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PB 시장의 중심으로 부상한 싱가포르
글로벌 회계·컨설팅 기업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지난해 ‘싱가포르가 2년 내 스위스를 제치고 세계 1위 프라이빗뱅크(PB) 시장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PwC의 전망을 증명하듯 최근 싱가포르 PB 시장은 관리자산 규모, 고객의 국적 수 등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부자들에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싱가포르 PB 시장을 취재했다. 전 세계 PB 시장에서 싱가포르의 부상은 전통의 강자 스위스 PB에 대한 평판에 1차적인 원인이 있다. 2000년대 들어 ‘하나의 유럽’을 향한 발걸음이 빨라지면서 스위스의 은행비밀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여기에 미국 등 강대국의 탈세와 관련한 금융 정보 공유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면서 ‘부자들의 금고’ 스위스 PB의 자물쇠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세금 등 개인 정보에 누구보다 예민한 부자들은 새로운 금융 허브를 찾았다. 이머징 국가가 몰려 있는 아시아의 싱가포르와 홍콩 등은 낮은 세금 등 그들이 원하는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특히 ‘세금 천국’인 싱가포르는 통화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안정돼 자산을 맡기기에 적격이었다.
늘어나는 아시아 재벌들도 싱가포르 PB에 힘을 실었다. 싱가포르 현지 PB의 한 임원은 “중국을 중심으로 인도네시아, 인도 등 신흥국 부자들의 자산 유입이 최근 들어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과 유럽의 자산가들, 여기에 신흥국 부자들이 가세하면서 그들의 자산을 유치하려는 싱가포르 PB들의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전 세계 부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싱가포르 금융의 중심, 라플스 플레이스(Raffles Place) PB 시장을 찾았다.
SC은행 싱가포르 PrB센터
“센터별 스페셜리스트팀 최대 강점”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이하 SC은행) PB는 프라이빗뱅킹(Private Banking)이 아닌 프라이어리티 뱅킹(Priority Banking)이라 부른다. SC은행의 PB는 리테일채널본부 소속이다. 모든 고객관리전담역(RM·Relationship Manager)들은 브랜치 뱅킹의 헤드들에게 보고하며, 모든 국외 RM들은 인터내셔널뱅킹(Int’l Banking) 헤드에게 보고하는 구조로 운영된다.
싱가포르에는 18개 지점이 있는데 그중 5개가 PrB센터다. PrB센터 중 2곳은 별도로, 3곳은 일반 점포와 함께 있다. 마리나베이 파이낸셜센터 타워1에 있는 PrB센터는 그 3곳 중 하나다. PrB센터는 일반 지점을 통해서도 출입이 가능하지만 별도의 출입문이 있다. 일반 고객과 PrB센터 고객의 기준은 20만 싱가포르 달러. 고객에 따라서는 RM을 바꾸지 않고 일반 점포에 남는 고객도 있다고 한다. PrB센터 고객이 되면 독립된 룸에서 PrB센터 RM의 특별한 서비스를 받는다. 마리나베이 파이낸셜 타워1 PrB센터에는 4개의 독립된 룸이 있었는데, 각각 서울, 도쿄 등 도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PrB센터에는 센터장을 포함해 15명의 RM이 근무하고 있었다. RM들은 평균 3년 이상 PrB 경험을 가진 직원들로, 그 정도 경력이 있어야 고객을 상대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실적에 대한 평가는 센터 전체를 통합적으로 하기 때문에 내부 경쟁으로부터 자유롭다.
매니저인 델윈 푼(Delwyn Phoon)은 “RM들은 금전적·비금전적 지표로 만들어진 스코어카드에 의해 평가된다”고 말했다. 금전적 지표와 비금전적 지표는 비즈니스적 평가뿐만 아니라 고객 경험, 운영의 질, 규정 준칙, 그리고 은행의 가치를 잘 수행하고 있는지 등을 모두 포함한다. 그는 “RM들은 매월 정해진 월급과 함께 스코어카드에 기반을 둔 분기별 다른 금액의 인센티브(variable pay)를 받는다”고 부연했다.
