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편지(love letter): 사랑의 비밀을 엿보다

과거 여인들의 일상에서 연애편지는 어떤 의미였을까?

편지를 쓰거나 받거나 전달하는 여성의 심리를 통해 그들의 은밀한 사생활에 감춰진 시대상을 엿보도록 하자.
가브리엘 메추, ‘편지 읽는 여인’, 1664~1666년경
가브리엘 메추, ‘편지 읽는 여인’, 1664~1666년경
17~18세기 유럽에서는 아동교육이 발달하면서 글짓기 훈련의 한 방법으로 자주 편지를 쓰게 했다. 네덜란드에서는 그 지침이 어른에게도 이어져 편지 쓰기가 유행처럼 널리 퍼져 나갔다. 글쓰기는 남녀와 계층을 막론하고 매우 일반적인 활동이었다.

화가들은 흔한 편지를 매개로 인물들의 상호관계와 복잡한 심리 상태를 작품에 담곤 했다. 특히 연애편지는 여성의 미묘한 감정을 전달하는 데 아주 적합한 소재였다. 주로 집 안에서 생활하는 여성에게 편지는 외부에 있는 남성과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소통 수단이었다. 그래서 여성과 편지와 관련된 그림에서는 편지를 쓰거나 받는 여주인과 함께 그것을 전달하는 하녀가 비중 있게 다뤄지기도 한다. 편지를 맡기려면 여주인은 하녀를 신뢰해야 한다. 이들은 편지가 가리키는 부재하는 남자를 두고 어떤 비밀을 공유하고 있을까.


그림 곳곳에 숨겨진 암시
가브리엘 메추(Gabriel Metsu)의 그림 ‘편지 읽는 여인’에는 안주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와 하녀가 등장한다. 안주인은 일을 하다가 편지를 받은 듯 바느질용 방석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편지를 읽느라 여념이 없다. 바닥에 골무가 뒹구는 것을 보면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급했는지 짐작이 간다. 앞에 놓인 신발 한 짝은 안주인의 성적 욕망을 내포한다.

옆에 서 있는 하녀는 밝은 의복을 입은 안주인과 대조적으로 칙칙한 옷에 앞치마를 두르고 뒤돌아서 있다. 시장에 가려는 듯 왼팔에 양동이를 끼고 손가락에는 심부름할 다른 편지를 가볍게 들고 있다. 양동이에 그려진 화살표가 사랑의 메신저 큐피드를 연상시켜 하녀의 역할을 알리는 동시에 손에 든 편지가 연애편지임을 말해 준다. 그 밑에 있는 개는 가정에 대한 충실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처럼 긴밀히 오가는 편지들 속의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 안주인의 남편일까, 아니면 다른 애인일까? 혹시 두 편지가 각각 다른 남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원인은 바로 하녀가 오른손으로 젖히고 있는 커튼 뒤 그림 속에 있다. 거기에는 배 두 척이 폭풍우 속을 항해하고 있는데, 이것은 연인들의 앞날이 순탄치 않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화가는 배우자가 외지에 나간 동안 다른 애인에게 끌리는 사랑의 갈등을 표현한 것인가, 아니면 바다에서 일하는 남편(또는 약혼자)의 소식을 기다리며 가사에 힘쓰는 여성의 미덕을 그린 것인가? 또는 여성의 허영과 음란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자 한 것인가? 어쩌면 감춰진 진실은 등을 돌린 하녀만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표정을 감춘 채 커튼을 젖히는 그녀의 손에서 비밀의 일부가 드러나고 있으니 말이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연애편지’, 1666년경
요하네스 베르메르, ‘연애편지’, 1666년경
젊은 안주인과 나이 든 하녀가 함께 있는 모습은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그의 작품 ‘연애편지’는 안주인이 하녀가 건네는 편지를 받아드는 순간을 그렸다. 안주인의 긴장한 표정으로 보아 편지는 뭔가 은밀한 내용을 담은 것 같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어두운 실내를 밝게 비춰 장면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며 여인의 심리적 동요를 뒷받침한다. 여기서도 하녀는 편지의 전달자이지만, 안주인과 밀착돼 있고 시선을 교환함으로써 편지의 내용에 보다 깊이 관여한다. 안주인은 편지를 받으며 불안한 눈빛을 보내는 반면 하녀는 안심시키듯 자신 있는 미소를 띠고 있다. 이들 사이에는 둘만 아는 모종의 사건이 있는 듯 말없는 공모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도대체 문제의 편지는 누가 보낸 것인가? 먼 바다로 나간 남편이 보냈을까, 아니면 다른 남자가 보냈을까? 안주인은 무엇을 걱정하는 것일까? 남편의 위험한 항해인가, 외간남자와의 비밀스런 연애인가? 수수께끼 같은 그림은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하녀의 확신에 찬 미소와 벽에 걸린 그림들을 보고 어렴풋이 결말을 짐작할 뿐이다. 액자 속 풍경의 조용한 바다와 파란 하늘은 사랑의 갈등과 불안을 잠재울 좋은 징조인지도 모른다.
베르메르, ‘편지 쓰는 여인과 하녀’, 1670~1671년경
베르메르, ‘편지 쓰는 여인과 하녀’, 1670~1671년경
연애편지를 통해
주인의 조언자 역할을 한 하녀

베르메르의 또 다른 작품 ‘편지 쓰는 여인과 하녀’에서는 안주인이 편지를 쓰는 동안 하녀는 서서 기다리고 있다. 바닥에 구겨진 편지가 글쓰기에 몰입한 안주인의 예민한 감정을 암시한다. 이에 비해 하녀는 기둥처럼 서서 창밖을 보며 이 상황을 지루한 듯, 혹은 불편한 듯 피하고 있다. ‘연애편지’에서와 달리 두 인물은 분리돼 각자 다른 생각을 하는 듯하다.

그러나 베르메르의 두 그림은 모두 화면에서 하녀가 안주인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며 더 굳건하게 표현됐다. 하녀는 비록 신분은 낮지만 아마도 여자들의 세계를 젊은 안주인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연애와 성에 있어서 한 수 위인 하녀는 편지를 읽지 않아도 내용을 알고, 결과를 짐작한다는 듯 여유를 보인다.

연애편지는 가장 개인적이고 민감하며 비밀스러운 글이다. 거기 끼어든 하녀는 신분을 뛰어넘어 여성의 조언자, 공조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러한 그림들은 주인과 하녀라는 계층의 구분을 뚜렷이 하면서 역설적으로 편지의 비밀을 공유함으로써 그 경계가 붕괴되고 있음을 제시한다.


박은영 미술사가·서울하우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