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 경방 사장의 ‘The Classic’ 7th

시간이 지나도 빛이 바라기는커녕 더 깊어지는 기억, 감동을 넘어 누군가의 인생까지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단언컨대 음악도 그중 하나다. 물론 전제조건이 있다. 그토록 강렬한 힘을 발휘하려면 반드시 진실해야 한다는 것. 화장을 잔뜩 한 얼굴이 아닌 민낯이 가진 위대한 감동의 힘,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그런 순간을 맞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행운인지.
[CLASSIC ODYSSEY] 때론 인생마저 바꾸는 음악의 위대한 감동
오래전 이런 광고가 있었다. “공연은 끝났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는 독백의 주인공은 지휘자 금난새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릴 적 보았던 어떤 공연에 대한 강렬한 기억을 회상하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그 한 번의 감동이 금난새라는 세계적인 마에스트로를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으리란 짐작은 어렵지 않다.

인생을 통틀어 잊을 수 없는 감동스러운 기억을 떠올려 보라면, 주저없이 말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것도 삶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고, 인생마저 바꿀 수 있을 정도의 감동이라면 더더욱. 음악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 있다. 때론 강력하게 때론 은은하게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하는 음악, 필자는 그 음악의 위대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유명 연주가의 음악이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필자의 음악회 파트너는 단연 아버지였다. 클래식에 관한 한 아버지는 좋은 선생님이자 동시에 후원자이기도 했다. 카라얀과 카를 뵘의 실황을 보고 싶다는 필자를 위해 일본에서 열리는 공연에 데리고 가 주실 정도였다. 그것도 제일 좋은 좌석으로.

도쿄 산토리 홀에서 보았던 카라얀의 공연은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브람스 교향곡 4번을 연주했던 카라얀의 무대 매너며 표정 하나하나까지 아직도 떨림으로 간직돼 있다. 이듬해 보았던 카를 뵘의 연주보다 어쩌면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처음 본 대가의 실황이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대학에 진학하고 ‘고대 고전음악 감상실’이라는 동아리 회장까지 지내며 연주회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더 많았지만, 국내 클래식 음악 환경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외국 오케스트라나 유명 지휘자들의 내한 공연이 많지 않았을 뿐더러 있다고 해도 비싼 비용 때문에 빈자리가 많기 일쑤였다. 우리에게는 정명훈의 정신적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공연이 그나마 갈증을 풀어 주곤 했다.

본격적으로 세계적인 음악회 현장을 경험하게 된 건 미국 유학을 가면서였다. 필자가 다닌 브라운대는 미국 동부에 위치해 있었는데, 보스턴과는 1시간, 뉴욕과는 3시간 반 거리에 있어 연주회를 보기에 지리적으로 유리한 환경이었다. 특히 크리스마스나 휴가 시즌에는 꼭 뉴욕에서 시간을 보냈다. 당시 뉴욕이 아버지가 계실 때만큼 황금기는 아니었지만 꽤 괜찮은 연주가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하루 종일 공연이 열려 원하는 작품을 골라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임스 레바인의 공연은 감동의 순서로 꼽자면 손에 꼽힐 정도다. 레오나르도 번슈타인이 미국 태생으로 성공한 최초의 지휘자라면 그 바통을 이어받은 몇 안 되는 지휘자 중 한 명이 바로 레바인이다. 오페라 지휘 경험이 없던 번슈타인과 달리 레바인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오페라 지휘자로서 먼저 시작, 다른 유럽 지휘자들이 걸었던 정통의 길을 걸었다.