PrB센터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끝낸 그는 “센터에서 가장 유능한 RM”이라며 메건 리 맨시(Megan, Lee Manshi)를 소개했다. RM 경력 7년의 그는 90여 명의 고객, 약 1억 싱가포르 달러의 자산을 관리하는 시니어 오소시에이츠 디렉터다. 그는 SC은행 PrB센터의 가장 큰 장점으로 소속된 스페셜리스트팀을 들었다. SC은행 PrB 각 센터에는 재무와 투자 등에 특화된 전담 인력으로 구성된 스페셜리스트팀을 두고 있다. 그룹 전체에서 6개월마다 한 번씩 포트폴리오를 점검하고, 그 정책에 따라 각 센터에 소속된 스페셜리스트팀에서 각각의 고객을 위한 전략을 수립하는 식이다. 그는 “4~6개월 전 본사 정책에 따라 선진국 채권 등에 투자한 고객들 중에 만족할 만한 수익률을 올린 분들이 있다”고 뿌듯해했다.
고객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게 RM의 기본이라고 말하는 그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고객들이 상품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다고 전했다. 자신이 투자하고 있는 상품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고 싶어 하며, 특히 워스트 시나리오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고 했다. 관리 고객 수가 많아 전화 상담이 많다는 그는 하루에 2명 정도의 고객을 직접 만난다. 실적 부담에 대한 질문에는 “실적 부담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 때문에 무리하게 상품을 팔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고객의 성향과 니즈를 철저히 반영하고, 그에 부합하는 상품을 팔기 때문에 그에 따른 위험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무리수를 둘 경우 그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상품의 위험을 설명하고 고객이 사인하는 절차를 거친다”고 했다.
롬바드 오디에 아시아
“세대를 뛰어넘는 패밀리 오피스”
롬바드 오디에는 1796년 문을 연 2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PB다. 롬바드 오디에 아시아 총괄 대표인 빈센트 맥네나(Vincent Magnenat) 최고경영자(CEO)는 라플스 플레이스 9번가, 리퍼블릭 플라자 46층에 둥지를 틀고 있다. 46층 사무실에 들어서자 벽에 걸린 그림과 롬바드 오디에라는 간판이 기자를 반겼다. 안내 데스크의 안내를 받아 상담실에 들어서자 마리나베이가 한눈에 들어왔다. 음료를 주문하고 10여 분이 지나자 맥네나 CEO가 들어왔다.
그는 “롬바드 오디에는 일반 PB보다 한 차원 높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며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롬바드 오디에의 고객이 되려면 최소 200만 달러를 예치해야 하며, 고객 1인당 관리자산은 평균 500만 달러 이상이다. 롬바드 오디에는 집중투자(pure play)와 틈새시장 공략(niche play)을 동시에 하기 때문에 200만 달러로 롬바드 오디에의 맛을 보라는 취지에서다.
“우리는 수많은 부분이 조합을 이뤄 전혀 다른 서비스를 제공한다. 오랜 역사를 통해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브로커리지가 아닌 혁신적인 매니지먼트를 제공한다.”
패밀리 비즈니스, 웰스매니지먼트(WM) 등에서 축적된 노하우를 고객과 공유하는 것이다. 1세대가 목표 달성을 못하면 2세대, 3세대에서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플래너 역할이라는 것이다. 롬바드 오디에를 패밀리 오피스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위해 롬바드 오디에는 가업승계에서 교육·결혼 문제까지 패밀리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있다.
RM들은 롬바드 오디에의 이런 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선봉에 서있다. 각 RM들은 20~30명의 고객을 관리하는데 관리자산은 1인당 2억~3억 달러다. 고객은 보수, 중도, 공격 등 세 단계로 분류하며 성향에 따라 웰스매니지먼트가 이루어진다.
