, 30년 경력의 PB, 스위스은행연합회(SBA) 관계자 등을 만났다.



하늘색 혹은 하얀색 와이셔츠를 안에 받쳐 입고, 파란색이 감도는 짙은 색 슈트를 아래위 같은 색깔로 맞춰 입는다. 바로 스위스 프라이빗뱅커(PB)들의 공식 복장이다. 슈트야 깔끔하게만 갖춰 입으면 그만 아닌가 싶은데도, 취재 중 만난 PB들은 하나같이 이 같은 복장을 고집(?)했다. 고객들을 위해 PB다운 복장을 갖추는 것부터가 그들에겐 철저한 서비스의 시작이자, 전문성을 갖춘 PB로서 자신들의 자부심을 표현하는 일인 것이다.

지난 5월 5일 찾아간 스위스의 금융 중심지, 취리히의 파라데 광장. 이곳에선 어렵지 않게 ‘하얀색 와이셔츠에 남색 슈트’를 차려입은 이들을 볼 수 있었다.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스위스의 양대 은행 UBS와 크레디트스위스(CS). 두 은행의 중심에는 사보이 호텔이 위치해 있는데, 이는 이유가 있다. 스위스에서 PB 산업의 역사는 무려 1930년대 제2차 세계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유대인 자산가들은 중립국인 스위스로 피난을 오기 시작했고, 그때 유대인들의 대다수가 머물던 호텔을 중심으로 스위스의 PB 산업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 두 건물은 UBS와 CS를 가장 대표하는 건물이면서도 본사가 아니다. 바로 ‘해외 고객들만을 위해 특화된 지점’인 셈이다. “사진을 찍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둘러보라”는 직원의 안내에 UBS의 1층 내부로 들어서자 4~5개의 은행 창구가 마련돼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넓디넓은 건물의 공간 중에서도 매우 협소한 일부만 창구로 쓰고 있을 뿐 대부분의 공간이 그냥 비어 있다는 점이었다. 공개가 되는 곳은 1층뿐이라는 말에 2층엔 무엇이 있는지를 묻자 직원은 “PB들과 상담할 수 있는 룸이 마련돼 있다”며 “출입이 엄격히 제한된 공간”이라고 다시 한 번 주의를 준다.


금융위기 타격, 다시 회복 중
인터내셔널 PB센터가 본사보다 더 중심가에, 그것도 더 크고 으리으리한 건물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스위스 금융시장에서 해외 고객들의 PB 서비스 자산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 준다. 실제로 현재 스위스에서 관리 중인 PB 자산의 금액은 5조3000억 프랑, 우리나라 돈으로 약 6000조 원에 달한다. 전 세계 자산의 무려 27%다. 글로벌 PB 자산의 3분의 1에 가까운 자산을 현재 스위스의 300여 개 은행에서 관리 중인 셈이다. 그중 51%가 역외자산이다.

스위스에서 PB 산업이 이처럼 융성할 수 있었던 데는 ‘은행 비밀주의’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이 비밀주의의 시작은 1934년. 스위스 정부는 ‘은행비밀법’을 제정해 스위스 은행에 10만 프랑 이상 예치한다면 예금주의 이름 없이 숫자와 문자로 된 계좌만으로 입출금이나 거래명세서 작성이 가능하도록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은행 비밀주의가 흔들리면서부터 벌어졌다. 스위스 역시 2008년 이후 리먼브러더스 사태 등을 겪으며 전 세계에 불어 닥친 금융위기를 피해가지 못한 것이다. 세계 경제위기와 함께 세입 확대에 혈안이 된 미국과 유럽 등 각국 정부는 스위스의 역외자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2009년 스위스의 최대 은행인 UBS가 미국 정부의 압력에 굴복해 탈세 혐의가 있는 미국 예금주 4450명의 정보를 넘긴 것이 시작이었다. 그 후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내 국가들로 차례로 압박이 이어졌다.

스위스 정부는 결국 2013년 2월 스위스 내 미국인 계좌정보 자동제공 협정을 체결한 데 이어 5월에는 유럽연합(EU)과 은행계좌 정보교환을 골자로 하는 조세조약 개정 협정에 합의했다. 10월 스위스는 각국의 납세자 정보교환을 골자로 하는 조세정보교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협약에 58번째 가입국으로 등록되며, 사실상 80년간 스위스의 금융 산업 특히 PB 산업의 동력이 돼 온 ‘은행 비밀주의’가 위기를 맞게 된 셈이다.