개인적으로 많은 지휘자들의 실황 연주를 보며 얻게 된 결론이 ‘유명한 연주가라고 해서 늘 성공적인 연주를 하는 건 아니다’라는 것이었는데, 레바인은 거의 매번 완벽한 연주를 선보였다는 점에서도 마음 속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레바인뿐만 아니라 완벽하기로 소문난 리카르도 무티조차 실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던 무티는 악보와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카라얀이나 카를 뵘 이후 독재적인 지휘자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완벽한 무대를 선보이기란 불가능했으니, 그 실수가 지극히 인간적이고 자연스럽게 느껴지곤 했다. 그렇다고 모든 실수가 ‘인간적’이라는 이유로 상쇄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필자에겐 그 대표적인 예가 주빈 메타였다. 실황을 보기 전 음반으로만 들었을 때는 레바인이나 무티보다 더 좋아했던 그였지만, 뉴욕 필하모닉의 공연을 본 뒤에 느낀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처음엔 ‘세계적인 지휘자도 이런 실수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재미있었고, 누구나 ‘업 앤드 다운(up and down)’이 있을 수 있다고도 생각했지만, 실수가 일상이 되니 도무지 감동의 지점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음악이 주는 감동이란 건 완벽함에서 얻어지는 건 아닌 듯하다. 중요한 건 완벽이 아니라 감동을 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어쩌면 완벽하다는 판단 자체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말이다. 필자가 학생 시절 보았던 카라얀과 카를 뵘의 연주 또한 당시엔 완벽하게 느껴졌지만 만일 지금의 기준으로 봤더라면 분명 달랐을 테니.


음악에 감동받기 위한 청중의 자세
그런 면에서 음악에 대한 경험과 소양이 풍부해진 후 들었던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짐머만의 연주는 완벽하고도 감동적이었다.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던 세이지 오자와와 협연으로 이틀에 걸쳐 베토벤 피아노 콘체르트 5곡을 연주했는데, 필자가 들었던 최고의 연주를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바로 그때 그 연주였다. 사실 오자와 자체가 정말 완벽한 연주로 손꼽히는 지휘자다. 미국에서 유학했던 6년 동안 네 번의 여름휴가를 탱글우드 페스티벌에서 보낸 필자는 그곳에서 오자와의 다이내믹하고 디테일한 연주를 보며 ‘완벽한 연주의 정석’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는 몇 차례 오자와의 공개 리허설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누가 어디서 어떻게 틀렸는지를 정확히 짚어내는 그를 보고 음악 전공을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완벽한 연주’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베토벤 연주였다. 베토벤 연주로 정평이 나 있는 클라이버의 연주는 레코드로 들었던 것처럼 완벽함과 감동을 둘 다 갖추고 있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연주의 폭이 넓지 않고 완벽하게 할 수 있는 몇 곡만을 주로 했다는 점.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독특하고 화려한 연주 때문에 클라이버는 수많은 광팬을 거느리고 있다.

필자의 경우엔 운 좋게도 훌륭한 지휘자의 실황도 많이 경험했지만, 꼭 대가의 연주가 아니라도 음악이 주는 감동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여기서 바로 ‘청중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디 얼마나 잘 하나 보자’라고 평가하는 심정으로 음악을 듣는다면 아무리 훌륭한 연주라 한들 마음에 울림을 주기란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너무 유명한 연주가들만 찾아다니지 말고, 학생들의 연주를 들어보길 권한다. 최근 필자는 서울 콩쿠르에 출전한 학생들의 연주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유학 시절, 아직 유명세를 치르기 전이었던 백혜선 교수의 베토벤 연주를 듣고 느꼈던 견고한 연주에 대한 감동과 비슷했다고나 할까. 감동도 감동이지만 실력적으로도 우리나라 주니어들의 수준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다만 전 세계적으로 보면 그 반대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토스카니니 급의 지휘자가 나오지 않는 것만 봐도 그렇다. 물론 시대적으로 독재적인 지휘자보다 민주적인 스타일을 선호한다고 하지만 과연 꼭 그럴까. 혹독할 정도로 자신에게 철저할 때에만 남에게도 완벽함을 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생각해 보면 카리스마 충만한 지휘자의 부재가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그건 기업을 이끄는 리더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할 수 없는 걸 부하 직원에게 요구하면 안 된다. 혹 내가 할 수 없는 걸 해냈다고 하면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리더는 그 사람을 보고 어느 정도까지 해낼 수 있겠다 하는 가능성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잘못에 대해선 바로 인정하고 사과할 수도 있어야 한다. 철저하지 않은 사람에게 카리스마를 기대하긴 어렵다. 허나, 여기서 또 한 번 강조하지만 지휘자, 연주가의 실력 혹은 카리스마가 감동을 보장해 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마음을 열고 감동받을 준비가 돼 있는 사람에겐, 어떤 식으로든 음악이 보상을 해 줄 것이다. ‘공연이 끝난 후 자리를 뜰 수 없는’ 감동은 그렇게 오는 법이다.


정리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