롬바드 오디에에서 20년 이상 경력을 쌓은 맥네나 CEO는 싱가포르에서 일본, 홍콩 등 아시아 전역을 총괄하고 있다. 싱가포르 지점은 전체 직원이 50명, 그중 15명이 RM이다. 투자 헤드가 있는 홍콩은 60명의 직원 중 15명이 RM, 일본은 35명 직원 중 10명이 RM이다. RM을 제외하면 매니지먼트, 오퍼레이션, 컴플라이언스, 인베스트먼트팀 등이 있다.
투자와 관련한 정책은 홍콩에 있는 투자팀(Investment Engine)에서 결정한다. 투자 솔루션을 제공하는 팀에는 한 명의 투자 책임자와 20여 명의 투자 전문가들이 일하고 있다. 이들은 스위스 본사와 별도로 독립적으로 아시아 시장 전체의 투자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싱가포르에는 그와 별도로 4명의 어드바이저리가 투자 자문을 돕고 있다.
싱가포르 현지 PB
“지난해 수익률 15~20%, 브로커리지 수입 50% 이상”
싱가포르 현지 PB를 취재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컨피덴셜리티(confidentiality·비밀 보장)’였다. 아시아 부자들을 상대하는 현지 PB의 임원은 취재에 앞서 몇 번이고 비밀 보장을 주문했다. 아침 일찍 상담실에서 만난 그는 비밀 보장을 위해 은행 내에서 직원들의 휴대용 컴퓨터 사용도 금지하고 있다고 했다.
이곳의 PB 조직은 크게 세 파트로 나뉜다. 일선에서 고객을 만나는 프런트 라인(PB)와 미들 라인, 그리고 모든 서류를 처리하는 백 라인다. 미들 라인은 백 라인과 프런트 라인을 이어주는 역할로 법률, 컴플라이언스 등을 지원하며 금융상품을 만든다. 이곳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미들 라인 중 상품개발 라인이다. 상품개발 라인은 상품 분석과 개발, 그리고 이를 PB들에게 전달한다. “최근 싱가포르 PB 시장의 화두는 얼마나 유능한 프로덕트 라인을 구축하느냐다. 싱가포르에는 싱가포르통화당국(MAS), 싱가포르투자청(GIC), 테마섹 등이 엄청난 수익을 내 세수에 반영한다. 이 기관에서 오랫동안 자산을 운용한 유능한 인력들이 상품개발 라인에 포진해 자산 운용의 질을 높이고 있다. 우리도 그중 한 명을 영입했는데 지난해 이머징마켓을 상대로 한 펀드 중 수익률에서 전 세계 1위를 차지했다.”
미들 라인과 직접 연결된 PB들은 전체 인력의 35% 수준. 한 명의 PB는 통상 30명 내외 고객 자산을 관리한다. PB 1명당 관리자산은 평균 2억 달러지만, PB에 따라 10억 달러의 자산을 관리하기도 한다. 그는 “국제수지(BoP)를 150bp(100분의 1%)로 가정하면 1인당 300만 달러를 버는 꼴”이라며 “이만큼 안정적이고 수익성 있는 비즈니스도 없다”고 말했다.