그 타격은 PB 시장에도 곧바로 나타났다. 2006년 무렵부터 고객들은 현금 보유를 늘리고 고위험·고수익 금융상품을 피하려는 추세를 보이면서 PB의 이익률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은행 비밀주의마저 흔들리자 스위스 내에 머물던 역외자산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현재까지 탈세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는 PB은행만 해도 UBS와 같은 대형 은행을 포함해 무려 14곳. 이 와중에 스위스의 가장 오래된 은행인 베겔린은 미국 법원으로부터 7400만 달러의 벌금을 선고받고 폐쇄되는 등 타격이 꽤나 컸다.

실제로 익명을 요구한 한 현지 PB는 “예전에도 PB들끼리 동료가 어떤 고객의 돈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묻는 경우는 없었지만, 최근에는 예전보다 훨씬 더 입단속이 심해진 분위기”라며 “특히나 대형 은행에 근무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소형 은행들의 경우 한동안 통폐합과 구조조정이 살벌하게 이어졌기 때문에 실적 압박 등으로 긴장감이 높아진 분위기가 역력하다”고 귀띔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소문이지만 PB들 대부분이 미국 고객을 관리하고 있어서 미국에 들어가면 따로 조사를 받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며 “그래서인지 몇몇 동료들은 미국 여행조차 꺼리는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1. PB룸에서 고객 상담이 이뤄지고 있다.2. 스위스 최대 은행 UBS 인터내셔널 PB센터.
1. PB룸에서 고객 상담이 이뤄지고 있다.2. 스위스 최대 은행 UBS 인터내셔널 PB센터.
그러나 우여곡절 많은 시기를 잘 견뎌 낸 스위스 PB 시장은 최근 들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다. 취리히에서 30여 년간 PB로 일하며 현재 컨실리움 하프너(Consilium Hafner)라는 PB 전문 사무실을 운영 중인 크리스티앙 하프너(Christian Hafner) PB는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고객 자산의 30~80%가 세금인 만큼 고객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내지 않던 세금을 내야만 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에 금융위기 이후 실제로도 스위스 은행들의 타격이 컸던 것이 사실”이라며 “하지만 지난 2~3년 사이 해외로 빠져나갔던 고객들의 돈이 다시 스위스로 돌아오면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스위스 내 영업 중인 15대 PB 관리자산을 분석한 결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2010년 3조3943억 프랑이던 자산규모는 2011년 3조4101억 프랑, 2012년 3조6825억 프랑으로 매년 확대되고 있으며, UBS만 하더라도 2012년 469프랑을 신규 유치하며 지난 2008~2010년 사이에 빠져나간 자산 중 40%를 만회한 것으로 분석된다.

UBS 인터내셔널 PB센터의 직원인 베네사 테스타(Venessa Testa)는 “은행 비밀주의가 흔들리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고객들이 우리를 찾는 이유는 바로 이 ‘비밀주의’다”라며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고객의 정보를 다른 누구에게 쉽게 노출하지 않는다. 스위스 국내 고객들을 위한 PB센터와 해외 고객들을 위한 PB센터를 따로 운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에는 아시아나 중동 지역의 고객들 역시 늘고 있는 추세다”라고 설명했다.
왕실과 소수 귀족의 자산을 관리하던 스위스의 대표 PB은행, 줄리어스 배어.
왕실과 소수 귀족의 자산을 관리하던 스위스의 대표 PB은행, 줄리어스 배어.
반면 차츰 회복세를 띠고 있는 대형 은행들과 달리 소형 은행들의 경우는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하프너 PB는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규모의 경제가 중요해지면서, 당시 소형 은행들의 연쇄 붕괴 등의 시나리오가 쏟아졌던 것은 맞다”며 “5년이 지난 지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른다고 할 만큼 복잡한 변수들이 작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스위스 부티크 은행들의 경우 대부분 ‘부자 가문’의 돈을 맡아 관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당장 이익을 내지 않더라도 생존이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게 스위스 내부 전문가들 대다수의 의견이다. 하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이라 하더라도 향후 운영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SBA 측에서 얻은 자료를 참고하더라도 30위권 이하 소형 PB들은 관리자산 규모가 보합세를 유지하거나 축소되는 경향이 있어 향후 스위스 PB 시장은 대형 PB 위주로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세금은 투명하게, 그 외의 모든 것은 비밀”
전통적인 비밀주의를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많은 해외 자산들이 스위스 PB 시장으로 되돌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취재 중 만난 스위스 PB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오랜 역사를 바탕으로 한 우수한 서비스와 전문 인력, 그리고 안전한 금융시장의 이미지를 지켜 온 결과가 크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지난 2013년 SBA 측의 대응만 보더라도 기본에 충실한 이들의 ‘대응 원칙’이 여실히 드러난다.