한국 시장에도 밝은 그는 한국 PB들의 가장 큰 문제로 불완전판매를 들었다. PB 고객은 고객마다 적합한 상품이 다른데 한국 PB들은 상품 판매에 집중하다 보니 고객에 따른 자금 계획, 리스크 매니지먼트 등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반면 해외 PB들은 크게 고객의 목표 수익률, 고객이 감내해야 할 위험, 장래 현금흐름 등을 고려해 웰스매니지먼트를 한다는 것이다. 최종 책임은 고객에게 있되 PB와 충분한 협의를 거친 후 상품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불완전판매는 PB들에 대한 불완전한 평가 시스템에서 기인한다. 상품 판매에 중심을 둔 인사 평가를 하기 때문에 PB들은 상품 판매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싱가포르 현지 PB는 평가 시스템이 다르다. 평가는 개량적인 부분과 비개량적인 부분을 모두 감안하는데, 비중은 6대4 수준이다. 비개량적인 평가의 기준은 준법성, 팀워크, 컴플라이언스 등 크게 세 가지다. 이 세 부분을 엄정하게 판단해서 평가에 반영한다. 이 같은 기준에 따라 3년 차 PB들의 연봉은 2억 원이 기준이 된다. 5년 차 이상 시니어들의 연봉은 3억 원 수준. 해외 금융사 PB와 IB들의 경우 급여는 생활비로 쓰고 보너스를 저축하는 게 일반적이다. 보너스는 퍼포먼스에 따라 다양하다. 보너스는 개량적인 부분과 비개량적인 부분을 감안한 성과에 따라 결정된다. 개량적인 부분의 목표치는 매년 25% 상향되는데, 예를 들어 관리자산이 100억 원인 PB라면 이듬해는 125억 원으로 관리자산을 늘려야 한다. 보너스는 여기에 비개량적인 부분을 감안해 0~500%까지 주어진다. 이 은행에는 연봉과 보너스를 합해 10억 원을 받는 이도 있다고 했다. 보수가 많은 경우 일부는 자사주로 지급하기도 한다. 이렇게 받은 자사주는 매년 일정 부분 매도가 가능하며 퇴직하면 모든 주식을 반납해야 한다.
또 하나 부족한 점은 상품의 다양성이다. 제도적인 문제를 감안하더라도 해외 채권과 주식에 대한 정보가 외국 PB에 비해 부족한 게 사실이다. 한국의 은행에 채권과 주식 브로커리지를 허용한다 하더라도 해외 채권과 주식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현 상황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최근 한국에서 브라질 채권, 터키 채권 등에 투자했다 낭패를 본 이들이 많다고 들었다. 채권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브라질 채권이나 터키 채권은 채권의 성격보다는 외환(FX) 상품의 성격이 더 강하다. 지식의 차이로 인해 상품을 보는 입장도 달라지는 것이다.”
해외 주식도 마찬가지다. 그는 “한국의 금융사 중 미국이나 유럽 시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종목을 분석할 능력을 가진 곳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PB들이 펀드 등에만 집중하게 되고, 결국 화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그가 속한 PB센터에서는 일선 PB들이 하루 최소 1500여 건 이상의 채권 보고서를 받는다. PB들은 그중 몇 개를 골라 고객을 만난다. 그중 신용도가 높은 채권에 투자할 때는 은행이 투자 금액의 2배까지 대출해 주기도 한다. 대출 금리도 낮아서 연 1%대다. 채권 투자와 대출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레버리지가 위험하다고는 하지만 투자 대상에 따라 적극적으로 레버리지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관리하는 고객의 평균 운용 수익률은 10%가 넘는다. 싱가포르는 이자소득세, 금융종합과세가 0%다. 여기에 증여세, 상속세도 없다. 매년 10% 수익률을 복리로 따져보라. 다음 세대에 자산을 이전하는 경우도 고려해 보라. 자금 운용의 질 자체가 달라진다.”
물론 수익률은 고객 성향에 따라 차이가 있다. 공격적인 성향의 고객은 해외 주식 비중이 높고, 안정적인 고객은 해외 채권 비중이 높다. 두 경우 모두 전체 자산에서 채권과 주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50~70%. 지난해 평균 고객 수익률은 15~20%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객 상담 시 지난해 수익률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기록은 참고 자료로만 제시하지 과거 수익률을 통해 미래 수익을 암시하는 행위는 절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깨달은 그들만의 리스크 매지니먼트인 셈이다.
싱가포르=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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