2013년 9월 SBA는 스위스 베른에서 개최된 ‘은행의 날’ 행사에서 “모든 스위스 은행은 국제기준을 준수하고 과세대상 자산만을 관리할 것”을 만천하에 선포했다. 이를 통해 오히려 ‘검은돈’과 절연하고 과거 청산의 의지를 밝혀 글로벌 고객과의 신뢰를 높이고 있는 셈이다.
4. 취리히에서 PB로 30년 경력을 지닌 크리스티앙 하프너 PB.5. 스위스의 대표적 은행인 크레디트스위스.
4. 취리히에서 PB로 30년 경력을 지닌 크리스티앙 하프너 PB.5. 스위스의 대표적 은행인 크레디트스위스.
이에 대해 신디 슈미겔(Sindy Schmiegel) SBA 홍보팀장은 “세금에 대해 보다 투명하길 원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이기 때문에 거스를 수 없다. 스위스도 더욱 투명해져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바”라며 “예를 들어 한국의 국세청에서 스위스 은행에 세금과 관련한 정보를 요구하면 예전에는 불가능했지만 앞으로는 이를 받아볼 수 있다. 하지만 경찰도 누구도 아닌 오직 국세청에서 정보를 요구할 때만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곧이어 그는 “다만 중요한 것은 고객의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오직 세금과 관련된 사안에 머무른다”고 강조했다. 은행 계좌 정보에 대해 고객의 사생활 정보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위스 내에서는 이와 같은 새로운 비밀주의의 기준에 잠정적인 합의가 이뤄진걸까. 슈미겔 홍보팀장은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아직은 은행에서 실질적으로 실천하는 단계는 아니다”라며 “현재 OECD 국가들이 모여 기준을 정하고 있고 스위스 역시 이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에 향후 몇 년 내에 새로운 기준이 적용될 날이 머지않았다”고 설명했다.

‘세금에 관한 투명한 공개’와 더불어 스위스 PB 시장에 불고 있는 또 다른 변화는 ‘금융 소비자 보호’를 위한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스위스 금융시장은 ‘유니버설 뱅크(universal bank)’라는 원리에 충실하다. 하나의 은행이 ‘어떤 형태의 금융상품이나 자유롭게’만들어 제공하는 게 가능한 것이다. 스위스국제금융청(SIF)의 프랭크 웨트슈타인(Frank Wettstein) 매니저는 “이처럼 상품 구성이나 투자 상담에 있어서의 자유로움은 PB 산업을 발달시키는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라며 “특히 이 과정을 거치며 스위스 은행들 간 치열한 경쟁이 글로벌 시장에서도 노하우와 우수한 인력을 인정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기본적으로 스위스 금융시장은 자유로운 경쟁을 바탕으로 은행의 평판에 따라 시장에서 스스로 리스크 관리를 강화하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최근 들어서는 금융소비자 보호나 리스크 매니지먼트와 관련한 규제가 점차 늘고 있는 추세”라며 “스위스 금융감독 당국(FINMA)은 은행들이 이와 같은 규제를 충실히 따를 수 있도록 감독을 강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롬바드 오디에 본사. 간판을 크게 내거는 대신 출입문 옆에 조그만 문패만 걸려 있다.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롬바드 오디에 본사. 간판을 크게 내거는 대신 출입문 옆에 조그만 문패만 걸려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규제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슈미겔 홍보팀장은 “기본적으로는 어떤 고객이든 은행과 거래를 시작할 때 ‘리스크 프로필’을 만들게 된다”며 “고객이 금융상품에 대해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또 고객이 얼마만큼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 등 고객에 따라 ‘리스크 수용력’을 정확하게 파악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맞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와 관련한 변화는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PB들에게도 즉각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프너 PB는 “모든 사람들이 달라진 점을 느끼고 있다”며 설명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달라진 변화는 ‘서류 작업’이 늘어나면서 실제로 PB들의 업무 부담 역시 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늘어난 규제로 인해 손님들에게 더욱 더 알맞은 상품을 소개시켜 주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는 만큼 연구가 많이 필요하다”며 “규제가 많아지면서 비용이 늘어난 것은 물론 고객들과 함께할 시간이 줄고 있다”고 밝혔다.

스위스 금융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 은행들마다 ‘규모의 경제’가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실제로 PB뿐 아니라 스위스 은행들은 이와 관련해 새로운 투자 기법을 개발하거나 아시아 신흥시장 등 세계 각국의 시장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데 더 많은 비용을 투자하고 있는 추세다. PB은행과 연계해 PE(사모펀드)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아키나(Akina)의 크리스토퍼 버드커(Christopher Bodtker) 회장은 “최신 금융 투자 기법에 대한 연구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금융위기 이전과 비교해 20% 정도 더 투자하고 있는 편이다”라며 “PB들의 개인 역량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예전보다 직원들끼리 각자의 전문 분야를 훨씬 더 많이 공유하고 서로를 교육시킬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Interview
200년 전통 PB은행 롬바드 오디에 크리스토프 미에르 홍보팀장
[스위스·싱가포르 PB 시장을 가다] ‘검은돈’과 절연…“뿌리로 돌아가자”
“19세기 건물에서 21세기 기술로 투자 분석”

스위스와 한국에서 프라이빗뱅킹(PB) 서비스를 모두 이용 중이라는 교포 사업가에게 물었다. “스위스 PB와 한국 PB의 가장 다른 점이 무엇인가요?” 이 사업가의 대답은 매우 간단명료했다. “한국 프라이빗뱅커(PB)들은 이익이 나면 바로 결과를 알려주지만 손실이 나면 뜸을 들이죠. 그런데 스위스 PB들은 손실이 나더라도 당장 저에게 알려준 뒤 바로 다음 전략을 논의합니다.” 취재진은 롬바드 오디에 측과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비로소 이 교포사업가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무려 218년 전통, 70억~100억 원 이상의 슈퍼리치들을 관리하는 PB 전문 은행. ‘롬바드 오디에’는 스위스의 수많은 은행들 중에서도 독특한 역사를 지닌다. 롬바드, 오디에, 다리에, 헨치 이렇게 4개의 가문이 공동 경영을 하고 있는 구조다. 지금도 이들 가문 출신 8명의 파트너가 실제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크리스토프 미에르 홍보팀장은 “롬바드 오디에는 단순히 부자들의 자산을 단기적으로 불리는 것보다는 한 가문 전체의 비즈니스 자산을 관리하고 이를 다음 세대에 전달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자산관리를 지향하고 있다”며 “100년 이상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며’ 이곳에서 자산관리를 맡기고 있는 고객들 또한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처럼 오랜 기간 고객과 신뢰관계를 맺으며 장기적인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미에르 팀장의 답은, 어쩌면 ‘특별한 비법’을 기대했던 취재진으로서는 맥이 풀릴 정도로 간단하고 단순했다. ‘기본에 충실한 것’, 그리고 ‘고객과 투명하게 소통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답이다. 실제로 미에르 팀장은 인터뷰 중에 ‘장기적인 안목’과 ‘뿌리’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그는 “자산관리는 필연적으로 매우 ‘사적인’ 내용들이 오고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고객과의 신뢰관계가 가장 중요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고객의 자금이 어디서 어떻게 투자되고 있는지, 비록 투자에 손실이 났을 때라도 정직하게 논의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라는 것이다. 그는 “위험을 분산시키는 포트폴리오 전략도 중요하지만, 고객이 자신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어느 정도까지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지를 PB와 고객이 정확하게 공유하는 것이 전제조건이다”라며 “금융위기 이후 실제 스위스 PB은행들 사이에서도 리스크 매니지먼트와 금융 소비자 보호가 상당히 강조되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도 고객과의 솔직한 소통은 최선의 전략”이라고 거듭 밝혔다.

그리고 또 하나, ‘리스크 매니지먼트’를 위해 롬바드 오디에에서 강조하는 것이 있다. 바로 ‘테크놀로지’다. 미에르 팀장은 “UBS와 크레디트스위스를 거쳐 올해부터 롬바드 오디에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이곳에 와서 가장 놀란 것이 있다”며 자신의 경험담을 전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 대한 것이든지, 세금 제도부터 시장분석까지 그 자리에서 바로 찾을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19세기 건물에서, 19세기 탁자로 꾸며진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화상통화가 가능한 인터넷 전화로 통화를 하고 최첨단 분석 기술을 통해 전 세계 어느 시장이나 다 들여다볼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며 “고객들은 복잡해진 시장을 분석하기 위한 테크놀로지를 알 필요가 없지만, 고객들에게 보다 안전하면서도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은행과 PB들은 이 같은 테크놀로지를 빠르게 따라잡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200년 역사가 흐르는 동안 쌓아 온 철저한 PB 서비스의 ‘전통’과 고객들에게 더 정확하고 편리한 기술을 제공하기 위한 ‘현대’의 조화. 이것이 바로 롬바드 오디에는 물론 스위스 PB 시장이 미래를 준비하는 핵심이라는 것이다.


스위스 취리히·제네바·바젤·베른=이정흔 기자 verd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